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떠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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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떠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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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떠났어
2023.07.16.
어둠이 진득하게 내려앉은 거리.
이제 막 출발한 마차를 향해 대공이 손을 흔들었다.
아쉬움에 가득 찬 클레르 부인은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대공의 인사에 손 키스로 화답했다.
대공의 얼굴엔 온화하고도 다정한 미소가 가득했다. 마차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만.
땅거미가 짙게 깔린 거리와 점점 작아지는 마차 바퀴 소리만이 남게 되자 대공의 표정이 싸늘히 굳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매로 마차가 사라진 어둠을 응시했다.
마차와 함께 사라진 여인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했다.
‘화, 황후요? 제가…… 황후요?’
‘…….’
‘대공비가 되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다 생각했는데 황후라니……. 제가 황후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아니, 아닙니다. 잘해야죠. 반드시 잘해 내겠습니다. 전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노력할게요.’
내 눈을 똑바로 보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특히나 계집은 더 없었는데.
리즈 베리움.
정말 아무것도 아닌 멍청한 계집일 뿐이었던가.
나, 다미엥 몬타네르가 고작 그런 멍청한 계집에게 청혼을 하려고 여태껏 그 많은 여인들을 마다했던가.
그래. 클레르, 그 여자의 딸이라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어.
젊을 적부터 허영심 많고 머릿속이 텅 빈 여자였잖아.
그 남편도 방랑길에 생각 없이 몸을 굴리다 죽었으니, 그 둘 사이의 핏줄이 어디 가려고.
“하핫!”
대공이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감이 예전 같지 않은 모양이다.
저런 멍청한 계집을 헤르의 여자라 생각하다니.
만약 그렇다면 헤르는 죽일 가치도 없을 정도로 망가진 게지.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조하더니 허공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아론.”
그러자 어둠 속에서 그의 수행원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어제오늘 베리움 영애의 행적이 어떻게 되지?”
“행적이랄 것도 없이 집 밖에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그 동생분의 구애자들이었고요.”
“그렇군.”
대공이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하자 수행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예 집 안에 첩자를 심어 놓을까요?”
“아니, 그럴 것 없다. 현 상태를 유지하도록.”
“예, 전하.”
“그리고 아스펠리드 백작 영애와 플로랑 준남작 영애의 주위에 몇 사람 더 붙여.”
그쪽은 감이 잘 와닿지 않긴 하지만, 이제 더는 감에 의존하지 말아야지.
내겐 직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사건이 미궁으로 빠질수록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 단 1할의 가능성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그게 몬타네르 대공의 방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리즈에 대한 감시도 거둘 수가 없다.
조카가 총기를 잃고 타락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 상상이 그를 즐겁게 한 듯, 굳어진 미간이 매끈하게 펴졌다.
***
“아까 대공 전하와 꽤 오래 같이 있던데, 무슨 얘기 나눴니?”
취기가 가셨는지 어머니는 다시금 딸의 혼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릴리아도 눈을 반짝였다.
“그냥, 초상화 봤어요.”
“초상화?”
“역대 황제 폐하들의 초상화요.”
어머니와 릴리아의 반응은 리즈가 당시에 했던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머, 널 황실의 차기 안주인으로 확고하게 정해 놓으셨나 보다. 벌써부터 황후 수업하시려는 거 보면 말이다.”
“언니, 축하해요. 정말 잘됐어요.”
리즈는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런 걸 하기엔 너무 피곤했다.
몬타네르 대공에게 너무 많은 기를 빼앗겼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만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릴리아는 리즈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럼 이제 초대장을 돌리는 일만 남았구나. 누굴 초대하면 좋을까?”
“다른 분은 몰라도 에스몽드 공작부인은 꼭 초대하셔야 해요. 어머니가 황실 외척이 된 모습을 보며 가장 배 아파하실 분이 그분이니까요.”
“아…… 그렇지? 역시 릴리아 너는 정말이지 깜찍한 데가 있다니까.”
어머니가 릴리아를 이뻐 죽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볼을 살짝 꼬집었다. 릴리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으로 말하자면, 책에선 이렇게 표현되어 있었다.
「구슬이 굴러가듯 청명하고 맑은 웃음소리」
하지만 책이 잘못된 건지 리즈의 귀가 썩었는지, 그렇게 듣기 싫은 웃음소리는 처음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리즈? 내가 누굴 초대하면 좋겠니? 응?”
“아무나요.”
리즈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베리움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뭐라고 말했지만, 때마침 들린 덜컹하는 마차 바퀴 소리에 묻혀 버렸다.
리즈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차에 달린 등불이 아니었다면 표지판 하나 식별하기도 어려울 만큼 새카만 어둠 속이었다.
도로가 잘 닦여 있고, 곳곳마다 가로등이 환하게 길을 밝혀 주었던 전생에선 생각도 할 수 없는 암흑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좋은 점도 있었다.
하늘에 별이 모래알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그 어떤 기술자가 만든 조명도 저것보다 더 아름다울 것 같지 않았다.
리즈는 번갈아 반짝이는 별을 가만히 응시하며 대공과의 독대를 상기했다.
그의 위압감에 짓눌려 입을 열었을 때만 해도 진실을 실토할 뻔했다.
