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제 비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41/65)


#41화 제 비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2023.07.11.


16890771998281.jpg

 
어머니의 말에 두 자매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베르트 소공작을 피했더니 또 다른 장애물을 맞닥뜨리는가 싶었던 릴리아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제 옆의 언니에게 축하가 담뿍 담긴 미소를 건넸고, 그건 그 어떤 미소보다 진실했다.

리즈는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다.

미처 감추지 못한 당혹감이 찻잔을 내려놓는 부들거리는 손 떨림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실례로 여겨질 정도는 아니었다.

몬타네르 대공이 부드러운 눈길로 리즈를 음미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클레르의 말대로 아주 미인이군요.”

“어머, 전하. 과찬이세요. 아주 미인까지는…….”

어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네. 어디 가서 빠지지 않게 생긴 것만큼은 확실하죠. 게다가 할 줄 아는 것도 많답니다. 특히 요즘 아가씨들답지 않게 경제 관념이 좋아요. 물건값을 어찌나 잘 깎는지, 상인들 원성이 자자하답니다. 이 댁 아가씨가 너무 잘 깎아서 남는 게 없다고요.”

“오호, 그것참 흥미롭군요. 안주인으로 맞아들이면 재산이 새어 나갈 염려는 없겠습니다.”

리즈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두 사람은 언제 만난 것이며, 저가 없던 자리에서 어머니는 저를 두고 무슨 작당을 벌인 걸까.

리즈는 멍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일단 질문은 나중에 몰아서 하자. 지금은 그냥, 높으신 손님을 접대한다고만 생각하자.

“돌아가신 후작을 쏙 빼닮았군요.”

결혼이니 안주인이니 하는 이야기에서 잠시 멀어지니 리즈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지만, 덧붙임은 없었으면 좋을 뻔했다.

“한데 제 아버지의 안 좋은 점까지도 닮았답니다. 음악을 좋아한다든가, 몽상에 빠져 지낸다든가 하는 일 말이죠.”

“그건 안 좋은 점이라 할 수가 없겠는데요? 꽤 좋은 거 아닙니까? 저도 가끔 그러니까요.”

“아…… 전하께서도 피아노를 치셨죠? 제 남편한테 들은 적 있는 것 같아요.”

“그랬죠.”

대공이 아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땐 저도 제 조카와 함께 피아노를 곧잘 치고 놀았는데…….”

“사라지신 황태자 전하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어머니의 말에 대공의 적자안은 더욱더 애잔하게 물들었다.

“그렇습니다. 그 가엾은 아이가 지금 어딜 헤매고 다니는지 알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개소리.

그가 얼마나 조카를 괴롭혀 왔는지 아는데. 호시탐탐 죽일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는 걸 아는데 잘도 가증스러운 소리를.

리즈는 속으로 조소했다.

대공과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마치 제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오묘한 적자안에 리즈는 흠칫 놀랐다.

속으로 신나게 욕을 퍼붓고 있던 터라 더더욱 안절부절못했다.

혹시 들은 걸까? 내가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 하고 외치는 소리를?

“첫 만남에 외람된 말씀이지만.”

연륜이 느껴지는 중후한 저음이 리즈의 달뜬 마음을 착 가라앉혀 주었다.

“아리스테 양, 괜찮으시다면 제 비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

잠시간의 적막이 응접실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누구 하나 움직이거나 말을 내뱉는 사람이 없었다.

베리움 부인은 입술에 댄 찻잔을 기울이다 만 채였고, 릴리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리즈는…… 무념무상이었다.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 자리가 맞선 자리임을 채 인식하기도 전에 청혼이 몰아닥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예상외로 침묵이 길어지자 몬타네르 대공도 조금 당황했다.

“이런, 제가 큰 무례를 저질렀군요. 청혼을 이렇게 성의 없이 하다니. 시일을 주시면 제대로 된 방식으로…….”

“아니요!”

어느새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찻잔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다급히 말을 끊었다.

“청혼 방식이 뭐 중요한가요? 내용이 중요하지.”

“하지만 여인들에겐 청혼받은 기억이 평생을 간다고 하더군요.”

대공의 말에 어머니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살아 보니 그런 거 하나도 필요 없더군요. 형식보단 내실이에요. 안 그러니? 리즈?”

리즈가 침묵하자 눈치 빠른 릴리아가 대신 맞장구쳤다.

“그럼요, 허울 좋은 청혼보단 살아가면서 보여 주는 진심이 중요하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전하.”

“들으셨죠? 요즘 애들이 이렇게 실속 있답니다. 그러니 청혼 방식은 신경 안 쓰셔도 되어요. 호호.”

릴리아가 자신의 말을 예쁘게 다듬으며 동의하자.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제 자식의 원만하지 못한 사교술과 처세가 생각났는지 그녀가 슬그머니 걱정을 내비쳤다.

“다만, 리즈가 잘하는 것만큼이나 부족함도 많은 아이라……. 혹시나 실수라도 하면 어미 된 자로써 전하의 낯을 어찌 뵈어야 할는지…….”

