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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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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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2023.07.13.
하지만 안도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자정이 가까워 오자 리즈는 또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복도에 모니카가 죽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지령을 받은 게지. 차기 황후가 될 사람이니 허튼짓 못 하게 잘 감시하라고.’
난생처음으로 받아 보는 관심이 이런 식이라니. 리즈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지금은 그딴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미라벨이라면 모를까, 얄짤없는 모니카를 뚫고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다는 거야? 어림도 없지.’
그때였다.
톡톡-.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라기엔 울림이 맑았다.
하물며 방문 쪽에서 들려온 소리도 아니었다.
리즈의 시선이 자줏빛 벨벳 커튼으로 향했다. 소리가 그쪽에서 들려온 것 같았다.
“에이, 설마. 잘못 들은 게 틀림없어.”
톡톡-.
또 한 번의 소리가 들려오자 더 이상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리즈는 커튼을 조심스레 열어젖혔다. 기절하지 않은 게 용했다.
케인이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창틀에 앉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맙소사!
지난번 그가 이곳에서 가볍게 뛰어내렸을 때 그 반대도 가볍게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농담 삼아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근데 그게 진짜로 가능할 줄이야.
흩어진 정신을 겨우 끌어모은 리즈는 잠금장치를 풀어 창을 열어 주었다.
그는 열린 창문으로 가볍게 뛰어들어 온 뒤, 창을 닫고 돌아서서 말했다.
“안 자고 기다렸네?”
“찾아온다고 하셨으니까요. 전하께서.”
“단순히 그 이유 때문?”
무슨 의도인지 몰라 리즈는 그냥 흘려들었다.
“왜 온 거예요?”
그녀는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러자 그가 리즈의 침대에 느긋하게 걸터앉으며 되물었다.
“숙부에게 청혼받았다면서?”
“…….”
“그가 아마도 나에 대해 뭔가 눈치챈 거 같군.”
리즈도 조금은 짐작하고 있던 터라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 이유가 아니고서야 몬타네르 대공처럼 자유연애를 즐기는 자가 자신에게 청혼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어떻게 알았을까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그는 짐작 가는 데가 있었지만 말해 주지 않기로 했다. 그날, 리즈가 공터에서 불량배를 살려 두라 청한 자기 자신을 질책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
입술을 한참 달싹이던 리즈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전하를 제…… 연인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그래서 내게 청혼하면 눈이 뒤집힌 조카가 자기를 죽이러 찾아올 거라 판단한 걸까?
“아마도?”
완전 헛다리 짚었네.
“중요한 건 그가 날 못 알아보았단 거야. 신발 끈 묶는 내내 지켜보고도 못 알아보다니, 그자도 한물갔더군.”
케인이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아마 이 저택 주위에 사람도 잔뜩 심어 놨겠지. 그대가 누굴 만나는지 감시하려고 말이야. 정작 찾는 이는 집 안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가 초저녁의 일을 가볍게 언급해서 리즈는 조금 안도했다.
굴욕당한 것에 대해 크게 마음 쓰지 않는 것 같아서.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리즈의 말에 그가 제 옆의 침대 시트를 톡톡 두드렸다.
“앉아.”
느긋하게 기대앉아 세상 여유로운 듯 나른하게 올려다보는 그를 리즈는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국은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누구란 걸 알고부턴 그의 모든 말에서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곤 했으니.
리즈는 그가 두드린 자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았지만, 그래 봤자 그의 영역 안이었다.
흘러내린 그녀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는 그의 길고 섬세한 손을 느낀 순간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나?”
귓바퀴를 따라 천천히 미끄러진 그의 손이 리즈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부드럽지만 단단한 목소리였다.
창틈으로 스며들어 온 바람에 촛불이 크게 흔들렸지만, 케인의 새파란 눈망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남자의 눈빛도 이랬다. 달빛 아래의 마로니에 가도에서 고요하게 자신을 응시하던 황태자의 금빛 눈동자도 이렇듯 똑바로 그녀를 직시했다. 마치, 그녀의 눈동자 속에 자신을 각인시키기라도 하려는 듯.