그 상황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 오히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공비가 되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다 생각했는데 황후라니……. 제가 황후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제대로 거짓말을 하려면 자기 자신조차도 속여야 한다는 걸 리즈는 알았다.
상대가 몬타네르 대공이란 사실을 배제한다면 그 연기는 그런대로 할 만했다.
내가 황후가 된다니. 이 우물 안 개구리에 사교계의 낙오자가 황후라니.
이런 기가 막힌 일이 또 있을까.
그런대로 설득력 있는 연기였는지, 대공의 눈에 잔뜩 모여 있던 예리한 빛이 서서히 흩어졌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도 이 혼사의 필요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을 테다.
집 밖에도 잘 나가지 않고, 그렇다고 누가 찾아오지도 않는 데다, 젊고 잘생긴 남자 얼굴에 혹해 있기나 하고, 꼴에 황후는 또 꿈꾸고 있으니. 조카의 연인이 아닐뿐더러 제 타입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럼 이제 가만히 앉아서 파혼 통보가 오길 기다리면 되는 건가.
“릴리아, 결혼식 드레스는 무슨 색으로 했지?”
“전 연한 물색이요. 양재사의 추천에 따랐어요. 양재사의 안목이 가장 정확할 테니까요.”
“그렇구나.”
상념에 잠겨 있던 리즈의 의식이 닮은꼴 모녀의 대화에 현실로 돌아왔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듣기 싫던 대화 주제가,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들어 줄 만했다.
“어머닌 무슨 색 하셨어요?”
“난 붉은색으로 했단다. 너처럼 양재사가 그리 추천해 주더구나.”
“붉은색이요? 어머닌 흰색이 잘 어울리시는데.”
“나도 그러고 싶다만, 흰색은 신부의 색이니까……. 요즘도 그런 구시대적인 의복 코드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안타깝다만…….”
진심으로 안타까운 심정이 흐려지는 말끝에 노골적으로 배어났다.
“하지만 제가 듣기론 흰색도 다 같은 흰색이 아니라서, 살짝 아이보리 톤에 가깝게 하고 소재를 웨딩드레스와 겹치게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들은 거 같아요.”
“그게 정말이니? 그렇다면 뭐…….”
릴리아의 아첨에 희망을 얻은 베리움 부인이 슬그머니 리즈를 돌아보았다.
리즈는 어머니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었다.
“원하시는 색상으로 하세요.”
어차피 하지도 못할 결혼식이므로.
“정말, 그래도 되니?”
“네.”
“고맙다, 내 딸.”
어머니의 달뜬 목소리를 끝으로 리즈는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헐벗은 자작나무는 달빛에 창백하게 반사되고, 마차가 그들을 지나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마차 뒤편으로 줄지어 달려가는 것 같았다.
후우-.
한숨을 내뱉으니 차가운 공기에 입김이 연기처럼 하얗게 일어났다.
고요한 밤이었다.
마차가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꺾었다. 리즈의 보랏빛 눈은 반대편 길을 담았다. 황궁으로 향하는 마로니에 가로수길이었다.
케인과 함께 갔다가 황태자와 키스를 나눈 곳이었다.
케인. 그리고 헤…… 뭐더라? 아무튼 황태자.
여전히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잘 믿기지 않는다.
너무 다른 외모. 너무 달랐던 성격.
언젠간 자연스레 받아들일 날이 올까?
리즈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잖아? 조만간 영원히 작별할 텐데.
‘그러니까 이 얼굴 잘 봐 두라고. 조만간 영원히 못 보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가슴 저릿한 느낌이 순간 되살아났다.
‘혹시…… 나 때문에 황궁으로 돌아가려는 걸까? 내 결혼을 막기 위해?’
불쑥 떠오른 생각에 리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내가 뭐라고.’
그는 다만 자신의 원래 계획을 따랐을 뿐이고, 제 파혼은 거기서 파생된 부산물일 뿐이다.
그럴 것이다. 분명히.
리즈는 그렇게 제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의혹을 싹둑 잘라 냈다. 그편이 괜한 기대로 상처받는 것보다 낫다는 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차창 밖으로 후작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져 가는 집을 바라보며 리즈는 대공저에서 있었던 일을 케인에게 들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래를 청할 생각이었다.
‘제가 그 무시무시한 몬타네르 대공의 압박을 견디고 전하의 비밀을 끝까지 지켰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내 지나간 흑역사 말하지 마! 좀!
마차 바퀴가 마른 나뭇가지를 우지끈 밟고 달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마차가 조금 더 빨리 달려 주었으면 싶기도 했다.
***
“마님…… 이거.”
현관 앞에서 어머니의 외투를 받아 든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서한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어머니는 서한을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아름다운 미간에 살짝 주름이 갈 뿐,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새 사람 뽑아.”
처소로 돌아가기 전 어머니가 집사에게 남긴 건 그 말이 다였다. 아, 그리고 편지도.
‘새 사람?’
리즈가 의아해하며 집사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았다.
“무슨 일이에요?”
편지를 확인한 리즈의 눈이 크게 떠지는 것을 본 릴리아가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하지만 리즈가 대답을 할 수 있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 떠났어.”
“누가요?”
“케인.”
툭-.
릴리아가 손가방을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