“그런 건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공이 부드럽게 웃으며 베리움 부인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제가 보기에 아리스테 양은 나무랄 데 없는 대공비 감입니다. 역시 클레르가 키운 따님답군요. 혼자서 이토록 반듯하게 키우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머나!”

베리움 부인이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 노고를 알아주시다니,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전하.”

릴리아가 어머니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어머니가 그걸로 눈시울을 훔쳤다.

리즈는 뭔가 대단히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결혼이라니. 그것도 나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악당과 결혼이라니.

‘이건 말도 안 돼!’

“그럼 결혼식은 언제가 좋을까요? 아니지. 일단 약혼 먼저 하는 게 맞을까요? 황족들은 약혼을 반드시 치르는 게 관례라고 했으니까.”

“황실 관례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따님의 의사죠.”

몬타네르 대공이 리즈를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남의 일처럼 멍하니 상황을 관조하던 리즈의 의식에 오직 그 의뭉스러운 미소 하나만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당장 대답을 요구하진 않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알려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어머, 생각이라뇨? 그런 건 필요 없…….”

“이런, 제가 약속이 있는 걸 깜박했군요. 먼저 일어나는 걸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대공이 어머니의 말을 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 하나만큼은 고마웠다.

“이렇게 빨리 가신다고요?”

어머니가 예의상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그를 붙잡았다.

“모처럼 걸음 하셨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셔야죠. 준비 다 되었을 텐데.”

대공은 아쉬움이 역력한 미소를 띠며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죄송해서 어쩌지요? 중요한 약속이라 지금 바로 가 보지 않으면 안 되어서. 미리 말해 두었어야 했는데 제가 큰 결례를 범했군요. 사죄의 뜻으로 다음번엔 저희 집으로 식사 초대를 하겠습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받아 주다마다.

“초대해 주신다면야 기쁘게 달려가겠어요.”

“그럼 조만간 집사 편에 초대장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몬타네르 대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모두들 따라 일어났다.

대공은 어머니와 릴리아에게 정중히 묵례한 뒤, 가까이 있는 리즈의 손을 붙잡아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리즈 양.”

리즈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이 남자의 손등 키스가 마치 죽음의 신이 제 몸에 남기는 새로운 인장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그 혐오스러운 입술은 손등에서 떨어지고, 몬타네르 대공은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 그를 현관까지 배웅하기 위해 뒤따르던 어머니가 멍하니 굳어 있는 리즈를 재촉했다.

“뭐 하니? 안 따라오고?”

겨우 정신을 차린 리즈는 망연한 태도로 어머니와 릴리아의 뒤를 따라 응접실을 나섰다.

현관으로 향하는 복도에 막 접어들었을 때였다.

까맣게 잊고 있던 존재를 발견하고서 리즈는 놀라 나자빠질 뻔했다.

맞은편에서 케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

이제 막 외출에서 돌아온 그의 어깨엔 도톰한 진회색 외투가 걸쳐져 있었다.

그도 리즈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는지 잠깐 멈춰 서 있었지만, 재빠르게 한편으로 비켜서며 대공의 시선을 끄는 일을 피했다.

초조한 긴장감이 리즈의 전신을 엄습했다.

얼굴이 달라졌으니 알아볼 리 만무하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그런 기분은 몬타네르 대공이 도열한 시중인들 사이에서 함께 머리를 숙이고 있는 케인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갑자기 케인이 안쓰러워졌다.

자신의 부모님을 중독사시키고, 어린 자신마저 죽이려 흉계를 꾸미던 원수 같은 숙부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는 지금 얼마나 속으로 울분을 삼키고 있을까?

하지만, 그건 굴욕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어머, 전하. 구두끈이 풀어지셨어요.”

어머니의 말에 대공이 걸음을 멈추고 제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풀어진 한쪽 구두끈의 끝을 자신이 밟고 서 있었다.

“아, 그렇군요.”

대공이 픽 웃으며 허리를 굽히려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다급히 만류했다.

“가만히 계세요.”

어머니가 케인에게 지시했다.

“너, 이리 와서 전하 구두끈 좀 묶어 드려라.”

리즈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대공의 청혼을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리즈는 똑똑히 보았다.

케인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렸다.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그가 저렇게 주저할 정도라니.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뭐 하니? 구두끈 좀 묶으라니까.”

어머니가 한 번 더 말했다. 케인의 생각도 그동안에 정리된 듯했다. 그가 대공 쪽으로 움직였다.

케인은 허리를 숙여 그의 발치 아래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섬세하고 예의 바른 손놀림으로 신발 끈을 묶기 시작했다.

리즈는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릴리아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일은 의외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그녀 아니었나.

마침내 구두끈을 다 묶은 케인이 제자리로 물러났다. 대공은 그의 앞에 트인 길을 여유롭게 걸어가고 어머니와 릴리아는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재개했다.

리즈는 가장 마지막으로 그들 뒤를 따르며 케인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는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고요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리즈는 알 수 있었다.

저 눈 속에 제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집요한 시선으로 멀어지는 제 숙부만을 좇는 그를 보며 리즈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쓰라린 굴욕이 그가 황실에 복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나…… 하고.

그러니 좋아해야 하는데, 기뻐해야 하는데…….

리즈는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