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남주의 시련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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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남주의 시련은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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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남주의 시련은 필수다?
2023.07.07.
성인이 될 때까지 숙부가 섭정을 맡는 것에 헤르시스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자 구원자였으므로.
“게다가 숙부는 정말 다정했지. 날 정말 사랑하는 게 느껴졌어.”
숙부는 항상 어린 조카를 곁에 두었다.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뭘 먹으면 탈이 나고, 뭘 무서워하는지. 조카에 관한 건 전부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아이는 기꺼이 다 말해 주었다.
하나뿐인 가족에겐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느 누구 하나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 준 보호자에게 무엇을 숨기고 싶겠는가.
“원한다면 간도 빼 줬을 거야. 물론, 그가 진짜 원한 건 고작 내 간 정도가 아니었지만.”
그의 숙부는 스승으로서의 자질도 훌륭했다.
모든 지식에 해박했고 모든 무예의 달인이었다.
헤르시스는 그에게 배우는 걸 좋아했고, 그도 조카를 손수 가르치길 좋아했다.
특히 검술은 숙부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아, 근데 스승으로서의 그는 조금 혹독하더군. 봐주는 법이 없었어.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제법 짙은 상흔이 살갗에 남곤 했지.”
그나마 연습용 검일 땐 괜찮았다.
아홉 살이 되면서 몬타네르 대공은 대련 중에도 진검을 들게 했는데, 진검이라고 봐주는 일은 더 없었다.
어떨 땐 숙부가 저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아니야. 나를 친아들처럼 아끼는 숙부가 그럴 리 없어. 이건 그저 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훈련일 뿐이야. 그러니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너무나 착하고 순수했던 헤르시스는 의혹을 간단히 물리쳤다.
해를 거듭할수록 숙부의 훈련 강도는 점점 강해졌다. 이 모든 게 황제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다른 황제들도 다 그렇게 했다고 해서 헤르시스는 그대로 믿었다.
시찰을 다닐 때도 호위 하나 붙여 주지 않았다.
호위를 붙이면 신분이 들통난다고, 그럼 오히려 위험하다고 하는 다소 터무니없는 그 말도 의심 없이 믿었다.
덕분에 그는 몇 번이나 싸움에 휘말리고, 불시에 날아드는 화살을 몇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피해야 했는지 몰랐다.
“한 번은 조금 늦게 피하는 바람에 다리에 상처가 났지. 다녀와서 그걸 본 숙부는 곧 새로운 훈련을 추가했어.”
대공은 유능한 살수를 고용해 평상시에도 호시탐탐 조카를 노리게 했다.
후계자는 절대 죽어선 안 된다며, 그러기 위해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덕분에 그의 감각은 칼날처럼 예민하게 벼려졌지만, 덤으로 불면증을 얻었다. 마음 놓고 자 본 게 까마득한 옛날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매일같이 새로운 한계를 갱신해 가던 어느 날,
‘블레니르 의식에 관한 저서를 서고에서 좀 찾아보시겠습니까?’
한바탕 격전을 치른 검술 시합 뒤, 숙부가 조카에게 말했다.
생애 처음으로 숙부를 이겨서 잔뜩 흥분해 있던 터라 헤르시스는 숙부가 제게 찾아보라고 한 것이 무엇인지 퍼뜩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초겨울 바람에 증발하여 머리의 열기를 앗아 가자, 그제야 흥분이 가라앉으며 숙부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블레니르 의식.
갓 성년이 된 후계자가 황제에 즉위할 경우 치르는 의식이었다.
수사슴의 피를 가득 담은 욕조에 들어앉아 신전에서 일러 준 번식을 기원하는 주문을 외운 뒤, 마지막으로 그 욕조 물을 몇 사발인가 들이켜는 것으로 끝맺는……. 아무튼 즉위를 준비하라는 말이었다.
‘이제 일 년만 있으면 열여섯이니 슬슬 준비하셔야죠. 안 그렇습니까?’
대공은 말했다. 지금 앉아 있는 황제 대리의 자리에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이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서.
헤르시스는 그 길로 곧바로 황궁 서고로 달려갔지만, 즉위 의식에 관한 저서는 거기 없었다.
그 저서는 불에 태워지기 직전의 책들만 모아 놓은 창고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탓에 표지를 알아보기도 힘들었지만, 아무튼 찾아냈고 읽으려고 펼쳐 들었다. 그런데 그 아래 놓인 책 한 권이 유독 그의 시선을 끌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혀 눈에 띌 만큼 특징 있는 책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시선이 갔다.
그것이 익숙한 향 때문이라는 건 그 책 사이에 꽂힌 종이 한 장을 펼쳐 들었을 때에야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늘 쓰시던 장미 내음 가득한 향수. 그 향이 사라지지도 않고 그 편지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거야.”
필체 또한 어머니의 것이 틀림없었다.
명백하게 아들인 헤르시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어떻게든 아들이 자신의 편지를 읽게 하기 위해 어머니는 자신의 향수를 묻혀 둔 것이었다.
병세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시점에서 쓴 듯 글씨는 희미하고,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삐뚤빼뚤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어머니의 편지를 발견하고 읽는 데서 오는 감동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했다.
“그립고, 아련하고, 연애편지를 읽는 것처럼 설렜어.”
하지만 그런 애잔한 감정들은 글을 읽어 내려감과 동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 글을 읽는다는 건 네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겠지, 헤르? 나이는 아마 열다섯쯤 되었을 테고.
이쯤 됐으면 네 숙부도 널 죽이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을 게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죽여? 숙부가 나를? 왜?’
