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자정에 찾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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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자정에 찾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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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자정에 찾아가겠다
2023.07.12.
“언니, 정말 잘됐어요.”
릴리아가 저녁도 거르고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창밖만 내다보고 있는 리즈를 찾았다.
이 집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제 처소를 찾은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려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대공 전하 같은 분을 만나려고 여태껏 다른 분들과 인연이 닿지 않았나 봐요.”
“…….”
“정말 근사하신 분이에요. 마흔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멋져 보였어요. 그런 분과 결혼해서 차기 황후가 된다니, 언니가 너무 부러워요.”
비아냥거린다고 여기기엔 지나치게 무해한 얼굴이다…… 만, 그건 리즈가 한마디 쏘아 주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그럼 네가 그분과 결혼하지 그러니?”
릴리아의 얼굴에 자리한 미소가 살짝 흐려졌다.
“어, 언니도 참. 저 같은 사생아가 그런 대단하신 분과 어떻게 결혼을…….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일대 혼란이 일어날지 몰라요.”
“혼란이 안 일어난다면 할래?”
“당연히…….”
릴리아는 강하게 긍정하려다 혹시나 그런 상황이 정말로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리즈는 이 얘길 그만하고 싶었다.
“릴리아.”
“네, 언니.”
“넌 황후가 된다면 어떨 거 같니?”
조금 전 대화의 연장선상이라 여긴 릴리아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다.
“언니, 전 말씀드렸듯이 사생아라 황후가 될 수 없…….”
“만약에.”
리즈는 원활한 대화를 위해 잠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몬타네르 대공이 아니라 다른 남자였다면…….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남자가 황제가 되고, 네가 황후가 된다면 넌 어떻게 할 거 같니?”
“으음…… 글쎄요.”
리즈의 설명이 누군가를 상기시켰는지 릴리아는 좀 전처럼 격렬한 거부 반응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
“안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를 다하겠죠. 여인으로서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내조죠. 사교계 여인들을 잘 통제하여 쓸데없는 말이 나돌지 않게 하고, 그들과 그들 가문을 제 편으로 끌어들여서 폐하께 힘을 보태 드려야겠죠. 모름지기 여인들의 사교술은 남자들의 무력 못지않게 위력적인 법이니까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치곤 릴리아는 막힘없이 술술 처세를 내뱉었다.
리즈는 조금 감탄했다.
‘원작 여주여서 그런가. 확실히 타고난 처세가 있긴 하네.’
하지만 그만큼 안타까웠다.
릴리아라면 실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케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케인이 제 숙부에게 고개 숙이던 모습을 상기하자 안타까움은 한층 더해졌다.
지금이라도 그가 릴리아와 잘되도록 힘을 써 볼까?
원작에서 언뜻 릴리아의 슬기로운 처세가 입지가 약한 황제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구절을 본 것 같았다.
리즈는 케인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었다. 그것이 제게 씌워진 운명의 굴레를 조금 더 빠르게 벗을 수 있는 길 같기도 했다.
“저기 릴리…….”
“그나저나 케인은 정말 영광스럽겠어요.”
릴리아의 뜬금없는 말에 리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영광스럽다는 거야?”
“대공 전하 말이에요. 그분의 신발 끈을 묶어 드렸잖아요.”
“그게 왜…… 영광스럽다는 거지?”
리즈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유가 아니길 바랐다.
“곧 황제 폐하가 되실 분이잖아요.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한번 그분에게 닿아 보겠어요?”
“…….”
그 이유가 맞았다.
그녀에게 조금 전의 굴욕적인 상황은 그저 어린아이가 신관에게 세례를 받는 경건한 축복 의식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까, 릴리아도 평범한 인간이었던 거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 앞에서만 해야 하며, 말이나 신념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바뀌기 마련이란 사실을 잘 아는…… 평범하고 모순적인 인간.
“근데 언니, 조금 전에 저한테 무슨 말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릴리아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니.
갑자기 피로가 물밀 듯 몰려왔다.
이만 돌아가 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찰나, 노크 소리와 함께 미라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저예요.”
“들어와.”
문이 열리고 미라벨이 조심스레 들어와 리즈와 릴리아의 중간에 서서 고했다.
“마님께서 잠깐 처소로 오시랍니다.”
어머니의 부름에 리즈가 돌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쯤에서 부를 거라 예상해 둔 덕분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언니.”
“릴리아 아가씨도 함께 내려오시랍니다.”
미라벨의 말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릴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응? 나도?”
“네.”
휴우우-.
리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불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선 기름 몇 방울이 필요할 테지.’
오늘 밤 그 불 위에서 활활 태워질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니 리즈는 벌써부터 막막해졌다.
***
“그렇게 결혼, 결혼하더니 잘되었어. 이러려고 그간 남자들이 네게 그렇게 퇴짜를 놓았나 보구나. 장하다, 내 딸.”
다시 한번, 리즈는 어머니와 릴리아가 친모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쩜 이렇게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지?
그녀는 딸이 황후가 될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황실의 외척이 될 생각에 들떴다.
황실의 외척이 되면 사교계는 이제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다. 매번 누구 공작부인의 재미도 없는 말에 동조하느라 질렸던 그녀다. 누구 후작부인의 자선 바자회에 억지로 참석하느라 지쳤던 그녀다.
