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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빈털터리가 되었다 (52/65)


#52화 빈털터리가 되었다
2023.07.22.



 
‘이, 이게 무슨 일이지? 내 얼굴이 왜 저기에…….’

리즈는 놀랍다 못해 황당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잠깐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어머니가 날 찾는 건가? 반드시 날 데리고 참석해야만 하는 사교 모임이라도 있어서?’

전혀 그럴 것 같진 않지만…….

아무튼 생각은 나중에 해야 했다.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중인이 리즈가 묵고 있는 숙소 창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헌병들이 고개를 들었다. 리즈는 얼른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상황이 자신에게 썩 유리하지 않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리즈는 가진 것을 다 놔두고 손가방 하나만을 챙겼다. 도망친 것으로 알면 더 곤란한 상황이 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가 복도를 가로지른 뒤, 계단을 올라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가장 구석진 방이 비어 있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래 봤자 잠시일 뿐. 같은 건물 안이니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리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남겨진 헌병 하나가 여관 입구를 막고 있었다.

탈출하긴 글렀다.

‘뭐, 들키면 들키라지. 누가 뭣 때문에 찾는진 모르겠지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기껏해야 집으로 돌려보내겠지.’

집으로 돌려보내겠지…….

그 말이 리즈에겐 사형 선고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로부터 또 막말을 들으며 살아가야 하는 삶이 끔찍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

순간 머릿속을 번뜩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리즈는 손가방을 침대 위에 쏟아 냈다. 그러자 조그만 돈 지갑과 청남색 벨벳 케이스, 그리고 곱게 접힌 냅킨 하나가 들어 있었다.

리즈는 냅킨을 펼쳤다.

좀 전까지 긴장으로 얼룩졌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외모를 바꿔 주는 묘약이 있었다!

반년 전쯤, 케인의 방 마루 널빤지 아래에서 꺼낸 약 한 알을 네 등분하여 한 조각을 먹고 나머지 세 조각을 남겨두었다. 혹시나 필요한 일이 있을까 싶어서였는데, 마침 잘되었다.

하지만…….

“아플 텐데…….”

약이 주는 고통을 떠올리자 미소가 점점 흐려졌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해야지. 당연히.”

리즈는 눈을 질끈 감고 한 조각을 꿀꺽 삼켰다.

***

“아무 데도 없습니다.”

건물 서편을 수색했던 헌병 대원 둘이 돌아와서 대장에게 보고했다.

“그렇군.”

동편 쪽도 수색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대장은 까끌까끌한 턱을 만지작거리며 한 곳을 노려보았다.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방이었다.

‘짐은 그대로 둔 채 몸만 사라졌고, 밖으로 나간 흔적은 없으니 저 방에 있는 게 틀림없어.’

대장이 눈빛으로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신속하게, 하지만 황제께서 엄명하셨으니 대상에겐 되도록 털끝 하나 손대지 않도록.’

똑똑-.

헌병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나, 둘, 셋.’

대장이 손가락으로 수를 셌다. 그러고선 숨을 흐읍-, 들이켜며 문고리에 손을 뻗는데.

삐걱-.

문이 알아서 열렸다.

방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다갈색 머리에 검은 눈의 여인이었다.

“무슨 일이죠?”

“아…… 그게…….”

헌병들은 여인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초상화를 꺼내 볼 필요도 없이 얼굴이 전혀 달랐다.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요?”

갈색 머리 여인이 짜증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헌병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을 미루었다. 결국 대장이 말했다.

“무례를 범한 점 사과드립니다. 실은 저희가 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만, 혹시 이런 사람 보셨습니까?”

그가 초상화를 여인 앞에 내밀었다.

“글쎄요…….”

여인이 기억이 날듯 말듯 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별안간 눈빛이 반짝였다.

“아! 이 여자!”

“보, 보셨습니까?”

“네. 봤어요.”

“언제, 어디서 보셨죠?”

대장이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여인이 손끝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조금 전 저쪽 골목으로 사라졌어요.”

“사라졌다고요? 나갔단 말씀입니까?”

