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황태자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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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황태자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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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황태자의 귀환
2023.07.18.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겠다는 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몬타네르 대공이 제 속내를 감쪽같이 감추며 말을 이었다.
“하나 베르트 공작께서 말씀하셨듯이, 연이은 가뭄이 빚어낸 흉작과 신흥국의 도발로 어수선한 이 시국에 흉흉해진 민심을 통합할 수 있는 길은 하루라도 빨리 황좌의 주인이 나타나는 것 외엔 달리 없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제대로 된 주인 없이 집사만 있는 집은 아무래도 조금 우스워 보이지 않겠습니까?”
“…….”
“하여 돌아가신 선황 폐하와 그의 후계자이신 황태자 전하께 불충스럽게도 이 같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중한 호소를 담아 의사를 피력한 뒤, 대공이 덧붙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그게 언제든, 자리를 돌려 드릴 것입니다.”
좌중이 술렁였다.
“그…… 그건 안될 말씀입니다. 루젠시아 황실법상 황위는 한 번 오르면 승하하시기 전까진 물러나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예외야 만들면 되지요.”
대공의 입꼬리에 찰나 웃음이 맺혔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뒤이어 베르트 공작이 말했다.
“우선은 즉위식을 앞당기는 건부터 해결을 하는 게 순서일 것 같소만. 황태자 전하께 황위를 양도하는 일은 그분께서 귀환하시고 나서 생각해 보아도 될 테니 말입니다.”
하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저들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죽은 이가 무슨 수로 황위를 돌려받으러 나타난담?
“그럼 즉위를 앞당기는 건에 찬성하시는 분은…….”
“이건 거수 표결이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의장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말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대공 전하께서 하루빨리 황위에 오르길 바라지 않는 자는 없을 테니 말이죠.”
“맞습니다. 저는 오늘 당장 즉위식을 거행한대도 찬성할 것입니다. 황좌는 너무 오래 비어 있었어요. 격식을 간소화할 거라면 더는 시기를 늦출 필요가 없지요.”
다들 격하게 찬성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공의 즉위가 그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황태자가 살아 있다면 아무리 도움이 된다 한들 이 사생아 대공을 황제로 추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황위는 반드시 직계 황족이 이어받아야 했다. 꼭두각시로 앉히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그것이 평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대귀족 원로들의 뿌리 깊은 신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신념은 갈 곳을 잃었으니 실리를 추구할 일만 남았다.
대공을 황제로 올려야 한다. 그래야 지금처럼 안락한 삶과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영광을 보장받을 수 있을 테니.
“전하,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거수를 진행할까요?”
의장이 물었다.
질문하는 자체가 이 거수 표결은 무의미하다는 그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공은 흔들림 없이 고집했다.
“당연히 해야지요. 안건은 안건이니. 대신.”
“…….”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겠소.”
대신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전하, 굳이 그럴 것까진…… 그냥 다수결로 하셔도.”
“즉위식의 일정을 앞당기는 건 중대사지요. 한 사람의 반대라도 있으면 당연히 철회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다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당혹감을 공유하는 한편, 내심 대공의 올곧음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대공도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 거수로 결정하겠소.”
의장 르메르 공작이 딱딱한 태도로 진행을 이어 갔다.
“즉위식을 빠른 시일 내로 앞당기는데 찬성하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데도 묘하게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담담하던 르메르 공작마저도 긴장했는지 좌중을 둘러보는 그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휴우-.
그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나무망치를 집어 들었다.
“만장일치로 이 안건은…….”
“난 반대요.”
갑작스레 들려온 굵직한 저음에 모두의 시선이 회의장 입구로 향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문가에 기대서 있었다.
테이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찬찬히 훑는 건방진 눈길은 그가 신원 미상이라는 점과 함께 이 오만한 대귀족 평의회 의원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했다.
“당신 누구요?”
누군가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여긴 평의원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으니 당장 나가시오.”
또 다른 누군가가 문밖의 근위대를 외쳐 불렀으나 어찌 된 일인지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의아해하고 있는 그들에게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알기론 의원 말고도 평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는 걸로 아는데.”
대귀족들이 황당한 눈으로 남자를 살폈다.
생긴 건 멀쩡해 보이는데 실성이라도 한 건가?
아니면 대낮부터 술이라도 처먹었나?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
“지금 본인이 직계 황족이라도 된다는 건가? 그럼 그 말이 사실이 아닐 시 황실 모독 발언에 해당된다는 것도 알겠군.”
겁을 주고자 한 말이었으나 되레 남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남자가 문가에 기대어 있던 몸을 곧추세웠다.
“내가 내 신분을 말하는데 어째서 황실 모독 발언이 되는지 모르겠군.”
단단히 미쳤군. 미쳤어. 당장 끌어내지 않으면…….
다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누구 하나 근위대를 외쳐 부르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그 말을 증명할 수 있소?”
그나마 베르트 공작이 입을 열었지만…… 그마저도 떨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황금색 눈동자.
