53화 이상한 만남
(53/65)
53화 이상한 만남
(53/65)
#53화 이상한 만남
2023.07.23.
리즈는 심히 당혹스러웠다.
치러야 할 값이 총 8브론즈.
마차 삯을 제하지 않더라도 2브론즈 모자란다.
‘어쩌지? 마차는 꼭 타야 하는데.’
먹은 만큼 일을 하겠다고 하면 받아 주려나?
리즈는 슬쩍 주인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일단 인심 좋게 생기긴 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꼭 얼굴과 내면이 일치하진 않지 않은가?
그녀는 그 사실을 두 번의 생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시선을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을 즈음, 리즈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옆 테이블의 바닥 구석에 떨어진 은색 주화 1개였다!
조금 전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슬링 백을 떨어뜨리더니, 거기에서 흘러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테이블의 그늘 속에서도 번쩍이는 은빛이 가히 유혹적이었다…….
‘안 돼, 이건 도둑질이나 다름없어.’
양심이 리즈를 뜯어말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가방을 뒤져서 돈을 훔치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바닥에 떨어진 걸 줍는 것뿐이잖아?
놓인 위치로 보아 저 은화는 소년의 눈에 띄지 못한 채로 계속 저곳에 있다가, 주인 아주머니가 청소할 때나 발견될 가능성이 컸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은화 한 냥쯤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테니, 정말 필요한 사람한테 쓰이면 좋지 않나?
자기 합리화가 끝났다.
리즈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아직 소년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주인 아주머니는 회계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다!’
리즈는 잽싸게 몸을 움직여 테이블 구석의 1실버를 손에 넣었다.
서늘한 주화의 촉감이 죄책감과 든든함을 동시에 들게 했다.
‘미안해요, 소년.’
그나마 리즈의 양심을 달래 준 것은 소년의 복장이 귀족 도련님들의 고급 활동 복장이라는 점, 그리고 조금 전 그의 슬링 백 속에서 쏟아져 나왔던 물건들이 꽤 값나가는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1실버 정도야 아무 문제 없겠지.’
리즈는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서 가게를 나와 도망치듯이 달렸다.
역마차 보관소에 도착했을 땐 마차가 불과 몇 분 전에 떠난 직후였다.
다음 마차는 한 시간 뒤에 출발한다고 했다.
리즈는 마차 삯 5브론즈를 지불하고 표를 받아 챙긴 뒤, 대기소로 갔다.
하지만, 꽤 많은 수의 헌병들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탓에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찾는 아가씨가 여기에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하고서, 되도록 많은 수를 배치해 놓은 게 분명했다.
시간은 너무 더디게 흘러갔다.
‘주변이나 한 바퀴 돌고 올까?’
계속 여기서 마음 졸이며 앉아 있느니 그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밖으로 나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도중 리즈는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발견하고서 그리로 방향을 틀었다.
어딜 가나 헌병이 없는 곳이 없었기에 리즈는 줄곧 긴장 상태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음 편히 쉬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다.
그 골목은 야트막한 돌담이 주욱 늘어선 볕이 잘 드는 골목이었다.
리즈는 담벼락을 따라 천천히 길을 걸었다.
모퉁이를 돌아 마침내 인파와 완전히 단절되는 곳에 막 이르렀을 때였다.
담벼락을 이룬 돌 사이에 자라난 잡초가 노란 꽃을 피운 모습이 보였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여 리즈는 잠시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등 뒤에서 사락-, 하는 옷자락 소리가 들린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지나가는 행인이라기엔 멈춰 있는 시간이 꽤 길었다.
‘설마, 헌병?’
리즈는 뻣뻣해진 고개를 천천히 뒤로 돌렸다.
상대의 행색이 헌병은 아닌 듯했다. 일순 안도감이 들어 어깨의 긴장이 풀렸으나, 잠시뿐이었다.
때마침 골목을 스치는 바람에 로브 자락이 휘익 흩날리자 드러난 상대의 빨간 머리칼이 리즈를 또 다시 옅은 긴장감에 휩싸이게 했다.
아까 그 식당 안의 소년이었다.
“내놔. 내 돈.”
아니. 소년이 아니었다.
꾸미지 않은 미성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리즈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덜 자란 소년이 아니라, 다 자란 여인이었다.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
“돈이라니. 저한테서 왜 그쪽 돈을 찾죠?”
‘어, 어떻게 알았지?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떨어져 있었는데.’
당혹스러움을 억누르며 리즈가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을 해 보였다.
어쩐지 인간 말종이 된 듯싶었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자괴감이나 느낄 때가 아니었다.
소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내가 나중에 주우려고 두고 간 1실버가 돌아와 보니 감쪽같이 사라져 있더군. 돈에 발이 달리지 않은 이상 범인은 너야. 그 식당 안엔 너밖에 없었으니까. 그것도 내 옆자리에 있었지.”
“저 아니에요.”
“너 맞아.”
“증거 있어요?”
없다는 확신에서 나온 배짱이었다.
“증거?”
여인이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귀에 손을 가져갔다.
“있지.”
그녀가 귀걸이에서 펜던트를 분리했다.
리즈는 여인의 동그란 펜던트가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톱니 형상의 표창으로 변하는 광경을 지켜보곤 경악했다.
“이걸 던져서 네 이마빡을 뚫으면 네가 범인인 거고, 아니면 범인이 아닌 거야.”
