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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영원히 못 보게 될 얼굴 (44/65)


#44화 영원히 못 보게 될 얼굴
202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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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가 태도를 바꾸니 모니카의 감시도 거둬졌다.

하지만 미라벨이 다시 그녀의 사람이 되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에게 청혼을 거부하지 않는 조건으로 협상해 보기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릴리아 때문이었다.

“어떡하죠? 저 이제 막 미라벨과 친해지려는 참인데.”

릴리아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애원했다.

“미라벨은 정말 좋은 사람 같아요, 어머니. 배려심도 많고, 옷 고르는 센스도 출중하고. 왜 언니가 미라벨을 총애했는지 알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어머니, 제게서 미라벨을 빼앗아 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부탁드려요.”

어머니는 눈망울을 글썽이며 간곡히 청하는 릴리아에 굴복하고 말았다.

미라벨도 없고, 모니카는 정이 안 가고.

리즈는 정말 이 저택에서 혼자가 된 것 같았다. 다시금 전생의 외로운 고아 소녀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한때는 그래도 피를 나눈 가족이니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잘 모르겠다.

어머니와 릴리아 덕분에 자신이 대공비가 될 거란 소문은 삽시간에 파다하게 퍼졌으니 그 탓에 결혼도 거의 물 건너간 것 같았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려다 파혼당한 여인을 받아 줄 귀족 영식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나이 많은 홀아비의 재취 자리면 또 모를까.

“파혼만 당해 봐라. 당장에라도 여기를…….”

“여기를 뭐?”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란 리즈가 시선을 끌어올렸다.

두 걸음 앞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케인의 푸른 눈동자 한 쌍이 눈에 담겼다.

그가 고개를 한옆으로 기울이며 대답을 종용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속마음을 간파당하기 전에 리즈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어디 가세요?”

흑갈색 스웨이드 재킷을 요전 날처럼 팔을 끼우지 않고 걸친 그가 짧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목재상에 심부름.”

“아, 네. 수고가 많…….”

많으시네요…… 라는 말을 하려다 문득 생각났다.

‘여긴, 로비잖아?’

이제 막 교육을 끝낸 수습 시중인들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 발견한 리즈가 다소 과장되게 주인의 위엄을 내세웠다.

“수…… 수고가 많네. 케인.”

반말을 해 본 게 얼마 만이었던가.

혀가 남아도는 기분이었다.

인사를 하고 스쳐 가는 나이 어린 수습 시중인들이 영원히 제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하고 리즈는 바랐다…… 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께 반말이라니.

겨우 이걸로 죽이진 않겠지만, 나중에 방으로 찾아와 요모조모 따질 잘못 목록에 추가할 정도는 되겠지.

하지만 제 머리에 내려앉은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잘 어울리네.”

리즈가 고개를 들었다.

“존댓말보다 훨씬 편하게 들려.”

그는 팔짱을 꼈고, 재킷 소매는 여전히 아래로 늘어뜨려진 상태였다.

“우리 앞으론 계속 반말할까?”

“저…… 저는 존댓말이 편합니다.”

리즈가 주위를 살피며 불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케인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사람들 있을 땐 반말, 없을 땐 존댓말 이렇게 쓰면 헷갈리잖아.”

“사람들 있을 때도 존댓말, 없을 때도 존댓말 할 수 있을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충동적으로 전한 진심이었다.

“그거, 나 빨리 돌아가라는 말인가?”

의미를 알아들은 케인의 목소리가 조금 서늘하게 들렸다.

리즈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

예상치 못한 대답에 리즈는 어리둥절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영원히 눌러살 것처럼 굴던 그가 웬일이지? 리즈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떼고선 물었다.

“……언제요?”

일단은 그게 가장 중요했다. 왜 나가는지보단…….

“조만간.”

“조만간 언제요?”

그가 입매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비밀.”

“…….”

“그러니까…….”

케인이 한 발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선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몸을 숙였다.