저만이 그녀를 지배하는 절대 군주라도 되려는 듯.
리즈의 의식 속에서 처음으로 두 사람이 합쳐졌다. 하지만 금세 떨어졌다.
“뭘…… 어떻게 하실 건데요?”
리즈가 콩콩 뛰는 심음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물었다.
“글쎄.”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모호하게 말했다.
다시 한번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외풍이 기어이 촛불 하나를 꺼뜨렸다.
농도 자체가 달라진 어둠 속에서 리즈는 어렴풋이 케인의 눈동자에 스민 갈망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잘못 보았을 수도 있었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것처럼.
“딴 남자한테 청혼받은 연인 때문에 눈 뒤집힌 남자가 할 게 뭐겠어?”
***
릴리아는 이제 좀 마음이 놓였다.
언니가 결혼한다.
케인에게서 완전히 떨어진다. 설마 결혼하면서 케인을 데려가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케인은 어떻게 해서든 내가 지킬 거야.”
릴리아는 다짐했다.
자신이 케인과 어떻게 할진 아직 안정했지만, 뭐 그건 차차 정하면 될 거 같다.
케인이 이미 한 차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하긴 했지만, 그건 자신이 싫어서가 아니라 고백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래, 너무 서둘렀다.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서야 했다.
언니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자신답지 않게 신중함을 잃었다.
아무튼 언니가 이 집을 떠나면 그깟 시간쯤 얼마든지 줄 수 있다. 더 이상 급할 것도 없으니.
릴리아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모든 일이 그녀의 바람대로 흘러가고 있다. 누구 한 사람 불행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 하지만 역시…….
“가장 행복한 건 나여야지.”
내가 제일 행복하고,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있는 거야. 내가 행복하지 않고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은 있을 수 없어. 아무렴, 그렇지.
그때 문득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릴리아의 맑고 고운 음색이 그 소리에 답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굳은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그 여인이 누구란 걸 확인한 릴리아의 입매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미라벨이었다.
베리움 부인이 모니카를 데려가고 대신에 미라벨을 자신에게 붙여 주었다.
“시키실 일은 없으세요?”
미라벨이 릴리아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시킬 일…….”
릴리아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그러고선 그녀답지 않게 시중인을 부렸다.
“발톱 손질 좀 해 줄래?”
“…….”
“요즘 발가락이 드러나는 구두가 유행이라고 해서. 그런 걸 신으려면 발톱이 엉망이어선 곤란하잖아?”
미라벨로선 따르고 싶지 않은 명령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집의 시중인이고 릴리아가 주인 아가씨인 이상 거부할 순 없었다.
미라벨이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도구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그래, 천천히 와.”
릴리아가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하지만 미라벨이 처소를 나가자마자 매끄럽고 대칭적이던 릴리아의 미소는 금세 균형을 잃었다.
“내가 전에 말했지? 언젠가 네가 내 발밑에 머리를 조아릴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평소에 잘했어야지.”
그녀는 점점 마음의 소리에 충실해져 갔다.
***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수도에서 이름난 양재사.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예약을 걸어 두지 못하면 웨딩드레스를 짓지 못한다는 바로 그 양재사가 몸소 베리움 후작저로 찾아왔다.
“대공 전하께서 특별히 신경 쓰라 지시하셨습니다. 앞으론 칠 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아가씨의 드레스를 지어 드릴 겁니다. 마님과 작은 아가씨의 것도요.”
양재사 베로니카의 말에 감격한 어머니가 눈물까지 글썽였다.
“어머,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러고선 본인이 제일 먼저 치수를 쟀다.
치수를 재는 내내 그녀는 최근에 불어난 몸매에 대한 한탄을 양재사에게 토로했다.
“젊을 땐 나도 말랐다는 소리 많이 들었는데. 이젠 여기저기 군살이 붙으니 드레스도 넉넉한 걸 입지 않으면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다니까.”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양재사 베로니카는 릴리아가 아니었다.
