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내가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 (38/65)


#38화 내가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
2023.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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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 지하 깊은 곳엔 황족과 대귀족들의 사유 재산을 은밀히 보관하는 개인 금고실이 있었다.

금고는 한 가문당 하나만 가질 수 있고, 각각의 금고가 어느 가문의 것인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부당한 방법으로 불린 재산을 은닉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물론, 그런 목적으로 만든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어머니의 편지 말미에 비밀 금고의 고유 번호와 열쇠가 묻힌 장소가 적혀 있더군. 어릴 적 내가 즐겨 타던 나무 밑이었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일순 은은한 미소가 그려졌다. 짧았던 유년 시절의 행복이 만들어 낸 미소였다.

“내가 나무를 타면 어머니는 아래에서 안절부절못하셨지. 그 모습이 날 향한 애정의 증거 같아서 나는 더더욱 어머니를 걱정시킬 생각으로 높이 올라갔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론 당연히 그 나무를 찾지 않았지. 더 이상 내가 다칠까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십여 년 만에 찾은 나무 아래에서 그는 열쇠를 찾아냈다. 그리고 비밀 금고실에 잠입해 어머니의 개인 금고를 여는 데 성공했다.

거기서 선대 황후의 전 재산과 함께 발견한 건, 환약 수십 개가 든 유리병과 그 약의 제조법 및 효능 등이 적힌 양피지 두루마리 한 장이었다.

건강했던 시절의 필체로 꼼꼼하게 재료와 배합량을 적어 놓으신 것을 보면서도 헤르시스는 좀처럼 믿을 수 없었다.

이게 진짜 가능하다고? 어머닌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알게 되셨지?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약초학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재료를 혼합하고, 증류하고, 터뜨리고, 수습하길 즐기셨다는군. 아마 그러다 보니 알아낸 모양이야.”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탄생한 결정체가 잠시 동안 완전히 다른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아무튼 그것이 황궁에서의 내 마지막 발자취였을 거야. 약 한 알을 먹으니 금세 모습이 바뀌더군. 아주 쉽고 간단한 변신이었지…….”

리즈는 그 말이 거짓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결코 간단하고 쉬울 리가 없었다.

“그 길로 황궁을 벗어났지만, 차마 멀리 갈 순 없었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황궁으로 돌아올 기회도 영영 사라질 것 같았거든.”

그래서 그는 황궁 근처에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귀족 집안의 노예로 들어가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언젠가 이샤르에게 들은 귀부인들의 악취미가 시기적절하게 떠올랐다.

미망인이 된 부유한 귀부인들이 인물이 반반한 소년 노예를 집안에 들여 성년이 될 때까진 일을 시키고, 그 이후로는……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한다고.

적어도 일 년간은 시중들 일이 없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잠자리 시중을 들 때가 되면, 그건 그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도망을 가든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든지, 아님…… 시중을 들든지. 방법은 많으니까.

그렇게 그는 헤르시스에서 케인으로 이름을 바꾸고 스스로 노예상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행히도 밤 시중을 들 일이 없는 여인의 손에 떨어졌다.

그녀는 순전히 사이가 안 좋은 여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금액을 올렸고, 그렇게 비싼 값에 낙찰한 자신을 손도 안 대고 딸에게 주었으니.

그 딸이 바로,

“너였어. 리즈 베리움.”

***

길 끝에서 불어온 바람이 다시 한번 리즈의 로브 자락을 흩날렸다.

옷 속으로 스며든 추위에 리즈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자 케인이 제 로브를 벗어 리즈의 등에 한 겹 더 둘러 주었다.

로브 때문인지, 아니면 제 어깨를 그러쥔 커다란 손의 온기 때문인지, 리즈는 그의 과거사로 무거워진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걸 느꼈다. 그래서 물어볼 용기가 생겼다.

“황궁에는 언제 돌아가실 생각이세요?”

“글쎄.”

글쎄라니.

리즈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지금쯤이면 황궁에 복귀할 준비를 슬슬 하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즉위가 반절기도 채 남지 않았는데.

“돌아가실 생각으로 절 여기에 데려오신 거 아니었어요?”

“응. 아니야.”

리즈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짙어질 때쯤 케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냥 오랜만에 보고 싶기도 하고, 또 그대가 어떻게 내 본래 신분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하고……. 겸사겸사.”

이쯤 되니 리즈는 슬그머니 불안해졌다.

“설마, 안 돌아가실 생각은 아니죠?”

“…….”

대…… 대답이 없다!

리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케인에게서 침묵은 대체로 긍정의 표시이므로.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남자, 원작에서처럼 황실에 복귀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지 않다.

‘어…… 어째서?’

리즈의 보랏빛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때, 나직한 음성이 어둠을 뚫고 리즈의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내가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어?”

“…….”

이번엔 리즈 쪽에서 침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내 생각이 뭐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물었으니 굳이 답을 말하라 한다면…….

‘네. 완전요.’

하지만 왠지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글쎄요.”

“…….”

“좀 서운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뭐 어쩌겠어요? 이게 다 대의를 위한 일이니, 서운함은 접어 두고서 전하의 앞날을 응원…….”

“서운…… 할 것 같나? 내가 떠나면?”

어느새 돌려세워진 리즈의 눈에 달빛을 받은 케인의 수려한 얼굴이 보였다.

‘요지는 그게 아닌데…….’

하지만 남국의 바다처럼 새파랗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리즈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말았다.

“아마도…… 요.”

“그럼 됐어.”

케인의 입꼬리에 맺힌 잔잔한 미소가 리즈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되긴 뭐가 됐다는 거지? 설마 이대로 계속 우리 집에 눌러살겠다는 건가?’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다.

