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예상치 못한 맞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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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예상치 못한 맞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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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예상치 못한 맞선
2023.07.10.
케인과 헤어져 처소로 돌아온 리즈는 한동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파랗던 하늘에 진줏빛 노을이 옅게 깔리는 광경은 언제 보아도 황홀했다. 땅거미 내려앉은 전나무 숲이 바람에 해초처럼 넘실거리는 광경도 평화로워 보였다. 혼란스러운 현실을 잊기에 적절한 자연경관이었다.
리즈의 눈이 현실로 돌아온 것은, 환기를 위해 막 창문을 열었을 때였다.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화를 돕기 위해 정원을 거니는 시중인들이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가 즐겁고 안온한 얼굴이었다.
그렇지 못한 건 이 세상에 오직 리즈, 그녀뿐인 듯했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나직이 혼잣말하는 리즈의 눈이 다시금 혼란으로 일렁였다.
어째서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어째서 남주는 여주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걸까.
혹시나 이미 사랑에 빠졌는데 자신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닐까 싶어 두어 번 넌지시 물어보기도 했다.
‘릴리아 어떻게 생각해요?’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네 동생으로.’
그래. 여주와 사랑에 빠지지 않은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황궁엔 돌아가야 할 거 아냐, 이 사람아!
황궁에 돌아가는 건 그의 오랜 목표였고 여주와는 무관했다.
여주에 대한 사랑이 조금 더 촉매 작용을 일으켰을진 모르겠지만, 여주가 아니더라도 돌아갈 생각이었던 건 분명했다.
‘그런데 안 간다고? 대체 뭣 때문에?’
도무지 알 수 없는 행보의 연속이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그가 이 집을 나가거나, 자신이 나가거나 둘 중 하나라고.
원작을 믿고 여태껏 버텼는데 그는 도무지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역시 제가 나가야 하는 게 맞을까 싶었지만.
‘아니야. 그럴 수 없어.’
리즈는 집을 나가서 또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형식적이나마 갖춰진 가족이라는 울타리. 지난 생보다 나은 건 겨우 그거 하난데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 찾아보면 계기가 있을지 몰라. 그를 황궁으로 복귀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분명 어딘가에…….’
“아가씨.”
“으앗! 깜짝이야!”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리즈가 껑충 뛰어오르듯이 놀랐다.
미라벨이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굳었다. 손에 들린 쟁반을 떨어뜨리지 않은 게 대견할 정도로 놀란 얼굴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놀라세요?”
“……그냥, 딴생각 좀 하다가.”
“아가씨도 참.”
미라벨이 눈을 흘기며 테이블 위에 차와 다과가 든 쟁반을 내려놓았다.
“요즘 따라 생각을 많이 하시네요.”
“내가…… 그랬어?”
“네, 자주 깜짝깜짝 놀라시고. 뭐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있지. 매일매일이 걱정이지.
“없어. 그런 거.”
희미하게 웃어 보인 리즈가 쟁반에 놓인 쿠키 하나를 베어 물곤 오도독 씹었다.
그러자 갑자기 미라벨에게 묻고 싶어졌다.
미라벨은 가끔 놀라울 정도로 통찰력을 발휘하곤 하니, 어쩌면 제 고민도 의외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미라벨,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 있을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아가씨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 있으세요? 지금?”
이야기가 샛길로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 리즈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 만약에 그렇다면 말이야.”
“으음…….”
미라벨이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하더니 리즈에게 말했다.
“이것저것 끄적여 보시는 건 어때요?”
“끄적여?”
“네, 저 같은 경우는 아무거나 끄적이면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거든요. 아가씨도 그렇게 해 보세요.”
갑자기 시중인들의 집합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와,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중단되었다.
“누구 손님이 오셨나 봐요. 오늘 예약된 방문자는 없는데.”
“얼른 내려가 봐.”
“네, 아가씨. 이따 또 들를게요.”
미라벨이 돌아섰다.
리즈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방문이 딸깍 닫히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서랍장으로 다가간 리즈가 펜과 노트 한 권을 꺼내 들곤 침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무릎을 세워 앉아 허벅지 위에 노트를 올리고선 아무거나, 그야말로 아무 말이나 막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한 십여 분쯤 지났을까.
미라벨의 방식은 미라벨에게만 해당된다는 걸 리즈는 깨달았다.
머릿속이 더욱 복잡하게 엉키는 기분이었다.
“이건 ‘루젠시아의 꽃’ 내용이 아니잖아.”
리즈는 황태자를 황궁으로 돌아가게 만들기 위한 계기를 원작의 뒤 내용에서 찾으려 했다.
그가 황궁에 간 뒤에 행할 일을 미리 알면, 제가 그에게 동기부여를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뭔가를 끄적여 봐도 소설 원작의 뒷부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애먼 다른 소설의 내용만 떠오를 뿐이었다.
이건 필시 잘못된 독서 습관 때문이었다.
이전 생의 그녀에게는 한 소설을 진득하게 끝까지 읽지 못하고, 이것저것을 동시다발적으로 보는 얄궂은 독서 습관이 있었다.
그러니 머릿속에 여러 책의 내용들이 마구잡이로 섞여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아…….”
리즈는 자조 섞인 탄식을 내뱉고선 노트와 펜을 내팽개쳤다.
어쩌면…… 그래. 자신이 어쩌면 정말로 이 집을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저 남자와 한집에서 계속 살 수는 없었다.