대장이 금세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입구는 저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말끝을 흐리며 여인의 너머로 보이는 방을 쓰윽 훑었다. 그러자 여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옆으로 비켜섰다.

“혹시 제가 숨겨 주었을 거라 의심하시는 거라면, 들어오셔서 확인해 보세요.”

“아, 그건 아닌데……. 아무튼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헌병들이 정중히 예를 갖추곤 숙소를 수색했다. 찾는 인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대장이 고개 숙여 사죄한 뒤 물었다.

“한데 그분이 정말 밖으로 나가시던가요?”

“그럼요, 제가 이 창가에서 똑똑히 봤어요. 분명히 저쪽 길모퉁이를 돌았어요.”

여인이 다시 한번 아까 그 길을 가리켰다.

“협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실례 많았습니다.”

헌병 대장이 다시 한번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그러곤 부하들과 함께 서둘러 복도를 달려갔다.

자신이 가리킨 방향으로 황급히 향하는 헌병들을 창 너머로 바라보며, 여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들킬 뻔했네.”

한데 뒤늦게 생각난 것이 그녀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분? 그분이라고?”

리즈는 어째서 자신이 ‘그분’ 소리를 듣는 건지 의아했다.

헌병 대원한테 그분 칭호를 듣는 사람이라면 범죄자 신분은 아니라는 건데.

“진짜 어머니가 나를 찾기라도 하는 건가?”

하지만 그것도 딱히 아닌 것 같았다.

귀족 영애는 사교계에서나 대우받지, 헌병들이 존대할 만한 신분은 아니니까.

‘그럼 대체 뭐지?’

리즈는 제 원래 숙소로 돌아가며 곰곰이 어찌 된 영문인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복도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헌병 두 사람이 제 방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었다!

제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여긴 대장이 지시한 것 같았다.

‘젠장. 저 방에 내 옷가지랑 보석이랑 다 있는데!’

리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방법을 모색해 보았다.

하지만 무슨 수로 저 건장한 남자들을 뚫고 제 방에 들어간단 말인가?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언제 얼굴이 돌아올지 모르니 계속 여기에 있을 수도 없다.

일단은 호텔밖으로 나가야 했다. 빈손으로…….

사실 손가방을 들고 있었기에 완전히 빈손은 아니었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가방 속에 돈 될 만한 물건이라곤 토파즈 세트 하나뿐이니까.

“일단 보석상부터 가야겠군.”

리즈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

“저기……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요?”

보석상이 없어서 전당포에 왔더니, 주인장 할아버지가 돋보기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쓰읍’ 소리를 내며 고개를 연신 갸웃하는 게 리즈는 묘하게 불안했다.

‘그래도 유명 보석상에서 구입한 토파즈 목걸인데 금화 두 개는 받겠지?’

주인장이 돋보기를 내려놓더니 말했다.

“5브론즈.”

“네에?”

리즈의 목소리가 좁은 전당포 내부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거 수도 중심부에 있는 마리크 보석상에서 샀어요. 마, 리, 크!”

“거기선 1실버에 팔았겠지.”

“그…… 그럴 리가요. 토파즌데?”

“불순물이 섞인 토파즈지. 품질로 따지면 최하급 정도랄까. 보니까 세공도 조잡하고. 아마도 정식 세공사가 아니라 그 밑의 도제가 만들었을 거야.”

‘아…… 어머니! 정말 끝까지 이러시깁니까!’

리즈는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주인장은 그런 리즈를 잠시 딱하게 바라보더니 서랍장에서 동전을 하나를 더 꺼내었다.

“한 냥 더 얹었어. 어디 가서도 이 이상은 못 받아.”

리즈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리즈는 동전을 손가방 속에 쓸어 담고선 회색 공간을 벗어났다.

호텔에서 손가방 하나 들고나올 때보다 더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동전 여섯 개라니. 그것도 한 개는 거의 적선 받다시피 얻어 낸 거라니.

이걸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리즈는 잠시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것부터 생각하자. 제일 중요한 건 마차야. 마차 삯이 얼마였지?’

리즈는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답이 나왔다.