“그렇군요. 운동을 좀 해 보심이 어떨까요?”
어머니의 벌레 씹은 표정은 리즈에게 소소한 재미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리즈가 치수를 잴 차례가 되자 마치 화풀이라도 해 대듯 어머니의 공격이 그녀에게로 날아들었다.
“얘, 너 배 나왔니? 배 좀 집어넣어라.”
“…….”
“가슴도 좀 집어넣고. 누가 보면 가슴 크다고 자랑하는 줄 알겠다.”
후우-.
리즈의 한숨에 앞머리가 펄럭 날렸다.
마지못해 치수 재는 것도 곤욕인데 거기에 어머니의 참견까지 더해지니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음 같아선 다 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참자. 참아.’
이런 일로 벌써부터 감정 소모를 할 순 없었다.
양재사가 릴리아의 신체를 재는 동안 리즈는 어머니에게 독대를 청했다.
“아직 결혼하기로 결정 난 것도 아닌데 이러시면 어떡해요?”
딸의 힐난 섞인 목소리에 어머니가 무슨 소리 하냐는 듯 눈썹을 추켜올렸다.
“결정 난 게 아니라니? 벌써 결정 났잖아.”
“누가 결정했는데요? 어머니가요? 전 분명 안 하겠다고 말씀드린 거 같은데요.”
“난 분명 해야 한다고 말한 거 같은데?”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건 별 도움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곧바로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딸을 설득하려 했다.
“얘, 리즈. 네가 계속 나이 차 때문에 신경 쓰이나 본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날수록 사랑받는 법이란다. 뭘 하든 귀엽고 예뻐 보이지 않겠니? 한두 살 차이 나는 사람은 친구지. 친구는 친구일 뿐이야. 배우자가 아니라고.”
“…….”
“게다가 얼마나 멋있니? 그 남자,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젊었을 적에 얼마나 잘나갔는지 아니? 그 당시 수도 여인들 중에 그 남자한테 한 번도 안 매달려 본 여인이 없을 거다.”
리즈의 표정은 한결같이 시큰둥했다.
“우리 이러지 말자꾸나.”
갑자기 어머니가 리즈의 손을 다정스레 붙잡으며 말했다. 이렇게 손을 잡아 준 게 아마 태어나서 처음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드럽고 따듯했다.
“넌 모를 거다. 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안이 얼마나 무시당해 왔는지. 이런 말 네겐 안 했지만 향후 오 년 안에 작위를 이어받을 남자를 들이지 못하면 영지를 황실에 반납하라는 고지까지 받았단다.”
“그 말씀, 하셨어요.”
그것도 세 번이나.
“……그랬니?”
어머니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손을 더욱 꼬옥 잡으며 리즈의 약한 부분을 공략했다.
“그래도 우리 집안이 무시당해 온 건 변함없다. 내 평생에 아들 하나 더 낳지 못한 게 어찌나 후회되었는지 아니? 시한부 작위라고 사교 모임에 끼워 주지도 않으려는 걸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고 비참했는 줄 아냔 말이야.”
“사교 모임에 안 나가시면 그만이잖아요.”
“그런 모임에라도 안 나가면 내가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니? 네 아버지는 결혼 내내 밖으로만 나돌다 결국엔 복상사로 죽지 않았니. 자고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들과 계속 어울려야 하는 법이야. 내게 그런 낙이라도 없었으면 진작에 우울증 걸려 죽었어.”
“…….”
어머니의 공략은 정확했다. 리즈는 손을 감싸는 따스한 감촉과 어머니의 사실에 기반한 호소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어차피 황태자는 조만간 황궁에 복귀할 거고, 황제가 될 거고, 황후를…… 들일 것이다.
그러니 대공의 구애도 금세 거둬질 텐데, 굳이 이렇게 어머니랑 감정 상해 가면서 다툴 필요는 없겠지.
리즈는 결심했다.
“알겠어요. 어머니 뜻대로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