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잘 있어라,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51/65)


#51화 잘 있어라,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202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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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꼬마야. 너는 예의범절도 안 배웠냐?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냐고?”

건장해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앞에 앉은 소년에게 말했다.

오늘따라 역마차를 타려는 손님이 많은 탓에 남자는 대기소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계속 서 있어야 했는데, 급기야 그 짜증을 가장 만만한 소년에게 풀어놓고 만 것이었다.

소년은 잠깐 남자를 올려다보더니, 시비가 엮여서 좋을 게 없다 생각이 들었는지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앉으시란 말도 없이 자리를 떴다.

쯧쯧-.

등 뒤에서 혀를 차며 나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 버릇없는 놈을 다 봤나? 세상 말세구먼.”

‘말세긴 말세지. 당신처럼 건강하다 못해 천하장사 같은 사람이 고작 여자애 자리 하나 못 빼앗아서 안달인 걸 보니.’

남자는 여자애가 아니라 소년의 자리를 빼앗은 거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신체적으로 약하긴 매한가지였다.

마땅히 앉을 곳도 없고 해서 소년으로 오해받은 여자애는 마차 승강장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역마차가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가량 늦어질 거라고 해서인지, 벌써부터 승강장에 대기 중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무원은 제 전용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소년은 비로소 후드를 벗을 수 있었다.

“휴우…… 갑갑해 죽는 줄 알았네.”

소년이 여인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한데 묶어 곱게 땋아 내린 적발이 햇빛을 받아 더욱 선연하게 빛났다. 눈매는 매끈했으며, 입꼬리는 한껏 끌어 올려져선 그 안의 하얗고 고른 치아를 드러냈다. 따스한 봄 햇살만큼이나 생기발랄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리즈는 눈을 감고 코끝으로 느껴지는 자유의 내음을 한껏 들이켰다.

“아…… 좋다.”

조금 더 빨리 나왔으면 더 좋았을걸.

왜 이것저것 따지고 미루기만 했을까? 바보같이.

진작 이렇게 도망쳤으면 좋았잖아.

결혼은 계속 파투 나지, 어머니는 막말을 퍼부으시지, 착한 줄 알았던 여주는 어머니와 붙어먹기 바쁘지.

리즈는 차라리 고아일 때가 나았다고 생각했다.

지독하게 외로웠던 고아의 삶을 몸소 체험해 본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정도면 말 다했다.

“그래도…….”

리즈는 다시 한번 한숨을 후우 내쉬며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미라벨이 있어서 덜 외로웠어.”

하지만 미라벨은 그녀가 집을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 때문에 더 떠나야 했다. 자신의 사고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결혼도 포기하려는 것 같으니까.

아무튼 잘되었다!

케인은 황궁으로 돌아가 황제가 되었고, 집안은 자신 하나 없어도 잘 굴러갈 테고. 아무것도 걸릴 것은 없었다.

자신이 할 일은 역마차를 타고서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다.

되도록 멀리. 가능한 세상 끝까지.

리즈는 슬링 백 속에서 두 번 접힌 종이를 펼쳤다. 루젠시아 제국 지형도였다.

중심에서 살짝 동북쪽에 치우친 곳에 수도가 있었지만 리즈는 그곳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오직 남서쪽 끝의 해안 지방을 담고 있었다.

“그래, 여기로 가자.”

목적지가 정해졌다.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인 데다 새파란 바다까지 원 없이 볼 수 있는 곳이라니, 이 이상 좋은 곳이 없었다.

그곳에선 뭐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이며 보석이며 가진 건 다 챙겨 왔으니, 새로이 시작하지 못할 이유는 아무 데도 없었다.

이제 역마차만 들어오면 되는데…….

“어?”

순간 리즈의 눈에 지평선 위로 빠르게 솟아오르고 있는 갈색 말 두 필이 보였다. 말들은 마부의 지휘하에 속도를 점점 늦추었고, 그 옆에 앉은 시동은 손에 든 종을 딸랑딸랑 울렸다.

마차가 도착한 것이었다.

꾸벅꾸벅 졸던 역무원이 화들짝 깨어나 입가를 쓰윽 훔쳤다. 대기소에 있던 사람들은 예상보다 이른 마차의 등장에 서로 먼저 나오려고 어깨를 밀쳐 댔다.

미리 나와 있던 리즈는 여유로웠다. 그녀는 후드로 긴 머리를 덮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리즈는 자신을 예절 운운하며 쫓아낸 남자를 향해 싱긋 웃어 준 뒤 여유롭게 올라탔다. 그리고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멀어지는 수도를 향해 속으로 외쳤다.

‘잘 있어라.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

리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수도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수도가 얼마나 넓은지도 몰랐다.

마차를 타고 세 시간을 달린 끝에 깨달은 것은 첫째, 수도는 넓은 게 아니라 광활하다는 것이었고, 둘째, 자신은 비포장도로를 마차로 세 시간 넘게 달릴 만큼 전정 기관이 튼튼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차 환승소에 다다랐을 때, 리즈는 초주검 상태였다.

약 세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온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보였는데, 이젠 온통 노랗게만 보였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속은 쉴 새 없이 울렁거렸다. 보는 눈만 없다면 바닥에 드러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 다음 마차 탈 거유?”

대기실 장의자에 무릎을 세워 그 위에 이마를 대고 있으려니 역무원이 물었다.

리즈는 대답 대신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러자 역무원이 다시 한번 물었다.

