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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비난은 리즈 몫 (49/65)


#49화 비난은 리즈 몫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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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황후 책봉이 물 건너가고 대공비마저 무산되자, 사교계를 장악하겠다는 베리움 부인의 꿈도 산산조각이 났다.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자신을 깔볼 귀부인들을 생각하니, 베리움 부인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공이 몹시 부드럽게 파혼을 말했으므로 어머니는 그에겐 유감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클레르, 조만간 한적한 영지에 내려가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라오. 당연히 사교계와도 멀어지겠지. 한창 젊은 당신 딸에게 그런 노부인의 삶을 강요할 순 없지 않겠소? 그건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지. 당신은 어질고 현명한 여인이니 내 이런 마음을 헤아려 줄 것이라 믿소.’

비난은 오롯이 리즈에게 돌아갔다.

“내가 너 때문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 파혼이라니. 맞선 퇴짜도 부족해 파혼이라니!”

“…….”

“남들은 너보다 더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애 낳고 잘만 살던데, 너는 여태 뭐 했니? 그깟 남자 마음 하나 못 잡아서 이 망신을 당하냔 말이야. 왜 날 밖에도 못 나가게 만들어, 왜?!”

리즈가 어머니에게 굳이 반발하지 않은 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녀는 마침내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그에 대한 대가라 생각하니 어머니의 폭언도 나름 들어 줄 만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찾아서 들을 정도는 아니지만.

리즈는 되도록 아래층에 내려오지 않았다.

식사도 전부 방으로 올려 받았다.

산책은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 두고서 방 안을 걷는 것으로 대신했다.

모두 어머니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파혼이 결정된 이후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찾아오는 귀부인들이 몇 있긴 했지만 편찮다는 말로 모두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건 핑계이면서 사실이기도 했다.

술병이 나셨으니까.

특별한 날을 제외하곤 와인 한 잔도 안 마시던 그녀였건만, 이젠 럼을 물처럼 마셔 댔다.

“많이 상심하셨나 보네.”

모니카로부터 어머니의 상태를 전해 들은 리즈는 조금 걱정이 들었다.

릴리아라도 곁에 있으면 어머니의 폭주를 말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릴리아의 지금 상태로는 그걸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자신이라도 내려가 봐야 하나 싶었지만, 어쩐지 어머니의 화를 돋우는 일만 될 것 같아 관두었다. 아니…… 사실, 막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유독 참을 수 없는 말이 있었다.

‘내가 어쩌다 저런 걸 낳아 가지고.’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생각했는데 제게 아직도 통증을 느낄 만한 감각이 있다는 것이 리즈는 신기했다. 신기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햇살이 바닥에 드리운 창 그림자를 밟으며 모서리에서 모서리로 나아가는 리즈의 발걸음이 느릿했다.

봄이 오려는지 바람엔 온기가 감돌았지만 제 마음은 여전히 시렸다.

제게만 겨울이 영원할 것 같았다.

‘날 믿고 기다려.’

역시 그 말은 그녀와 대공의 혼사를 해결해 주겠다는 뜻 외에 달리 없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물 만난 물고기처럼 복위하자마자 결혼이라니.

“그간 그러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대?”

그의 소식은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세간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으로 떠들썩했고, 그 세간엔 제집 시중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리즈는 제 방에 가만히 앉아서도 그와 그의 어여쁜 약혼녀 후보들에 대한 이야기를 원 없이 들을 수 있었다.

“아가씨, 드디어 정해졌다나 봐요. 황태자 전하의 혼인 상대요.”

꽃꽂이를 하는 도중 나이 어린 시중인이 눈을 반짝이며 방금 들은 소식을 전해 왔다.

리즈는 갑자기 어머니를 만날 용기가 생겼다!

‘내가 어쩌다 저런 걸 낳아 가지고.’

차라리 그런 막말을 듣는 편이 그 남자의 결혼 소식으로 정신을 어지럽히는 쪽보단 나을 듯싶었다.

***

할 수 있는 걸 다한 릴리아에게 남은 건 깊은 회한뿐이었다.

그녀는 케인의 행방을 알 만한 곳을 수소문했고, 직접 그린 그의 몽타주를 들고 탐정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렇게 못 찾을 수도 있는 건가?

탐정도 그 점이 신기하다고 했다.

저가 못 찾았던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었는데, 자신이 가진 인맥을 다 활용해서 샅샅이 뒤져 보아도 케인 트라비스란 남자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릴리아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항상 상실감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왔지만, 케인으로 인한 상실감은 조금 달랐다.

후회가 진하게 남았다.

조금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었나?

그럼 뭔가 달랐으려나?

너무 조심스러웠던 제 행동이 되레 그를 놓치게 한 게 아닐까?

모든 게 다 제 탓이라는 자책감은 상실감보다 더 괴로웠다.

하지만 어떻게든 견뎌 내야 했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레이스 커튼을 뚫고 비쳐 든 햇살 한 줄기가 바닥의 융단에 물결무늬를 또렷이 그려 놓은 어느 날 아침,

순서를 다투던 대관식과 국혼식이 결국 대관식을 먼저 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는 별 관심도 없는 소식을 들으며 릴리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관식이든 국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아무거나 먼저 열리라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릴리아는 다시 사교계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관심을 사는 건 너무 쉬웠다.

그들이 원하는 말을 들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남자들의 관심을 사는 건 특히 더 쉬웠다.