“이 얼굴 지금 많이 봐 두란 말이야. 조만간 영원히 못 보게 될 얼굴이니까.”

어깨를 감싼 손과 시선의 열기가 아슬아슬한 시점까지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지만, 리즈는 그게 아슬아슬하다는 것도 몰랐다. 이 드넓은 저택에 단둘만 있는 듯 느껴졌으므로.

또 다른 시중인 무리가 거실에 들어섰을 때, 케인은 이미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두 걸음 물러선 뒤였다.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시중인의 태도로 리즈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린 뒤,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영원히 못 보게 될 얼굴…….’

그 말이 남긴 아련한 여운만이 리즈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몫으로.

***

‘아직도 내게 케인을 좋아하는 마음이 남은 건가?’

……라는 생각을 리즈가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다.

수많은 작별의 경험들, 그중에서 꽤 강렬한 서운함을 안겨 주었던 몇몇 기억들과 지금이 언뜻 닮아 있었다.

그보다 조금, 아주 조금 더 가슴이 알싸하긴 하지만,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함께 지냈으니 그 정도 서운한 건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리즈는 그렇게 결론짓고서 지난 며칠간 자신을 괴롭히던 상념에서 벗어났다.

모니카가 어머니의 전언을 알려 온 건 다시금 찾은 마음의 평온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잠깐 거실로 내려오시랍니다.”

리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미리 와 있던 릴리아가 방긋 미소 지으며 언니를 맞이했다. 하지만, 너무 짧았다. 고개를 돌린 순간 미소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어머니가 실크 크레프드신 실내복 차림으로 두 딸 앞에 앉으며 봉랍이 뜯어진 서한을 흔들어 보였다.

“몬타네르 대공 전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단다.”

“어머나! 친절하신 대공 전하. 지난번에 초대하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네요.”

릴리아가 두 손 모아 감탄했다. 그사이 리즈는 슬쩍 고개를 돌려 거실 한편을 바라보았다. 케인이 그곳에 얌전히 서 있었다. 평온한 얼굴로.

“그럼, 차기 황제가 되실 분인데 당연히 빈말을 할 리가. 게다가 추신에 뭐라고 덧붙여 놓으신 줄 아니?”

“뭐라고 적어 놓으셨는데요?”

“본인이 아직 주인이 아닌지라 황궁으로 초대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어머. 겸손하기도 하셔라.”

릴리아는 다시 한번 감탄하고 리즈는 다시 한번 케인을 돌아보았다. 케인의 고요한 눈이 리즈를 향해 미끄러졌다.

‘아무렇지 않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리즈는 안심했다. 일단은.

“초대 날짜가 언젠데요?”

“오늘.”

어머니의 대답에 리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나 빨리요?”

“그분이 원래 그렇게 즉흥적인 데가 좀 있으시지.”

어머니는 그걸 굉장히 로맨틱하게 받아들이셨지만 리즈의 생각은 달랐다.

‘뭐가 이렇게 제멋대로야? 그런 면에선 조카랑 똑같네.’

“오늘 저녁이라고 했으니까 준비하는데 늦진 않을 거다. 모니카! 미라벨!”

어머니가 두 시중인을 호출해서 각각 리즈와 릴리아의 치장을 맡겼다.

리즈는 미라벨에게 제 치장을 맡기고 싶었다. 미라벨도 리즈의 치장을 담당하고 싶어 하는 듯 머뭇거렸지만, 그 전에 모니카가 리즈를 생선 낚듯이 낚아채 갔다.

“아가씨, 우선 욕장으로 가요. 안 그래도 이럴 줄 알고 물 받아 놨어요.”

리즈는 입욕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대충 머리 질끈 묶고 화장도 안 하고 가고 싶었다.

“난 괜찮으니 릴리아 시켜 줘.”

“아니에요. 그럴 순 없어요.”

릴리아가 손사래를 쳤다.

“오늘은 언니를 위한 날이잖아요. 언니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셔야죠.”

그러고선 모니카에게 지시했다.

