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최후의 관문
(45/65)
45화 최후의 관문
(45/65)
#45화 최후의 관문
2023.07.15.
“별로 볼 게 없지요?”
중앙 계단으로 이어지는 대리석 복도를 걸으며 대공이 말했다.
막 1층과 2층 관람을 마친 상태였고, 여태까진…… 그의 말대로 볼만한 게 없었다.
리즈가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대공이 말을 이었다.
“집에 오는 지인들마다 한소리 한답니다. 빈방에 가구라도 좀 채워 넣으라고.”
“네…….”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잘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비어 있으면 안주인이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꾸미기도 더 편할 테니까요.”
“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아리스테 양.”
“네…… 네?”
반사적으로 대답을 이어 가던 리즈는 제 대답의 무게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우뚝 멈춰 서서 옆을 돌아보니 방긋 미소 짓고 있는 중년 남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리즈는 그가 어디까지 갈 건지 궁금했다.
혹시 이 남자, 황태자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결혼을 강행할 생각인 걸까?
몸에 밴 여유 때문인지 그렇게 보이고도 남았다.
‘아…… 진짜, 그럼 안 되는데?’
리즈는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볼 것도 다 본 것 같으니.
“저…… 이만 돌아가는 게…….”
“잠깐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꼭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대공이 리즈의 말을 잘랐다.
리즈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그가 뭘 보여 주고자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쩌면 기억나지 않는 원작의 나머지 부분을 떠올리는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리즈가 무언의 긍정을 내비치니 그가 발길을 옮겼다. 그 팔에 팔짱이 끼인 탓에 리즈는 반강제적으로 이끌려 갔다.
그는 약간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더 어두컴컴한 복도로 이끌었다. 리즈는 어둠의 농도가 짙어질 때마다 불안해졌다.
‘설마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대공이 혈기 왕성한 젊은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이에 걸맞게 어느 정도는 욕구를 통제할 수 있을 테니.
과연 그 통제력 덕분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생각이 없었는지 대공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단지, 리즈를 어느 방으로 안내했을 뿐이었다.
그 방은 지금까지의 어둠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맸다.
“잠시만 여기 계십시오. 제가 곧 등불을 켜 드리리다.”
대공은 팔에서 리즈의 손을 살짝 떼어 낸 뒤 멀어졌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치익’ 하고 뭔가를 긋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즈가 돌아보니 성냥 불빛이 붉게 비친 대공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기름 등에 불을 붙이자 방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자 그제야 보이는 게 있었다.
방의 세 벽면을 따라 늘어선 초상화 액자들.
검은 제복에 가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붉은 띠, 그리고 황금빛 태양 문장을 가슴에 달고 있는 이들은 아마도…… 그들일 테다.
“역대 선황 폐하들의 초상화입니다.”
대공이 리즈의 짐작을 확인시켜 주었다.
“섭정이 되고 나서 선조들이 이루신 업적을 잊지 말고자 다짐하며 이 초상화실을 만들었답니다.”
‘그러면서 가장 마지막에 자기 초상화도 걸어 놓고 싶었겠지.’
리즈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이분이 루젠시아 제국의 전신 루젠시아 왕국을 건설하신 칼리크 1세.”
대공이 가장 왼편에 걸린 초상화부터 차례로 설명해 주었다.
“이분은 발데미온 왕국을 합병하여 대제국 건설이라는 과업을 이룩하신 아르센 폐하.”
“네…….”
“여기 계신 분은 재위 기간이 가장 기셨던 분으로…….”
리즈는 그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 사람이 진짜 나를 황실 안주인으로 들이려는 건가? 그래서 벌써부터 황후 수업을 시키려 드는 건가?’
안 그래도 하기 싫었는데 더 하기 싫어졌다.
그래도 리즈의 흥미를 끄는 사람이 한 사람 정도는 있었다.
“이분은 시대의 흐름에 발 빠르게 대응하여 제2의 황금기를 이룩하신 밀로스 대제로,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아…….”
리즈의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초상화 속 백발의 적보랏빛 눈을 지닌 남자에게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초상화는 인생의 황금기를 남겨 두고자 그리는 게 보통인데, 이 황제만이 인생의 황혼기를 그림 속에 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젊은이들 못지않은 힘과 기백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래서 예순이 넘은 나이에 서자를 두셨겠지.
리즈는 티 나지 않게 살짝 눈을 굴려 대공과 초상화 속 황제를 비교해 보았다.
‘닮긴 닮았네.’
외모를 비롯하여 날카로운 눈매, 의뭉스러운 입매, 그리고 속에 칼날을 숨기고 사는 사람 특유의 가식적인 미소까지 모든 게.
“마지막으로 제 형님이신, 율리안 선황 폐하이십니다.”
몬타네르 대공이 마지막 초상화로 리즈를 이끌었다.
리즈는 불빛에 드러난 그 얼굴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흐읍-!
저도 모르게 들이켠 숨이 날숨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이…… 이 남자…….”
황태자잖아?
***
‘뭐야. 아버지를 쏙 빼닮은 얼굴이었네!’
하마터면 그리 생각할 뻔했다. 요전 날의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선황 폐하 내외분의 초상화를 보고 알았어요. 전하의 본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서.’
‘두 분 중 어느 쪽?’
‘……어머니요.’
‘그렇군.’
그날, 황태자는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갔다. 거짓으로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으니.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수법이구나!’
제가 이 얼굴을 알아보는지 못 알아보는지 확인하기 위한 수법.
