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키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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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키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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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키스 이후
2023.07.09.
한 남자가 드넓은 홀을 빠른 속도로 가로질렀다.
다급한 모습에 시중인들이 서둘러 길을 비키느라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남자 본인도 딱히 인사를 받을 정신은 아니었다.
고풍스러운 대리석 바닥을 따각따각 울리며 성스러운 천장화 아래를 쏜살같이 달려온 남자는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섬세한 무늬의 마호가니 문 앞에 멈춰 서선, 달려오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잠시 가다듬었다. 그리고 문지기에게 말했다.
“대공 전하께 전할 말이 있으니 문을 열어라.”
남자의 말에 문지기 하녀가 다소곳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는 제 앞에 입을 벌린 공간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딸깍-.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남자는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매번 들어올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굉장한 기운을 가진 곳이군.’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이곳은 역대 황제들이 기거하던 처소였으니.
한쪽 벽면을 가득 장식한 전쟁 전리품에서부터 고색창연한 가구 한 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역대 황제들의 혼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어쩐지 숙연해지는 기분에 남자가 흐트러진 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때, 안채에서 새어 나오는 요사스러운 신음이 그를 멈칫하게 했다.
두 사람이 내는 소리였지만, 대체로 여인의 소리가 더 컸다. 상황을 파악하긴 어렵지 않았다. 보아하니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남자는 문밖에서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
끝 모르고 커지던 소리가 한순간에 뚝 그치고, 남자는 그제야 나직이 고할 수 있었다.
“전하, 접니다.”
갑자기 안이 부산스러워졌다. 엉켜 있던 몸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고, 이불을 끌어당기는 스르륵 소리도 들리고, 바닥에서 뭔가를 집어 들어 휘리릭 걸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더니.
거칠게 문이 열리며 이제 막 거사를 끝낸 불혹의 남자가 가운 매듭을 지으며 걸어 나왔다.
그가 느릿한 걸음으로 제 수행원을 지나쳐 거실 한복판의 안락의자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어떻게 됐지?”
“알아냈습니다.”
수행원이 말했다.
“세 가문입니다.”
“세 가문?”
“예, 아스펠리드 백작가, 플로랑 준남작가, 그리고…… 베리움 후작가.”
마지막 가문의 이름에서 대공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수행원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보고를 계속했다.
“이 세 가문이 말씀하신 붉은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를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십 대 중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의 따님들을 두신 집안입니다.”
“그렇군.”
몬타네르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먼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스펠리드 백작가부터 조사에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수행원이 돌아서려다 멈추었다.
“베리움 후작가부터.”
대공의 적자안이 간만의 흥미로 번뜩였다.
“왠지 거기일 거 같거든.”
***
한겨울임에도 봄날처럼 햇살이 따사로웠다.
리즈는 볕이 잘 드는 정원 벤치에 앉아 발끝으로 마른풀을 짓이기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털썩-.
바로 옆에서 누군가 묵직한 포대 자루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리즈는 돌아보지 않았다.
누군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닷새 전 그의 비밀을 공유하고 입술과 그 안의 것도 공유…… 한 이후, 매일같이 이렇게 마주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어딘가 숨어 있어도 소용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냈으니까.
밀폐된 공간에 둘만 있는 것보단 차라리 탁 트인 곳에서 마주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리즈는 엊그제부터 정해진 시간, 정해진 곳에 나와 있었다.
케인이 그가 내려놓은 포대 자루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겨울이라 양분이 부족한 나무들이 말라 죽지 않도록 주는 비료 포대였다.
그는 성인 남자 한 사람의 무게는 거뜬히 나갈 것 같은 포대를 한 번에 세 개나 나르고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상상했던 것 이상의 괴력에 리즈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또, 혀를 내두르게 만든 것이 있었다.
“저기…… 좀 떨어져 계시면 안 될까요? 너무 가까이 있으면 사람들이 의심해요.”
“의심하라지.”
그는 몬타네르 대공의 마차가 저를 향해 달려올 때와 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전하가 아니라 제가 곤란해요. 제가.”
“주인 아가씨와 사용인이 잠깐 대화 나누는데 곤란할 게 뭐 있나.”
“네, 하루 정도는 괜찮죠. 하지만 사흘 연속이잖아요.”
“그럼 그대의 처소에서 만나는 수밖에 없겠군.”
할 말을 잃은 리즈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케인이 픽 웃으며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었다.
“그게 싫으면 감수해.”
리즈는 도대체 이 남자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제 방으로 찾아와서 하는 것이라곤, 고작 제 침대에 드러누워 쉬다 가는 것뿐이었다.
떠나 보니까 이곳이 제일 안락하더라며.
‘그리고 내게도 옆에 누우라고 했지. 옛날처럼 팔베개해 주겠다고. 너 이런 거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혹시, 죽이는 방법을 달리하기로 작정하신 건가?
칼날에 의해서가 아닌, 수치스러워 스스로 뛰어내리게 만들려고?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정말로 매일같이 죽고 싶게끔 만들고 있었다.