무려 황태자였다.
비록 자신에 대한 살기가 옅어졌다 한들 저런 불편한 분과는…….
‘잠깐! 살기가 옅어졌는지 아닌지 확실하지도 않잖아?’
조금 전 정원에서 제 옆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던 싸늘한 눈길을 리즈는 기억해 냈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 건초를 가루가 될 때까지 발끝으로 짓이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느껴졌다. 아주 집요한 눈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최근 들어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만행을 요목조목 늘어놓고 있었다. 역시…… 아직 억하심정이 남아 있는 걸까?
‘으아아아!’
리즈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
때마침 들려온 노크 소리가 리즈의 머리숱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걸 막았다.
“아가씨, 저 레나입니다.”
“무슨 일이야?”
나이 어린 시중인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마님께서 응접실로 내려오라 하십니다.”
거실이 아니라 응접실이라고?
리즈는 조금 전에 미라벨이 시중인 집합용 벨 소리를 듣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을 떠올렸다.
‘손님을 맞으라는 뜻이군.’
얼마나 중요한 손님이기에 평소엔 부르지도 않던 첫째 딸을 부르실까?
“손님이 누군데?”
그 이름을 내뱉기도 힘든지 레나가 호흡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몬타네르 대공 전하십니다.”
***
리즈는 단정한 옷으로 갖춰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조금 전에 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은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라벨이 응접실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다 리즈를 발견하곤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많이 놀라셨죠, 아가씨? 저도 얼마나 놀랐던지.”
미라벨은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몬타네르 대공이라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 남자가 아닌가.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은 황제라는 칭호였지만, 이제 곧 그 칭호도 그의 것이 될 터였으니 향후 몇십 년은 그의 천하일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몸이 떨리는데 하물며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아가씨는 얼마나 놀랐을까.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리즈의 표정은 담담했다.
“응, 조금.”
미라벨은 조금 의아했지만, 이성을 잃고 허둥대는 것보단 다행이라 생각하며 리즈를 응접실 문 앞으로 이끌었다.
막 문고리를 돌리려는 찰나.
“잠깐만.”
리즈의 말에 미라벨이 멈칫했다.
“케인은 어딨어?”
“케인이요?”
미라벨이 목소리를 낮추어 되물었다.
‘여기서 왜 그놈을 찾는 거예요? 아가씨, 그러면 못써요……!’
하지만 그런 질책을 하기에 시기와 장소가 좋지 못했다.
“장에 심부름 나갔어요.”
“그렇구나.”
슬쩍 들려지는 리즈의 입꼬리가 미라벨을 더욱 아연하게 만들었다.
그 상놈이 여기 있든 말든 대관절 무슨 상관이라고.
하늘보다 높다는 몬타네르 대공 전하가 계시는데.
“이제 열어도 좋아.”
리즈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명하고, 미라벨은 제 속의 의문을 억누르며 문을 천천히 열었다.
점점 벌어지는 문틈으로 이쪽을 등진 남자의 뒷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제 조카를 닮은 검은 머리였다.
조금 더 열리자 어머니와 그 맞은편에 앉은 릴리아의 홍조 띤 얼굴이 동시에 보였다.
친 모녀지간이 아니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닮은 미소가 두 사람의 얼굴에 지어졌다.
너무 상냥하고 환해서 다소 가식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
이제 문이 완전히 활짝 열리고 리즈는 조심스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몬타네르 대공이 천천히 일어나 돌아섰다.
순간, 리즈는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소설 속 악당…… 이라기엔 너무 신사잖아?
제 조카의 것과 같은 검은 머리에 붉은색과 보라색이 오묘하게 섞인 적자안.
그의 나이를 말해 주는 건 살짝 팬 볼, 그리고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후한 기운뿐.
남주의 나이 차 나는 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곧고 수려한 젊은이의 외모였다.
“뭐 하고 있니? 인사 안 드리고.”
어머니의 말이 리즈의 멍한 정신을 일깨웠다.
리즈는 얼른 치맛자락을 넓게 펼치곤 사뿐히 무릎을 구부렸다.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
“저야말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리스테…… 양.”
묘하게 이름을 음미하는 말투였다. 게다가 처음 마주하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라기엔 조금 매서웠다. 괜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니면 저 사람이 원래 이런 타입의 남자? 아니면 둘 다?
“앉으시지요. 영애.”
연륜에 걸맞은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공이 자리를 권했다.
리즈는 어디에 앉아야 이 남자의 시선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어느 쪽이든 똑같아 보였다.
그래서 릴리아의 옆자리로 정했다.
“이렇게 와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어머니가 은쟁반 위에 구슬이 굴러가듯 청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아세요? 전하께서 이 응접실에 오 년 만에 처음 오신 남자분이라는 사실을요. 호호.”
지난번에 내 맞선남이 다녀간 건 잊으신 걸까?
아니면 본인의 맞선남이 아니라서 남자의 범주에 넣지 않으신 걸까?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입에 갖다 대며 픽, 작게 코웃음을 치는 리즈의 귓가에 순간 생소한 말이 날아들었다.
“한데 지난번에 제게 소개시켜 주시겠다던 여인이 누구지요? 클레르?”
대공의 말에 리즈가 찻잔에서 눈을 들었다.
어머니가 리즈를 보고 있었다.
매끄럽게 올라간 입매가 벌어지며 보석 같은 치아를 드러냈다.
“저 아이예요. 제 큰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