그런데 황제의 장모가 된다면?
그 모든 이들이 자신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영지에서 갓 올라온 특산품을 바치느라 저택 앞은 문전성시를 이루겠지.
이 응접실로 되려나? 벽을 허물어서 확장할까?
아니다. 확장이 뭔가? 연회용으로 별관을 하나 따로 지어야겠다.
그러면 땅을 좀 더 사야겠는데? 그 정도는 황실에서 품위 유지 명목으로 지원해 주겠지?
그렇게 황홀경에 빠져 있는 베리움 부인의 환상이 깨어진 건 한순간이었다.
“저 결혼 안 합니다.”
부인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눈으로 리즈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니?”
제아무리 할 말 다 하는 리즈였지만 난생처음 저를 향한 어머니의 기대를 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 그대로예요. 전 이 결혼 안 해요.”
“아니, 왜?”
“나이 차이도 너무 나고…….”
“얘가, 얘가 철없는 소리를 하네.”
어머니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남자는 사십 대가 넘어서야 진정한 남자로 거듭나는 거야. 그 나이대 남자들이 성적으로도 얼마나 왕성하고 능숙한데? 네 또래는 그저 어린애들일 뿐이야. 미숙한 철부지 애들. 그렇지 않니? 릴리아?”
어머니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릴리아에게 보내고, 릴리아는 그런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럼요, 저도 그 얘긴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전 싫어요!”
리즈도 이젠 마음 놓고 단호하게 응수하기 시작했다.
베리움 후작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더니 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어 말했다.
“그래도 할 수 없어. 대공 전하께서 네가 마음에 많이 드셨나 보더라. 그분이 누굴 콕 집어서 청혼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야. 지난 이십여 년을 그분에게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들이대다 거절당했는지 아니? 넌 영광으로 알아야 해.”
“그 영광스러운 자리…….”
어머니나 하시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조만간 신전에 가서 날 받아 올 테니, 넌 얌전히 신부 수업이나 받고 있어.”
“…….”
“오늘부터 네 시중인도 바꿔야겠다. 미라벨이 널 너무 응석받이로 만들어 놨어. 이제부터 모니카가 네 담당이다. 이의 없지? 릴리아?”
“네, 그럼요. 언니를 위한 일인걸요.”
릴리아가 사슴처럼 동그랗고 큰 눈을 예쁘게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리즈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신이 마치 도축장에 억지로 끌려가는 가축이라도 된 것 같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여길 나가고 싶다. 지금 당장.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일어나 볼게요.”
리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어머니가 ‘버릇없는 것’ 하고 욕하면서 혀를 끌끌 차는 것도, 릴리아가 그런 어머니를 달콤한 말로 위로하는 것도, 이제 막 전담 시중인으로 배정받은 모니카가 부산스럽게 뒤를 따르는 것도, 어느 것 하나 리즈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리즈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원작을 벗어나고 싶었다. 원작 속 아무하고도 엮이지 않고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가정을 이루는 것까진 이제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도록 해 줘야 하는 거잖아.
왜 계속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나를 밀어 넣는 거냐고. 왜!
리즈는 거칠게 문을 밀어젖히고선 어머니의 처소를 나왔다.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미라벨이 리즈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모니카에게 저지당했다.
리즈는 운명에 도전하기라도 하듯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나갔다.
대리석을 밟아 나가는 구둣발 소리가 타악기의 울림처럼 리드미컬한가 싶더니 금세 빨라졌다.
모니카가 헉헉대며 뒤를 쫓다 발을 삐끗한 듯 ‘흐억’ 내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리즈는 멈추지 않았다.
리즈를 멈춰 세운 건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보이는 케인의 존재였다.
그가 홀 반대편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알고 있을까? 내가 청혼받은 사실을.’
리즈는 일순 궁금해졌다.
시중인들 사이에 화두로 오른 일이니 모를 리가 없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선 아무런 동요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아무렇지 않은 걸까? 자신의 숙부와 내가 얽히든 말든?’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게 맞을 것 같았다.
그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그 자신이 숙부에게 당한 굴욕뿐, 자신과 대공의 혼담 따윈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훗!
갑자기 웃음이 났다.
대체 그에게 뭘 바란 걸까?
제 처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길 바랐나? 아니면 대공에게서 저를 구해 주길?
‘바보같이. 지금 자기 코가 석 잔데 그럴 여유가 있을 리 없잖아!’
때마침 모니카가 절뚝거리며 등 뒤에서 나타났다.
“고마워요. 아가씨. 기다려 주셔서.”
널 기다린 게 아니라는 말은 굳이 해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리즈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이, 평온하게. 네 숙부의 청혼 따위 내 일상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듯이.
케인은 잠시 멈춰 서서 가볍게 묵례를 올리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옷깃이 닿을 듯 말 듯 간격을 두고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문득 리즈는 제 손에 쥐어진 뭔가를 느꼈다.
쪽지였다. 모니카는 눈치채지 못했다.
리즈는 쪽지가 삐져나오지 않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모니카를 쫓아 보내고서 펼쳐 보았다.
「자정에 찾아가겠다.」
짧고 건조한 통보였지만, 묘한 안도감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