자신에게 앙탈 부린 일이며, 관심이 소홀해졌다며 울고불고 난리 친 일하며, 가슴이 파인 옷을 입고 제 앞에서 보란 듯이 몸을 숙이던 일은 죽어도 못 잊을 것 같다는 말도 했다.
도저히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실 거예요?”
“계속.”
“네에?”
리즈가 펄쩍 뛰듯이 말하곤 얼른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두 사람을 눈여겨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케인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더군.”
“농담…… 이시죠?”
현실을 부정하고픈 그녀의 심정이 피식거리는 웃음의 형태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 웃음도 이 남자의 한마디에 금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아닌데?”
맙소사. 진짜 미쳤나 봐!
“그…… 그럼 평생 여기서 시중인 하며 지낼 거예요?”
“그럼 어때? 정직하게 돈 벌고 좋지.”
전나무 숲 너머에서 불어온 차디찬 겨울바람이 리즈의 뺨을 싸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마치 출구가 없는 얼음 동굴에 갇힌 것처럼 리즈는 오싹함을 느꼈다.
이건……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전하.”
리즈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황궁으로 돌아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체로 제 안위를 위해서였지만, 그렇다고 이 남자를 위한 마음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의 일상은 그가 진심으로 바라는 삶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 돌아가서 뭐 하라고. 제국은 나름 섭정 대공의 휘하에서 잘 돌아가고 있고…….”
“하지만 생각하신 이상향이 있지 않습니까?”
오래전 케인과 함께 아이들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화려한 제국의 이면에 자리한 어두운 면을 꼬집으며, 귀족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고 버리는 소모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하층민들의 아이들이 일터로 내몰린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제게 만약 권력이 주어진다면 모든 아이들에게 복지와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라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와 함께 한 몇 안 되는 진지한 대화였기에 리즈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케인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또 한 번 불어온 겨울바람이 둘 사이의 적막을 더욱 견디기 힘든 것으로 만들었다.
아무 말이나 내뱉어야 했다.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이 왜 없나요?”
케인이 시선이 제 발끝에서 리즈에게로 옮겨졌다.
“이샤르 경 있잖아요.”
그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지다가…….
푸흡-!
한여름의 녹음처럼 싱그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 기분 좋은 웃음이 요전 날의 키스 사건을 환기하게 했다.
‘후회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으면 한 번 더 하지.’
‘아니요. 후회 안 합니다. 절대로!’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처럼 갑작스럽고 유쾌한 웃음이 지금 이 순간의 케인에게서도 터져 나왔다.
리즈는 안심했다.
비록 그 웃음과 함께 제법 격정적이던 키스가 떠올랐다 한들 지금의 평화로운 감정은 깨트릴 수 없었다.
그건 그저…… 해프닝이었으므로.
그날 이후 제 방을 자기 방처럼 들락거린 케인조차도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단순한 해프닝인 게 확실했다.
가끔은 너무 언급을 하지 않아서 리즈는 제가 케인이 아닌 다른 남자와 키스를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밤, 리즈가 감미로운 키스를 나눈 상대는 백금발에 청안을 가진 남자가 아니라 흑발에 금안을 가진 남자였고, 리즈의 머릿속에서 두 사람은 아직 제대로 합쳐지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대.”
불현듯 들려온 한 톤 낮아진 목소리에 리즈의 상념이 깨어졌다.
“어째서 이샤르의 이름은 기억하는 거지?”
“…….”
저조차도 몰랐던 사실에 리즈가 눈만 껌벅거렸다.
‘그러게? 어째서 그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나는?’
케인이 가늘어진 눈으로 리즈를 보았다.
“글쎄요…….”
저도 모르게 대답을 흘린 리즈가 고개를 갸웃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샤르…… 이샤르…….
원작에서 비중이 높았나?
아니면, 식사는 근사하게 차려 주고, 제 앞에 한가득 놓인 펜과 종이는 빌려주지 않는 그 모순적인 만행 때문? 그래, 그거면 인상에 남을 만도 하지.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으니…….
“뭐…… 저도 이젠 남자 이름을 조금씩 기억할 수 있게 되었나 보죠.”
나름 만족스러운 임기응변이었다. 점점 능청스러워지는 스스로가 우스운지, 리즈는 피식 코웃음을 치고서 다시 발끝으로 마른풀을 짓이겼다.
반면 그녀의 옆모습을 응시하는 케인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난 며칠, 그녀와 관계를 개선해 보고자 다가간 제 노력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가.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고 싶어서 들려준 과거의 이야기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건가?
제가 해 주는 팔베개를 좋아했던 일 하며, 관심을 끌기 위한 다소 과격했던 방식 하며, 요염한 유혹 등등.
그런 걸 상기시켜 주면 그때의 감정이 조금은 되살아날 줄 알았는데.
그날 나누었던 키스 이후 제 몸은 불덩이처럼 끓어오르는데, 키스의 ‘키’ 자만 들어도 몸이 제멋대로 반응하는 걸 이 악물고 참느라 입안이 다 헐었는데. 너는…… 너는 다른 남자를 생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다는 거군.
발끝으로 마른풀을 비벼 대는 리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이제 제 속의 음험한 욕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가두고 싶다.
남자라곤 저밖에 없는 세상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