이삼 년 전이었나. 자신이 기억 잃은 황태자라 말하며 찾아온 남자도 흑발에 금안이었다.
기억하고 있던 황태자의 외모보다 못했지만,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었을 가능성을 감안하면 딱 잘라 부정할 수는 없는 얼굴이었다.
그 남자는 그렇게 황궁에 받아들여졌고, 닷새간 호의호식했으며, 그런 다음 늑대 밥으로 던져졌다.
친자인지 아닌지 알아낼 방법이 있다는 걸 몰랐던 자의 최후였다.
이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디선가 황태자가 저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만 듣고서 찾아온 사기꾼 나부랭이일 게 분명했다.
분명한데…… 어째서 이렇게 살이 떨릴 만치 서늘한 기분이 드는지 베르트 공작은 알 수 없었다.
“증명?”
흑발의 남자가 한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마치 그 단어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되묻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아, 친자 검사? 그래, 그럼. 그거 피로 하는 거였나?”
베르트 공작이 숨을 들이켰다.
친자 검사는 출신을 의심받는 황족이나 대귀족 서자들만을 대상으로 은밀하게 치러졌으므로 하급 귀족이나 평민 계층은 그런 게 있다는 것도 잘 알지 못했다.
특히나 죽은 이의 유골에 피를 뿌려 나타나는 반응으로 친자임을 판별하는 적골법은 대귀족 중에서도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걸 어떻게 이자가…….
“뽑는 김에 넉넉히 뽑아. 남는 건 그대들 마시고. 겨울이라 철분도 부족할 테니.”
키득거리며 내뱉는 농담에 사람들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남자가 미친놈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 그런데도 묘하게 머리가 조아려지는 데가 있었다.
“그런데 말이지. 솔직히 난 별로 권하고 싶지 않군.”
남자의 얼굴에서 일순 웃음기가 걷혔다.
“피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증명 작업이 필요 없을 거 같거든.”
“…….”
“그렇지 않나요? 숙부님?”
남자가 상석을 직시했다. 몬타네르 대공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건 폭풍전야와 같은 잔잔함에 가까웠다.
그런 숙부에게서 기어이 분노를 끌어내려는 듯 남자가 해사한 웃음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혹시 숙부도 날 못 알아보는 겁니까?”
“…….”
“나예요, 헤르.”
***
제국이 술렁였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황태자가 돌아왔다.
한바탕 피바람이라도 불 거라 생각했던 제국민들의 예상과는 달리 황실은 의외로 담담한 행보를 이어 갔다.
그들의 수장이 얌전히 물러났기 때문이다.
대공은 황위에 일말의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물러남으로써 분쟁의 요소를 차단했다.
오히려 그는 감격에 찬 얼굴로 조카와 진한 포옹까지 나눴다.
“전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이제야 제가 선황 폐하 내외분을 죽어서 뵐 낯이 생겼습니다.”
그는 이 보 전진을 위해 일 보 후퇴할 줄 아는 남자였다. 돌아온 조카의 모습은 제 상상 속의 모습과 꼭 맞아떨어졌고, 그러므로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차라리 지금 그에게 얌전히 자리를 내어 주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자신의 품위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다가올 더 좋은 기회를 노리는 방법일 터였다.
기회는 반드시 또 찾아온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수장인 그가 이렇게 나오는데 대신들이 친자 검사 왈가왈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리고 이제 황제가 될 사람을 걸고넘어져서 딱히 좋을 게 없었다.
복종해야 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말로만 복종하는 게 아니라 그럴싸한 선물을 함께 바치면 좋을 것이란 결론도 빠르게 도출해 냈다.
그들은 제 딸, 제 손녀를 예쁘게 꾸며 헤르시스의 앞에 선보였다.
대공과 결혼하라 할 땐 주저하던 딸들도 이쪽엔 순순히 응했다.
헤르시스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 황제답게 그들 모두를 황후감 후보로서 신중히 대했고, 거기엔 진정성이 조금도 결여되어 있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즉위식과 국혼식이 동시에 치러질 거란 소문이 제국 전역에 파다하게 일었다.
아니, 국혼식이 먼저 치러질 거란 소문도 있었다.
원예업으로 유명한 남부 영지에서 매일같이 꽃들이 수송되어 왔고, 수도 내 이름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와 보석 장인들도 줄을 이어 황실을 방문했다.
소문을 전하는 사람마다 다른 영애를 지목하긴 했지만, 국혼이 치러질 거란 소문 자체는 견고했다.
그렇게, 신빙성이 더해진 소문이 거의 기정사실화되는 듯하던 어느 날…….
“내가 못 살아!”
외출에서 돌아온 베리움 부인이 씩씩대며 가방을 집어 던졌다.
리즈는 제 정강이를 맞고 떨어진 손가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대공 전하께서 파혼을 통보했어. 너랑 결혼 안 하신단다.”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주워 건네는 딸을 향해 부인이 씹어 삼키듯 덧붙였다.
“제발 좀…….”
“…….”
“내 눈앞에서 사라져. 이 쓸모없는 것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