“그, 그런 억지가 어딨어요?”
때마침 비쳐 든 햇살에 번쩍 빛을 발하는 톱니 끝이 눈에 들어오자 리즈는 더더욱 아연해졌다.
“억지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잖아? 내 무기는 재판관보다 공정하고 현자보다 똑똑하니까.”
‘허세일 거야.’
리즈는 생각했다.
‘고작 1실버 훔쳤다고 저런 걸 던질 리는 없어.’
하지만 여인에게 배어 있는 농도 짙은 권태로움과 권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짓궂은 눈빛이 리즈의 확신을 흔들었다.
세상엔 순전히 제 재미를 위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도 많고 많으니까.
“그럼, 신이시여!”
여인이 제사를 올리듯 표창을 치켜들었다. 한낮의 태양이 은제 표창에 반사되어 하얗게 섬광을 자아냈다. 그러자 정말로 그것이 신의 성물이라도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부디 현명하신 판단으로 참과 거짓을 가려 주시옵소서…….”
“잠깐만요!”
여인이 막 손목을 젖히던 찰나, 두려움에 잠식당한 리즈가 실토했다.
“제, 제가 가져갔어요.”
“…….”
“돈이…… 부족해서 그만……. 죄송합니다.”
리즈가 꾸벅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러곤 남은 돈을 몽땅 꺼내 여인 앞에 내밀었다.
7브론즈가 비었다.
“이거라도 우선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짙은 자괴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리즈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나머지는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봐주겠지 하는 확신이 있었다. 어쨌거나 부유한 사람임에 틀림없으니.
“나중 말고 지금 갚아.”
“…….”
“돈이 없으면 다른 걸로라도 갚으란 말이지.”
“다른 거…… 뭐요?”
“뭐든. 날 좀 재밌게 해 줘 봐.”
여인은 리즈가 7브론즈치의 재미를 선사할 때까지 절대로 놔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리즈는 자신이 이 여인을 위해 할 수 있는 7브론즈치의 장기가 뭐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제 유일한 장기는 피아노 연주이지만, 그건 이 귀족 망나니의 살기만 더 돋울 것 같았다.
불현듯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것이 있었다.
“좋아요.”
리즈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재밌게 해 드리죠. 대신…….”
“…….”
“1실버 더 주세요. 그 정도 값어치는 하는 광경이거든요.”
***
그토록 단단하던 대리석 바닥이 요즘같이 살얼음처럼 느껴질 때가 없었다.
적어도 황궁 시중인들에겐 그러했다.
며칠째, 그들은 발소리도 함부로 내지 못했다.
조심조심 걷는 것도 모자라, 붉은 융단이 깔린 곳이 아니면 발을 아예 딛지도 않았다.
아무도 그들에게 그리하라 명령하진 않았다. 다만, 궁궐 안을 기묘하게 내리누르는 차갑고 위압적인 분위기가 그들을 극도로 조심스럽게 만든 것뿐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시중인들은 사정이 나았다.
지금 막 중앙 홀을 가로지르는, 잔뜩 굽어진 어깨와 거북목을 하고선 면목 없는 얼굴로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자들에 비하면.
‘오늘도 못 찾았나 보지?’
‘그런 거 같아.’
시중인들이 멀어져 가는 수도 헌병대의 뒷모습을 보며 눈짓으로 대화했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못 찾았습니다.”
헌병대장이 융단 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고했다. 직속 부하 둘은 머리를 땅에 박고 있었다.
“짐은 다 놔두고 몸만 사라지셨습니다.”
“…….”
“소…… 송구합니다. 폐하!”
대장은 불호령을 각오했다. 전날 자신들을 소집했을 때의 황제를 떠올리자면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았다.
그날, 그는 눈 닿는 곳은 모조리 쓸어 버릴 듯 매섭고 날카로운 눈길로 자신들을 보았다.
즉위 첫날만 해도 근엄하면서도 자상한 모습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던 황제가, 서릿발 날리는 스산한 눈빛으로 온 제국을 뒤집어서라도 영애 한 명을 찾으라 명했을 때의 모습을 그들은 잊을 수가 없었다.
찾아내지 못하면 피바람이 불어 닥칠 것을 각오하라는 태도였다.
헌병대장은 혹시나 몰라 황궁으로 오기 전 유언장을 작성하고 나왔다. 재산도 정리하고, 부인에겐 좋은 사람 만나라며 작별 인사까지 하고 나왔다. 같이 온 대원들도 비슷했다.
그렇게 비장한 각오로 왔는데.
“그렇군.”
“……?”
웬일로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목소리가 의외로 담담했다.
뜻밖의 상황에 그들은 모두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팔걸이에 한 팔을 걸치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뭐지? 우리 살아난 건가?’
대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대장은 달랐다. 그는 불호령이 떨어질 때보다 더한 두려움을 느꼈다.
관자놀이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손끝은 마치 뇌수를 뽑아내듯 섬뜩했고,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결코 공허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날카롭게 벼려진 창끝처럼 보는 이를 흠칫 떨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상관이 그러니 대원들도 따라 머리를 박았다.
이윽고 관자놀이를 두드리던 손놀림이 뚝 그치며 팔걸이에 도로 얹어졌다.
그러고선, 그는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수색 대상을 바꾼다.”
“……?”
“이마에 삼 센티미터가량 일자 흉터가 있는 여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