“이번이 막찬데. 그래도 안 탈 거유?”

리즈는 이번에도 입 대신 손으로 말했다.

‘안 타는 게 아니라 못 타요…….’

이런 일을 종종 보아 온 역무원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대기소를 벗어났다.

대기소엔 이제 리즈만 남게 되었다.

서산 너머로 해가 져 버린 지 오래였다. 마차에서 내린 리즈가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가슴을 두드릴 때부터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조금 더 있으면 더욱 새카만 어둠이 찾아들 것이다. 그 전에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리즈는 무릎에서 얼굴을 들었다. 그러곤 창백해진 낯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칼리에르 외성 마을’이라고 적힌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리즈가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칼리에르 외성.

수도의 외연을 둘러싸고 있는 성이다. 그렇다는 건 아직도 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정말 더럽게도 넓네.”

고생고생 하며 달려왔는데 아직도 수도를 못 벗어나다니.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남쪽 해안 지방에 도착할까? 한 달 안엔 도착할 수 있을까?

리즈는 갑자기 막막해졌다.

하지만 일단은 묵을 곳부터 찾아야 했다.

다행인 것은 이곳이 마차 환승소인 데다 외성과 맞닿은 곳이라 숙박업이 성행한다는 점이었다.

리즈는 슬링 백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 공기를 들이켜니 욕지기가 조금씩 가시는 느낌이었다.

환승소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저잣거리가 형성되어 있었고, 숙박업소 점원들이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이봐요, 청년. 잘 곳은 정했슈? 안정했다면 우리 집 어떻소? 일박에 삼 실버 해 드릴게.”

“우리 집은 이 실버 칠 브론즈 해 드리지. 식사도 무료 제공이라오.”

리즈는 굳이 싼 곳을 택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돈이 많았다. 보석도 많았다.

조금 아껴 쓴다면 평생을 먹고살 만큼도 되었다. 하지만 리즈는 아껴 쓰고 평생을 먹고사느니, 호사롭게 쓰고 모자라면 일을 하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그런고로, 그녀는 가장 시설이 깔끔하고 서비스가 좋은 호텔에 짐을 풀었다.

따뜻한 물에 입욕을 하고, 폭신한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배도 슬슬 고파져서 룸서비스를 시켰다.

잠시 후 주인이 수프와 빵, 양고기 구이, 샐러드, 그리고 적포도주까지 한 병 놓인 정찬을 가져왔다.

방문을 연 호텔 주인은 조금 의아했다. 자신이 이 방으로 안내한 이는 분명 망토 입은 남자였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즈가 주인의 손에 은화 한 냥을 쥐여 주자 금세 의아함을 거두곤 물러났다.

혼자 남은 리즈는 와인 잔을 들어 코끝으로 달콤한 향을 음미했다.

“으음…… 시작이 좋은데?”

잔은 금세 비워졌고 또 채워졌다. 한 잔이 제 주량인 줄 알았는데 오늘 그게 아니라는 걸 리즈는 깨달았다.

그녀는 한 병을 거뜬히 비웠다.

“뭐야? 나 술 못 마시는 거 아니었네?”

내친김에 한 병 더 마셔 볼까 싶었다. 그래서 설렁줄을 잡아당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세상이 빙그르 돌며 침대가 저를 덮칠 듯 다가오더니…… 기억이 끊어졌다.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

낯선 침대, 낯선 천장. 광막한 우주 한가운데 새로 태어난 기분.

꼭 예전 어디선가 느껴 본 기분인데?

리즈는 머리를 또르르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다.

예전엔 저기 누가 있었지. 내 옆에 함께 누워 있었지. 자지도 않았으면서 자는 척 나를 속였지.

리즈는 그때의 기억을 잠시 되짚어 보다 이내 떨쳐 버렸다.

과거와는 그 어떤 식으로도 얽히고 싶지 않았으므로.

리즈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새로운 인연도 맺고 싶었다. 이를테면, 결혼 같은 거…….

‘보나 마나 이번에도 꽝이겠지만.’

몇 번이나 혼사가 좌절되자 리즈는 결혼에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제 결혼은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 같았다.

리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와인 한 병을 다 비운 것치곤 숙취가 없었다. 살짝 머리가 지끈거리는 정도야 애교다.

그래도 마차를 타고 또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니까 컨디션을 끌어 올릴 필요는 있다.

리즈는 설렁줄을 잡아당겨 호텔 시중인을 호출했다.

“예, 아가씨. 뭐 필요하십니까?”

“땀이 날 만큼 매콤한 음식 있을까요?”

시중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해산물 스튜 어떠십니까? 마늘과 페페론치노가 들어가서 매콤하긴 할 겁니다.”

“그럼 그걸로 주세요.”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먹어야지.

시중인을 물리고 나서 리즈는 찬물에 얼굴을 씻고, 엉킨 머리를 빗질했다. 그러곤 활동복 차림으로 갈아입으려는데.

갑자기 창밖이 소란스러웠다.

커튼을 열어젖혀 아래를 내려다보니, 앞마당에 네 사람과 말 세 필이 있었다. 네 사람 중 세 사람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차림새로 보아 헌병 대원 같았다. 말 세 필은 그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조금 전 이 방에서 나간 시중인이었다.

세 헌병 대원이 시중인에게 뭔가를 보여 주며 물었다. 언뜻 보니 초상화 같았다.

‘누구 초상화지?’

리즈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서 창틀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의 초상화인지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는데…….

허억-!

“저…… 저건…….”

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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