“꽃잎 듬뿍 넣어 드려. 진한 장미 꽃잎으로. 향유도 떨어트리고.”

“예, 아가씨.”

리즈는 왠지 모르게 이 지시와 복종이 거슬렸다.

‘이제 모니카의 주인은 나니까 명령을 내려도 내가 내려야지.’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지 못한 건 미라벨 때문이었다.

혹여 자신이 총애하는 미라벨에게 그 화살이 돌아갈지도 모르니까.

리즈는 불쾌감을 지우며 처소로 올라갔다.

***

황궁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오밀조밀한 주택 단지. 그곳에서도 끝자락에 위치한 삼 층짜리 석조 건물.

연회색 화강암 재질의 건물은 신식답게 세련되고 깔끔하며, 잘 손질된 나무와 앙증맞은 연못, 물레방아에서 졸졸 떨어지는 물소리는 운치 있는 정경을 선사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작았다.

‘뭐야? 우리 집하고 별 차이 없잖아?’

마차 밖으로 보이는 몬타네르 대공저를 눈에 담으며 리즈는 생각했다.

기대를 안 했기에 실망할 것도 없었지만, 살짝 의아하긴 했다.

왜 제국의 섭정씩이나 돼서 고작 이 정도 저택에 살고 있지?

하지만 생각해 보니 섭정이기 때문에 이런 집에 살 수 있는지도 몰랐다.

황궁이 제집이고, 앞으론 영원히 제집이 될 거라 믿고 있을 사람에게 굳이 다른 저택이 필요할 리가 없으니.

그러니까 여긴 짐 보관소 혹은 별장 개념인 것이다.

마차가 입구 앞에 도착하자 몸소 마중 나온 대공이 한 사람씩 손을 붙잡아 주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초대에도 흔쾌히 응해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어머, 저희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답니다.”

어머니와 대공이 한 차례씩 인사치레를 주고받았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가 집의 외관을 스윽 훑어보는데, 몬타네르 대공이 살짝 난처해하며 말했다.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말씀드렸듯이 황궁은 제 일터라서 일터로 사적인 손님을 불러들일 순 없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역시 전하께선 공과 사가 분명하시군요. 과연 차기 군주다우세요.”

어머니는 ‘누추한 곳’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안으로 드시지요.”

대공이 세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리즈는 이 순간 대공이 자신이 아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리즈와 릴리아는 집사가 안내를 담당했다.

릴리아는 순진하고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집 안은 의외로 아기자기한 구석이 있어 릴리아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 눈에 이 집과 대공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리즈는 기가 막혔다.

남주와 엮이지 못한 여주에게 대공의 존재는 그저 차기 황제, 대단한 사람, 신발 끈에 닿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사람 외에 달리 없었다!

식사는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홀 안을 은은하게 감도는 가운데, 사용인들이 장방형 식탁 위로 끊임없이 새로운 음식을 내놓았다.

하나같이 귀한 식재료로 만든 맛깔스러운 음식이었다.

어머니와 대공은 와인 잔을 몇 번이나 맞부딪히며 저들의 젊은 시절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취기가 오른 어머니는 딸의 혼사도 잊은 듯했다.

이대로 영원히 잊어 주면 좋으련만.

불현듯 어머니에게서 눈을 돌린 대공이 리즈에게 권했다.

“영애, 실례가 안 되신다면 집을 좀 구경시켜 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저만요?”

“예.”

‘올 게 왔구나.’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지만,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리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승낙을 표하자 그가 함께 자리한 이들에게 차례로 양해를 구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클레르, 그리고 릴리아 양.”

취기로 상기된 어머니가 대공의 옷깃을 살짝 붙잡았으나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떨쳐 냈다.

은은하게 공기를 메우던 음악이 끝나고 악사들이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 위해 현을 조율하는 가운데 대공이 리즈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리즈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고 바라보다…… 결국 제 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함께 홀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뒤로 느리고 묵직한 첼로 선율이 유령처럼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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