하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대공은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놀라시죠?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걱정이 담긴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리즈는 알았다. 이건 명백히 자신을 추궁하는 말이었다. 조금 전 자신의 얼굴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동요의 근원에 대해.
“아, 아뇨. 저는 다만…….”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해서 거짓말까지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잘생기셔서요. 선황 폐하께선 굉장한 미남이셨군요. 놀랐어요.”
이래 봬도 인생 2회차.
그럴싸하게 둘러댈 정도의 내공은 갖추고 있었다.
리즈는 눈을 반짝이며 졸라 대듯 물었다.
“분명 인기도 많으셨겠죠? 당연하죠. 이 정도의 외모를 갖추신 분은 이 제국이 아니라 대륙 내에서도 몇 없을 테니까요.”
대공은 좀 전보다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성의 있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형님께선 몹시 인기가 많으셨죠. 내로라하는 귀족 영애들은 물론이고, 타 왕국의 공주들까지도 전부 형님과 못 이어져서 안달이셨죠. 아직도 그 여인들이 황궁 앞마당에 줄을 서던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그렇군요.”
“황태자 전하께서 살아 계신다면 아마도 꼭 이렇게 성장하셨을 텐데…….”
대공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리즈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 표정 변화를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뚫어지게 응시했지만, 눈에 들어온 건 초상화 속 미남에 넋을 놓고 있는 계집의 멍청한 일면뿐이었다.
실제로 리즈는 넋을 놓을 정도로 감탄하긴 했지만, 그건 초상화 속 인물이 아니라 그 숙부에 대한 감탄이었다.
‘무서운 사람이네. 어떻게 십 년도 전의 모습에서 지금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걸까? 그것도 완전 정확하게.’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만 돌아갈까요? 리즈가 말하려던 찰나 대공이 느닷없이 물어 왔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영애께선 마음에 두신 분은 없으십니까?”
리즈는 몹시 놀라긴 했지만, 대답에 뜸을 들이진 않았다.
“네, 없어요.”
진실이 그러했으므로.
“그런데 그건 왜 물으세요?”
“아…… 혹시나 해서요.”
“……혹시나요?”
“예, 제가 청혼했을 때 조금 난감해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혹시나 마음에 두신 분이 있으셨던 건 아닌가……. 그럼 두말 않고 물러날 생각이었답니다.”
그러시겠지. 마음에 둔 사람이 황태자가 아니라면.
리즈는 속으로 조소했지만, 표정에 드러내진 않았다.
“그러시군요. 그럼 다시 한번 확실히 말씀드려야겠네요.”
물러난다는 말에 살짝 갈등이 일긴 했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없습니다. 아무도.”
리즈는 더없이 확고하게 말했다.
대공은 잠시 의아해졌다. 거짓말이라기엔 리즈의 표정이 너무 단호했다.
‘뭐지? 아닌가?’
그가 자신의 확신에 이토록 의심을 품는 일은 잘 없었다.
몇 해 전 숲에서 반쯤 타다 만 시체를 발견했을 때, 외양으로 보아 다들 황태자일 거라 확신했지만 그는 부정했다. 오직 그만이 부정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시체는 정말 황태자가 아니라 산지기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랬던 자신의 감이 틀렸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듣기론 꽤 오랫동안 여러 영식들의 구애를 거절해 왔다고 들었는데요. 아…… 이건 우연히 전해 들은 겁니다. 아시다시피 안주인이 없는 관계로 제가 사교계의 여인들을 접대해야 할 일이 있는데, 거기서 들은 말이랍니다. 언짢으셨으면 죄송합니다.”
“언짢을 리가요. 대공 전하께선 예비 배우자에 대해 충분히 조사할 권리가 있으십니다.”
‘조사’라는 말에 대공이 살짝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꼭 자신이 여인의 뒤나 캐고 다니는 파렴치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제가 그들의 구애를 거절한 건…….”
케인 때문이었지.
“그땐 별로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정해진 시기에 짝을 맺고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개념이 당시의 제겐 없었어요. 철이 없었던 거죠. 하지만 이젠…….”
정신을 차렸고.
“저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전하의 청혼도 받아들인 거고요. 제게 너무 과분한 영광이지요.”
혹은 파멸로 향하는 지름길이거나.
“……그렇군요.”
이 방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확고했던 대공의 확신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예우를 다했다.
“조금 전에 과분한 영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
“베리움 후작가는 대공비에 오를 충분한 자격이 됩니다. 건국 공신 가문이지 않습니까? 초대 베리움 후작이 변경을 지켜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루젠시아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 그 공훈 하나로 여태껏 우려먹고 살고 있지.
냉소와 함께 슬그머니 안심이 되려는 찰나였다.
“아니죠, 대공비가 뭡니까? 하려면 황후를 하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대공의 적자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번뜩이는 것을 보며 리즈는 이것이 최후의 관문임을 깨달았다.
그의 확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빙의를 일깨운 리즈의 이마 흉터처럼 그저 옅어졌을 뿐.
‘그놈의 숙모가 되고 싶나? 응?’
깊게 가라앉은 눈빛의 그가 리즈의 심연에 대고 묻는 듯했다.
리즈는 입안이 바싹 말라 왔다. 손바닥에서 땀이 뭉근하게 배어나는 것 같았다.
모든 걸 술술 털어놓게 만드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였다.
본능적인 야망과 스스로 드높인 명예에 대한 자부심이 짙게 배어 있는 위압감은 평범한 여인이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었다.
긴장으로 달싹이던 리즈의 입술이 결연하게 다물리더니, 곧이어 천천히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