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황제의 청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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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황제의 청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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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황제의 청혼
2023.07.20.
구혼장이 도착한 바로 그때,
후작저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테두리에 금장을 두른 휘황찬란한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기품 있는 호위병들이 그 앞뒤에 포진해 있었다. 선두에 있던 호위대장이 회중시계를 한참 바라보더니 딸깍-, 덮개를 닫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마차 가까이 다가온 그가 정중히 고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열어.”
마차 안에서 들려온 굵은 목소리는 위엄을 담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의 귀에 확실히 꽂혀 드는 음성이었다.
마차 문이 열렸다.
남자가 계단도 밟지 않고서 긴 다리를 성큼 땅에 내렸다.
호위병들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는 것으로 주군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양념에 불과했다.
남자는 그 자체로 압도적이었다.
매끈하게 넘긴 앞머리 아래로 드러난 완벽하게 조화로운 이목구비, 모든 호위병들을 내려다보는 큰 키와 옷으로도 감출 수 없는 각지고 비율 좋은 몸매. 마지막으로 그가 자아내는 묵직한 위압감에 사람들은 절로 머리가 숙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차엔 신분을 나타내는 그 어떤 문장 장식도 달려 있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알아보았다.
그는 불과 열흘 전 즉위식을 치른 루젠시아의 적통 황제였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후광이 그에게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타닥타닥-.
분주한 발걸음 소리에 헤르시스가 고개를 돌렸다.
집사와 시중인을 대동한 베리움 부인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서둘러 준비한 기색이 역력한 부인의 얼굴을 보니 헤르시스는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구혼장을 보내고 적어도 한 시간은 준비할 시간을 주었어야 했나 싶었다.
십 분은 제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하지만 정작 베리움 부인 본인은 아무 불만이 없었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폐하.”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한 뒤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본 클레르 베리움은 기절할 뻔했다.
“다…… 당신은…….”
남편의 제자잖아?
“오랜만이오. 후작부인.”
“이, 이게 어, 어떻게 된 일인지…….”
부인은 무척이나 당황해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과거 신분을 속여서 괘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연하다. 자신을 사교계의 여왕으로 만들어 줄 사람인데 그런 오만불손한 생각이 들 리가.
“부인을 기만한 점에 대해선 사죄하겠소.”
헤르시스의 말에 부인은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기만이라뇨.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야 조금 놀라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가고도 남습니다. 신분을 드러내기 힘드셨겠지요.”
그녀는 황제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정문을 지나 현관으로 향하는 동안, 부인은 자신이 손수 가꾸…… 지는 않았지만,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매일같이 닦달한 화단을 보여 주었다.
“여긴 원래 튤립 화단이에요. 아직은 날이 추운 관계로 구근을 유리온실에서 키우고 있지만, 조금 더 따뜻해지면 다시 이쪽으로 옮겨 심을 거랍니다.”
“글쎄. 튤립 화단치곤 너무 음지에 있는 게 아닌가 싶군.”
“…….”
황제의 반응에 부인이 슬그머니 집사를 돌아보았다. 집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가만히 계세요, 마님.’
부인과 황제는 이제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화단에 대해선 잘 몰라도 집안에 대해선 잘 아는 부인은, 이번에야말로 이 유서 깊은 저택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마음껏 뽐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초대 변경백을 맡으셨던 베리움 후작께서 손수 설계하신 집으로…….”
“베리움 영애를 만나고 싶군.”
부인만큼이나 이 집에 대해서 잘 아는 황제가 그녀 말을 잘랐다.
“아…… 얼른 불러오겠습니다. 얘가 치장이 좀 길어지네?”
“재촉은 하지 말도록. 천천히 집 안 구경하면서 기다릴 테니.”
“예에, 폐하.”
부인이 안내를 맡기기 위해 집사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헤르시스가 막았다.
“됐소. 그리 어려운 구조도 아니니 혼자 둘러보겠소.”
“아…… 그래도 어떻게…….”
부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주저했지만,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깊숙이 머리를 숙이고서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중앙 계단 근처에 이른 부인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황제가 익숙하게 복도를 돌아 동편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상한 일이네? 우리 집, 처음 온 사람한텐 헤매기 딱 좋은 구조인데…….’
부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
“여전하네. 이 집은.”
주변을 둘러보며 헤르시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자신이 떠날 때와 똑같았다.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도 적막감이 감도는 공기하며, 온통 밝은 색상에 화사한 꽃잎 무늬 소품들 천지인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어두운 분위기 하며. 그리고…….
해체 직전의 가정 특유의 분위기.
단 하루를 살아도 내 집처럼 느껴지는 곳이 있는 반면에 이곳은 십 년을 살아도 남의 집 같았다. 도무지 정이 붙지 않는 집이다. 이런 집에서 리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나마 미라벨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그가 이 집에서 나가던 날 무슨 일이 있어도 리즈를 함께 데리고 나갔을 것이다.
문득 뭔가 생각난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밖으로 꺼냈을 땐 조그만 진홍색 벨벳 케이스와 함께였다. 덮개를 들어 올리니 파란 보석 하나가 샹들리에 불빛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토파즈, 리즈의 탄생석 반지였다.
이곳에 로레인 귀족으로 찾아왔던 날 그녀에게서 받아 낸 귀걸이도 토파즈였지만, 너무 저급품이었다.
“그래도 제 어미에게 받은 첫 선물이라고 자랑스레 착용했더랬지.”
버리지 않고 돌려준 건 그 때문이었다.
반지를 가만히 응시하는 헤르시스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맺혔다.
병적으로 완벽에 집착하는 보석 장인이 한 달이나 걸려 만들어 왔을 땐 그 자리에서 목을 칠 뻔했다.