저를 예측하지 못하도록 하면 되었다. 예측은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긴장감이 떨어지면 열의도 떨어지니까.

릴리아는 그들에게 호감을 품은 듯 상냥하게 대하다가도 불현듯 거리를 벌리며 서먹서먹하게 굴었다. 어떤 날은 서한에 곧바로 답장을 해 주었고, 또 어떤 날은 다섯 번이나 편지를 보내도록 답장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의 이 같은 변덕스러운 태도에 타들어 가는 남자들의 애간장만큼 그녀 방에 쌓여 가는 구혼장과 선물은 늘어만 갔다.

탁자 위를 가득 채운 추종자들의 선물 꾸러미와 연서는 잠시나마 그녀의 허한 마음을 달래 주었다.

하지만 이내 그걸로도 채워지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금세 찾았다.

‘케인이 떠난 건 다 언니 때문이야. 언니가 케인을 못살게 굴어서 떠난 거라고.’

어머니가 자신이 이렇게 망가진 건 다 리즈 탓이라며, 리즈가 대공에게 목석처럼 뻣뻣하게 굴어서 그런 거라며 억지 부릴 때마다 릴리아는 은근슬쩍 그 의견에 동의했다.

“언니가 좀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죠.”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억지 부리는 거 아니지?”

“네. 어머니 틀린 말씀 하신 거 전혀 없으세요.”

어머니는 자신이 옳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고서 릴리아에게 애정을 담아 말했다.

“내가 너만은 반드시 좋은 짝하고 엮어 주마.”

“전 괜찮아요. 하지만 언니께서 먼저 결혼하셔야 할 텐데요.”

“걔? 걔는 이제 결혼하기 틀렸어. 어디 재취 자리나 있다면 또 모를까.”

릴리아는 이제 어머니가 언니 욕을 하면 마음이 시원해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친딸을 밀어낸 수양딸.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통념을 자신이 깨뜨렸다. 그 사실이 묘한 자부심으로 다가왔고, 이제 그 자부심만이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 버렸다.

릴리아는 이제 언니 앞에서 눈을 흘기고, 입매를 비틀고, 빈정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케인이 없으니 잘 보일 사람도 없다. 시중인들이야 잠깐 의아해하긴 하겠지만 나중에 따로 만나 잘해 주면 금세 나쁜 인상을 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언니의 잘못으로 인한 자업자득이다. 언니가 케인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에 케인이 집을 떠나서…….

난 언니와 잘 지내고 싶었는데.

***

황량하던 잔디에 새싹이 돋기 시작한 어느 따사로운 봄날.

베리움 부인은 다시 사교계에 나가고 싶어 몸이 들썩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상태로 나가 봤자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

큰딸은 희망이 없다. 아니, 이제 자신에게 큰딸이란 존재는 없다.

베리움 부인은 자신의 유일한 딸, 릴리아에게 희망을 걸기 시작했다.

“릴리아, 젊음은 한순간이란다. 그러니, 더 미루지 말고 얼른 혼사를 정하자꾸나. 더 미루면 네 언니 꼴 난단다.”

릴리아는 거부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무나 조건 맞는 사람하고 결혼하자고 진작부터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야말로 자신이 비웃던 언니와 같은 행보였다.

하지만 언니와 자신은 다르다. 언니는 결혼에 안달이 나서였지만 자신은 이제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서다. 누굴 사랑할 수 없는데 아무하고나 결혼한들 무슨 상관일까.

베르트 소공작에게 넌지시 서한이나 보내 볼까?

그나마 그가 제일 괜찮았으니.

요전 날 일은 당신이 오해한 거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불어 주려 얼굴을 가까이한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고 말하면 믿어 주려나?

의외로 무른 구석이 있는 남자니 그럴지도.

릴리아는 케인에게 키스를 시도한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쓸쓸히 돌아서는 것으로 관계를 흐지부지 끝내 버린 베르트 소공작의 소심한 모습을 떠올리며 기대를 품어 보았다.

딸랑딸랑-.

근처를 지나고 있던 시중인 레나가 종소리를 듣고 릴리아의 방으로 달려왔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아가씨?”

“응. 집사에게 편지지와 편지 봉투 좀 받아다 줄래? 베르트 소공작께 보낼 거니 특별히 좋은 것으로 부탁해.”

“……네, 아가씨.”

‘전에는 이런 것도 직접 하시더니 이젠 자연스레 시키시네.’

레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방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모니카가 뛰어들어 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난입에 놀란 릴리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게…… 그게 말이죠, 지금 리즈 아가씨…… 리즈 아가씨께…….”

숨을 헐떡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모니카의 태도는 릴리아의 신경을 더욱 긁었다.

“좀 진정하고 제대로 얘기할 수 없니? 언니가 뭐?”

“구혼장이 들어왔습니다.”

잠깐 어리둥절하던 릴리아가 픽 웃음 지었다.

“난 또…….”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네.

하긴, 오랜만에 구혼장이 들어오니 다들 놀랄 만도 하겠지.

“누구한테서?”

얼마나 하찮은 놈일까?

“황태자 전하요.”

“…….”

릴리아의 얼굴에 웃음이 걷혔다.

에메랄드빛 동공이 혼란으로 일렁이던 찰나,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젠 황제 폐하시죠.”

미라벨이었다. 문짝에 기대선 그녀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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