겨우 이해되기 시작한 건 같은 대목을 다섯 번째로 읽었을 때였다.
“사실 그 순간에도 믿어지지가 않았어. 다섯 번이 아니라 열 번, 백 번이라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았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숙부가 제 부모님을 장기간에 걸쳐 중독사시키고, 자신 또한 암살이나 사고사로 위장하여 죽일 거라는 끔찍한 사실을.
자신을 보던 인자한 눈빛, 대련 중에 다친 상처를 손수 치료해 주던 다정한 손길. 그게 어떻게 죽이고 싶은 인간을 향한 태도일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필체가 위조되었거나, 어머니가 병세로 정신이 흐려지셨거나.
“놀랍게도 어머닌 그 점까지 내다보셨더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하단다, 헤르. 잘 생각해 보아라. 네 숙부의 모습에서 정말로 이상한 점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니?」
그러자 그제야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자신을 위한다며 혹독하게 몰아붙이던 숙부의 눈에 순간순간 번뜩이던 살기.
헤르시스는 분명히 보았고 느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그때 대련을 빙자해 나를 죽일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미처 억눌러지지 못한 욕구가 표출되어 나온 것이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중요한 건 그가 나를 제거할 마음이 없진 않다는 사실이었지.”
하지만 그럼에도 헤르시스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자신이 이렇게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최근엔 그와 검술 대련에서 이기기까지 했으니 이제 조금쯤은 포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심하진 말거라, 헤르. 네 숙부는 어릴 적부터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자였다. 그 집념을 과소평가한 대가를 나는 이렇게 톡톡히 치르는구나.」
얼마 후 그는 어머니의 염려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올해 마상 창 시합은 좀 다르게 진행해 볼까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예식을 생략하는 거지요.’
예식을 생략하자는 말은 투구를 벗고 관중들에게 예를 갖추는 과정을 생략하자는 말이었다. 즉,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합하자는 뜻이었다.
‘제아무리 장내에선 동등한 입장이라 하나, 아직까진 평민이 대귀족을 상대로 전력을 다하기가 쉽지 않죠. 하물며 제 영주와 맞붙기라도 하면 보복이 두려워 어찌 쓰러뜨리겠습니까? 하여 형평성을 도모하기 위해 익명 시합을 요청하는 바이니 부디 고려해 주십시오, 전하.’
그의 반짝이는 눈빛에서 헤르시스는 숙부가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하지 않을 걸 확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기야 그리 확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가 아는 조카는, 황태자라는 신분을 걷어 내고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승부하여 두 배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지 않을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당시의 헤르시스는 열다섯 살, 불과 며칠 전에 위대한 스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저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있었으니.
‘숙부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마상 시합 중에 일어난 죽음은 살인이 아니라 패배로 친다는 걸 헤르시스는 너무 잘 알았다. 더불어 패배자는 약자라는 시대를 불문한 논리도 함께.
“나는 숙부의 의도를 전부 파악했지만 승낙해 주었어.”
절반은 다른 계획 때문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죽을 때 죽더라도 전력으로 숙부와 싸워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몬타네르 대공은 마상 창 시합에서 다섯 번이나 우승했고, 헤르시스는 창술로는 한 번도 그를 이겨 본 적이 없었다.
검술로는 한 번 이겨 보았어도…… 아니, 그것도 사실 진짜 이긴 건지는 이제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가 조카를 방심하게 할 요량으로 일부러 져 준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헤르시스의 내면에서 두 마음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이기든 지든 정정당당하게 겨루느냐. 아니면…… 비겁하게 도망치느냐.
“결국엔…… 보다시피 후자를 택했어.”
시합장으로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어 경계가 느슨해져 있을 즈음, 그는 황궁에서 도망쳤다.
「반드시 황제가 되거라. 헤르.」
황제가 되려면 일단 살아남아야 하고,
영광스러운 승리가 제게 삶을 보장해 주지는 못할 테니 그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아니면, 진짜 두려웠는지도 모르고…….
***
“……그렇군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리즈는 단지 그렇게만 말했다.
‘이런 걸 듣고 싶었던 건 아닌데.’
어두운 기억을 공유하니 리즈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몬타네르 대공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건 알았지만, 자세한 사정까진 알지 못했다.
책에 나온 글은 얼마나 단편적인지. 그저 ‘황위가 욕심난 숙부가 제 조카를 음해하려 했다’ 이 한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고달픔이 생략되어 있는지 리즈는 미처 알지 못했다.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시련은 그저 그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필수적인 설정 정도라고만 생각했는데, 정작 시련을 겪어 온 그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전생에 어장 관리남에게 버려진 경험, 그리고 환생 후 유년 시절 어머니에게 방임당한 기억 하나로 제 삶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리즈는 새삼 부끄러워졌다.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에 리즈가 고개를 스르르 떨구었다.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알지 못했다. 위로의 말을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건 한없이 비루한 말들뿐이었다.
‘힘내요. 그래도 살아남았잖아요.’
말재간이 좋은 릴리아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 텐데.
그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면 되는지, 어떻게 해야 과거의 상처에서 조금이라도 헤어날 수 있는지 잘 알 텐데.
후우-.
심란해진 리즈는 발끝으로 자갈을 짓이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돌연 케인의 손이 그녀의 턱을 조심스레 받치더니 위로 치켜올렸다. 그러곤 입매에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뒷이야기가 더 있는데, 한번 들어 볼래?”
아니요. 싫어요.
이어진 말이 없었다면 그렇게 대답했을 터였다.
“너에 관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