원작의 남주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행보였다.

리즈는 혹시 제가 원작을 잘 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끼익-.

육중한 철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먼 곳에서부터 자갈 짓이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황궁을 빠져나오는 마차 소리임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마차를 타고 퇴궁할 만한 사람이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명 대귀족 이상일 테다.

조금 당혹스럽긴 했지만, 여유를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 이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의 남자에게서 흑발에 금안의 황태자를 유추해 낼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아……!”

리즈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케인의 한쪽 눈동자를 가리켰다.

“누, 눈이…… 전하의 눈이…….”

짝짝이가 되어 있었다!

“아…… 그렇군.”

케인이…… 아니, 황태자가 태연하게 눈꺼풀을 매만지며 대꾸했다.

마치, 눈꺼풀에 뭐가 붙었다는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그렇게 매만진 손을 떼고 감은 눈을 동시에 떴을 때, 그 눈은 더 이상 짝짝이가 아니었다.

큰일 났다.

‘하필이면 왜 지금…… 여기서 돌아오는 거야?’

리즈는 고양이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금색 눈동자 한 쌍을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무는 헐벗었고, 자신들은 외길 한가운데 있었다.

마차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며, 이제 막 길 끝에서 갈색 말 두 마리의 머리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숨을 데가 없었다.

부디 마차에 탄 사람이 황태자의 모습을 알아볼 만한 자가 아니길 바라는 것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사륜마차는 이쪽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리즈가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음을 알아차린 건 마차 앞머리의 황금색 문장을 발견했을 때였다.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창공을 나는 형상의 문장.

바로 몬타네르 대공을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맙소사!”

기가 막힌 상황에 리즈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이성을 잃고 자멸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빨리 숨어요!”

리즈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남자에게 말했다.

그는 이제 완전히 황태자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왜 숨어야 하지?”

더없이 평온한 얼굴과 차분한 목소리가 백여 미터 앞으로 다가온 몬타네르 대공의 마차보다 더 리즈를 기막히게 만들었다.

“왜라뇨? 지금 저기에…….”

리즈가 손가락으로 마차가 있던 곳을 가리켰다.

마차는 그곳에 없었다. 그곳보다 훨씬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게다가 벽면 모서리를 따라 등불도 몇 개 달려 있었다. 그 등불은 이 가도를 지나가면서 분명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출 터였다. 그것도 아주 환하게.

황태자는 들키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무심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리즈는 도저히 그를 이대로 놔둘 수 없었다.

여전히 두려운 남자였지만 이런 식으로 들켜서 끌려가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전하.”

리즈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무례를 범해도 죽이지 마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리즈는 남자의 가슴을 짚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그래도 키가 안 닿아서 그의 셔츠 앞섶을 움켜쥐곤 확 끌어당겼다. 그러자……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

마차가 지나가며 비춘 등불이 그의 너른 등짝과 바람에 흩날리는 리즈의 적발을 훑고 지나갔다. 마차의 탑승자는 이 상황을 달밤에 산책 나온 연인들의 밀회라 여긴 게 분명했다.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듯이 제 갈 길을 가는 걸 보면.

다시 어둠이 찾아오고, 평온도 찾아왔다. 이제 입술을 떼도 될 것 같았다. 근데 이 남자, 왜 놔주지 않는 거지?

왜 발끝이 공중에 달랑 들릴 정도로 몸을 옭아매곤 입술을 마찰시키는 거야?

게다가 벌어진 입술 속을 탐색하는 이 몰캉한 것은 또 뭐지?

리즈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이…… 이게 아닌데.’

이 이상 가면 상당히 위험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았는데…… 좀처럼 밀어낼 수가 없다.

키스가…… 너무 감미롭다!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은 무척이나 야릇하고, 고개를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기울일 때마다 스치는 콧날은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이다.

하지만 역시…… 이러면 안 돼.

“그…… 그만!”

리즈가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상당히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음을 알게 된 건 굶주린 짐승처럼 사나워진 금색 눈 한 쌍과, 누구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발견한 뒤였다.

리즈는 그 모습이 상기시키는 야릇한 잔상을 지우려 몇 차례 도리질을 했다.

“이…… 이제 마차 지나갔어요.”

“그렇군.”

‘그게 왜?’라고 말하는 듯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그가 입술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 태도가 다시 한번 리즈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진짜 들키기로 작정했어요? 거기 그대로 서 있으면 어떡해요?”

“왜 들킨다는 거지?”

왜라니?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 건가?

“숙부는 섭정이야. 웬만해선 황궁을 비우지 않지. 특히 밤에는 더더욱. 만약 그가 황궁에서 나와야 할 일이 있다면 후문으로 몰래 빠져나오지, 정문으로 당당히 나서진 않아. 저 안에 있는 건 기껏해야 그의 가신 중 한 명이겠지.”

“아…….”

아무것도 모르는 건 리즈 자신이었다.

아무튼 다행이다…… 잠깐, 이게 아니잖아?!

“그걸 이제 말해 주면 어떡해요?”

“안 물어봤잖아.”

뭐라 반박할 말이 없어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으려니 그가 물었다.

“그래서…… 후회되나?”

눈빛이 아까보다 많이 온순해졌다. 목소리엔 언뜻 긴장감이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대답 여하에 저 긴장이 풀어지냐 마느냐가 달린 거 같은 느낌은 역시 착각이겠지?

“당연히…….”

후회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이번에도 그렇게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잘 모르겠네요.”

리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잘 모르겠다…….”

그가 리즈의 말을 진중하게 되뇌었다. 그러더니, 돌연 나른해진 눈빛으로 리즈의 허리를 휘감았다.

“잘 모르겠으면 한 번 더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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