‘맙소사. 5브론즈네. 1브론즈밖에 안 남네.’

어제만 해도 너무 싸서 돈 같지도 않았던 마차 삯이 이 순간 하염없이 비싸 보였다.

그래도 모자라지 않은 게 어딘가.

리즈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꼬르륵-.

갑자기 심한 허기가 몰려왔다. 숙취 해소도 제대로 안 된 탓에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마침 그녀가 지나는 골목에 여행자들을 위한 식당이 있었다.

리즈는 유리창 안을 기웃거리며 가격표를 찾았다. 자신의 전 재산으로 사 먹을 만한 음식이 혹시라도 있을까 해서.

“있다!”

하물며 자신이 숙취 해소를 위해 먹으려 했던 해산물 스튜였다.

리즈는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식사 시간이 지난 터라 손님은 한 명뿐이었다.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곱상한 소년이었다.

한쪽 귀에 늘어진 크고 동그란 귀걸이와 붉은색 머리칼이 잠시나마 리즈의 관심을 끌었다.

자신의 본래 머리색과 같아서.

“뭘 드릴까요?”

테이블에 앉으니 여주인이 물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리즈는 당당하게 1브론즈라고 적혀 있는 메뉴를 가리켰다.

“저거 주세요.”

1브론즈면 전생의 돈으로 2천 원쯤 된다.

2천 원짜리 음식에 맛과 질을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리즈는 배를 채우는 데 의의를 두었다.

한데…….

“맛있게 드세요.”

점원이 음식을 내려놓자 리즈의 자수정 빛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장정 한 사람이 배불리 먹을 만한 양이 대접에 담겨 나왔다. 새우는 통통하게 살이 올랐고, 고리 모양의 오징어는 큼지막했으며, 갖가지 조개들이 입을 벌려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와아…… 이렇게 장사해서 남는 게 있을까?’

리즈는 잠깐 의아했지만 이내 걱정을 지웠다.

장사꾼이 밑지고 파는 법이 절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어디서 재료를 싸게 공수해 오나 보다.’

리즈는 대충 그렇게만 이해하곤 스푼을 들었다.

“제기랄!”

그때, 불현듯 들려온 거친 욕설에 리즈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 외에 유일한 손님이던 곱상한 소년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냅킨으로 가슴팍을 닦아 내는 것이 보였다.

베이지색 셔츠 앞섶에 빨간 국물이 몇 방울 튀어 있었다.

‘아, 그 심정 나도 잘 알지.’

리즈는 언젠가 수도 저잣거리에서 겪었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불과 두어 절기 전의 일인데도 몇 년은 흐른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소년은 냅킨으로 안 되겠던지 세면대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무릎 위에 놓인 그의 슬링 백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내용물을 와르르 쏟아 냈다.

“에잇, 빌어먹을!”

또 한 번의 욕설이 그 곱상한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입 한번 되게 거치네. 그렇게 안 생겨 가지고.’

대충 물건을 쓸어 담고서 세면실로 향하는 빨간 머리 소년을 보며 리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서둘러 식사를 시작했다.

너무 허겁지겁 먹어서인지 반의반도 먹지 않았는데 벌써 배가 불러 왔다.

무리해서 먹었다간 마차 안에서 실수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도 밖은 길이 더 험하다고 들었으니까.

“아……. 잘 먹었다.”

적당히 식사를 마친 리즈는 배를 두드리며 한결 여유로워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게 정겨운 시골 식당이었다.

낡은 걸상, 얼룩진 유리창, 벽에 걸린 빛바랜 그림, 그리고 메뉴판…….

“……?”

순식간에 리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저, 저게 뭐야? 왜 저게 저기 있어?”

배부른 리즈의 눈이 1브론즈 옆에 적힌 글자를 이제야 발견했다.

「곱빼기 +1브론즈」

리즈는 앞의 ‘곱빼기 +’를 못 보았던 것이다.

‘어쩐지 심하게 싸다 했어. 그럼…… 원래 가격은?’

리즈의 시선이 위로 이동했다.

「해산물 스튜, 7브론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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