완성품을 보지 못했으면 틀림없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급이 다른 파란빛과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 표면을 본 순간 그를 용서해 주었다.
기다린 만큼 보람이 있었다.
헤르시스는 한시라도 빨리 리즈의 손에 약혼반지를 끼워 주고 싶었다.
순순히 손을 내밀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이 결혼에 본인의 의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전에.
사락-.
문득 들려온 치맛자락 소리에 헤르시스가 반지 케이스를 닫았다.
천천히 돌아선 그의 눈매는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동요할 이유가 없었다.
나타난 이는 리즈가 아니었으니.
***
릴리아는 몹시 어리둥절했다.
‘황제? 황제가 구혼을 했다고? 아니, 곧 국혼을 치를 거라던 황제가 왜 언니에게?’
둥그렇게 떠진 릴리아의 눈매가 휘어진 건 이제 막 떠오른 그럴싸한 생각 때문이었다.
‘여기 언니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네. 결혼 직전에 파혼을 한 거겠지. 오죽 못났으면 황제가 되고서도 파혼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언니를 진심으로 축하해 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릴리아는 매무새를 단정히 다듬고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작게 인기척을 내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건 돌아선 황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 남자다! 그날 무도회에서 자신의 시선을 끌었던 남자. 자신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만들고 있는 남자.
그런데 이 남자가 황제라니.
그리고 지금…… 언니한테 청혼을 하러 왔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릴리아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문득 제 성인식에서의 일이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케인 이외의 남자는 남자로 보지도 않던 언니가 낯선 남자랑 몸을 맞대고 춤을 추는 게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다.
언니는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 남자가 로레인 귀족이 아니라 황태자였다는 것을.
‘그래. 생각해 보니 그즈음 언니가 케인에 대한 관심이 조금 시들해졌어. 이렇게 잘난 남자가 있으니 케인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게지. 역시 영악한 언니. 진작에 알아봤어야 하는데. 언니처럼 세상만사 관심 없다는 사람이 이런 데는 약삭빠르게 행동한다는 것을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비난을 퍼부은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릴리아도 알았다.
릴리아는 한발 늦어 버린 자신이 애석하고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케인이 떠나고 죽어 버린 내 심장을 유일하게 뛰게 해 줄 남자인데. 이렇게 가슴 설레는 남자를 또 만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째서 이 사람마저 언니냐고……!’
울컥 치솟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릴리아는 다소곳이 인사를 올렸다.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베리움 후작의 차녀, 릴리아라고 합니다.”
헤르시스는 무감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리즈는 나타나지 않았고, 릴리아는 어머니가 말한 대로 리즈가 준비될 때까지 계속 말동무가 되어 줄 작정으로 옆에 있었다.
하긴, 어머니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릴리아는 옆에 있을 생각이었다. 조금이라도 이 남자의 마음을 돌릴 여지가 있는지, 구혼 대상을 자기 쪽으로 바꿀 생각이 있는지 떠보기 위해서.
“기다리시는 동안 제가 집 안내를 해 드려도 될까요, 폐하?”
“괜찮소. 이미 볼 만큼 다 봤으니.”
“그럼 차라도 한잔하시겠어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요. 언니가 치장을 공들여 하는 편이라 많이들 기다리시곤 한답니다.”
“기다린 만큼 보람이 있겠지. 난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영애 일 보시오.”
헤르시스가 건조한 대답으로 여지를 주지 않자 릴리아의 맞잡은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마침 그때 레나가 달려와 릴리아에게 고했다.
“아가씨, 여기 계셨네요? 방에 편지지 갖다 놨습니다. 베르트 공자께 서한을 쓰실 거라 말하니 집사 어른께서 최고급로…….”
“어머, 레나 너도 참……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릴리아가 다급히 말을 자르며 웃었다.
“……예? 하지만 분명히…….”
레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릴리아는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으며 황제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선, 그의 관심이 자신에게 향해 있지 않다는 걸 알자 곧바로 레나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다.
‘가. 방해하지 말고.’
레나는 여전히 영문을 몰라 했지만, 어쨌든 눈빛의 의미는 알아차렸다.
그러고선 아가씨의 말대로 사라지려 하는데, 천장을 두드리는 어수선한 발소리에 우뚝 멈춰 서선 위를 올려다보았다.
헤르시스와 릴리아도 그 소리를 들은 듯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후작부인이 그들이 있는 곳에 나타났다. 얼굴에 만든 과장된 미소가 짐짓 어색했다.
“폐하, 몹시 송구스러우나, 리즈가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요. 번거로우시겠지만 다른 날 다시 방문해 주시면…….”
“거기.”
황제가 시선을 돌려 서두르는 기색으로 복도를 지나치는 시중인 하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짙은 갈색 머리에 치켜 올라간 눈매를 가진 여자 시중인 하나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부인의 옆에 섰다. 그녀는 반절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막대하던 몰락 귀족 출신 시중인이었지만, 이젠 사자 앞에 선 생쥐처럼 벌벌 떠는 가련한 존재일 뿐이었다.
“무슨 일인지 말하라.”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 가련한 시중인을 한층 더 경련하게 만들었다.
“그, 그게…….”
베리움 부인이 몰래 그녀의 팔뚝을 꼬집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 남자가 제대로 발산하기 시작한 숨 막히는 위엄 앞에선 주인 마님의 위협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리즈 아가씨가 사라지셨습니다.”
“…….”
“옷이랑 보석이랑 싹 들고 사라지셨습니다. 찾지 말아 달라는 쪽지 한 장만 남기고서.”
황제의 금빛 눈동자가 잿빛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