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달밤의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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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달밤의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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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달밤의 나들이
2023.07.06.
귓가를 간질이는 달콤한 속삭임이었지만, 악마의 속삭임도 달콤하다 그랬다.
어쩌면 이 배려가 일종의 사형수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리즈는 머리에서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이 남자 진짜 짐승인 걸까? 어둠 때문에 하나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내려가는 거지?
불안함과는 별개로 리즈는 신기했다.
전생으로 따지자면 적외선 카메라라도 눈에 장착한 듯 그의 걸음걸이는 거침이 없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출구에 도달했고, 리즈의 발도 땅에 닿았다. 그러고 난 뒤 야간 당직을 맡은 시중인들의 눈을 피해 정문으로 이동했고, 정문에선 문지기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스킨십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 맞닿지 않은 적이 없었다. 손이 아니면 어깨를, 어깨가 아니면 허리를 잡는 식으로.
그들의 몸이 떨어진 건 딱 한 번뿐이었다.
그가 미리 준비해 한쪽 구석에 매어 둔 말을 끌어오기 위해 잠시 리즈를 혼자 두었을 때.
“말 타고 가게요?”
고급 마구가 장착된 늠름한 밤색 말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며 리즈가 물었다.
“마차를 타면 너무 눈에 띄니까.”
케인이 대답했다.
대체 어디를 가기에 말까지 타는 걸까. 설마…… 좋은 무덤 자리라도 봐 둔 걸까.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리즈는 순간 제 몸이 공중에 번쩍 들어 올려진 걸 깨달았다.
케인이 그녀를 말안장에 올려 주고 나서 자신은 등자를 밟고 그 뒤에 올라탔다.
2인용 안장이라 비좁진 않았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어색해 리즈는 자꾸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그것도 이내 소용없어졌다.
케인이 고삐를 쥐면서 리즈는 그에게 완전히 안긴 모양새가 되고 말았으니.
두 사람을 태운 말은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밤거리를 시원하게 달렸다.
다가닥-, 다가닥-.
말발굽이 지표면을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달빛에 색깔이 옅어진 붉은 벽돌 건물도 운치 있었다.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도 그리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노천 온천에라도 들어온 듯 상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리즈의 불안은 그렇게 잠시 동안 잊혔다.
반 시간쯤 달린 끝에 케인이 말고삐를 천천히 당겼다. 말이 습보에서 구보로, 구보에서 속보로 속도를 늦추더니 결국 멈춰 섰다.
케인이 먼저 날렵한 동작으로 바닥으로 뛰어내리곤 리즈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올릴 때도 이런 식이더니.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과한 배려가 불편한 리즈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케인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알아. 그냥 내려 주고 싶었어.”
그 말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말끝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존댓말 쪽이 더 불편하던 차에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정면에서 바람이 불어와 리즈의 후드를 젖혔다.
잔뜩 당겨 묶은 머리는 어느새 느슨해져 잔머리를 내놓고 있었다. 리즈는 삐져나온 잔머리를 정돈하느라 작게 투덜댔다.
그녀의 얼굴엔 불안감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죽일 땐 죽이더라도 이곳은 아니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타고 달리며 언뜻 보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하지만 리즈는 아무것도 못 본 사람처럼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케인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그러쥐고서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자 리즈가 조금 전에 언뜻 본 광경이 완전히 눈에 들어왔다.
헐벗은 마로니에 가로수 길. 그 끝에 위치한 높다란 철문.
그리고 그 너머 아득히 보이는 고풍스럽고도 웅장한 상아색 건물. 신비스럽고 장엄한 황금 돔 지붕과 보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뾰족한 첨탑 한 쌍을 양옆에 호위병처럼 거느린 곳. 바로 황궁이었다.
그 황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케인이 말했다.
“저기가 내 집이었어.”
“…….”
“그리고…….”
그 웅장함에 도취되어 멍하니 황궁을 바라보고 있는 리즈의 귓전에 또 한 번의 속삭임이 날아들었다.
“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
리즈는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을 감추기 위해 온 힘을 끌어모아야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뭘 알아요?”
하지만 그런 제 의지를 배신하고 목소리엔 희미한 떨림이 묻어나고 말았다.
케인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리즈를 마주 보고 섰다. 그는 리즈의 표정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물었다.
“기억 안 나? 내가 그대의 방에서 뛰어내렸던 그날, 그대가 내게 이렇게 말했잖아.”
‘전하께서 다 해결하세요.’
리즈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아니. 애초에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니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리즈는 다시 한번 시치미를 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너무 많은 것을 표정에서 다 드러내 버렸다.
“말해 주지 않겠어? 내가 십 년 전에 사라진 황태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당연히 대답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책을 보고 알았다…… 라고 말하는 건 정말 미친 짓이니까.
그럼 뭐라고 말해야 하지? 뭐라고 말해야 이 남자를 조금이나마 납득시킬 수 있지?
리즈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적당한 핑곗거리가 떠오른 건 그의 눈이 불길하게 가늘어지려던 찰나였다.
“초상화요.”
“…….”
“일전에 베르그송 부인 댁에 갔을 때 보았어요. 선황 폐하 내외분의 초상화가 그 댁 전시실에 걸려 있었거든요. 그걸 보고 알았어요. 전하의 본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서.”
사실 리즈는 그런 초상화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광적인 수준의 미술품 수집 대가인 베르그송 부인 댁엔 없는 그림이 없고, 없는 초상화가 없으니 선황 부부의 초상화도 분명 있을 터였다.
시의적절한 기지였다. 딱 하나를 제외하면.
“두 분 중 어느 쪽?”
케인의 날카로운 질문에 리즈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초상화를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없었다.
리즈는 얼른 원작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없어. 기억에 없다고!’
어느 한쪽을 많이 닮았다는 것 말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하나를 찍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겠지?’
보통, 중세풍 소설 속 남주들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으니까.
리즈는 달싹이던 입술을 결연하게 꾸욱 다물더니, 곧 대답을 말했다.
“어머니요.”
왜였을까?
막판에 입술이 제멋대로 오므려지더니 생각과 전혀 다른 대답을 토해 냈다.
‘망했다…….’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케인의 눈동자에 리즈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수습할 말이 없었다.
“그렇군.”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굳어 있던 미간이 천천히 풀어졌다.
그는 정말로 어머니를 닮은 것이었다!
케인이 의심을 거두고서 다시금 황궁으로 눈을 돌렸다.
그 틈에 리즈는 티 나지 않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기적 같은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잠시 뒤, 리즈는 상당히 진정된 얼굴로 그와 시선을 나란히 했다.
멀리 보이는 황금 돔은 달빛 아래 은색으로 보였지만 그 가치가 결코 낮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고대 신전처럼 더욱 은은하고 신비스러운 기운을 자아냈다.
거대한 철문은 절대로 아무나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듯 드높은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그 앞을 지키는 두 근위병은 날카로운 창을 들고선 동상처럼 꿋꿋이 서 있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황궁의 전경에 가만히 젖어 들려는 찰나,
“고작 일곱 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걸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었어.”
***
헤르시스는 일곱 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여의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었으니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딱히 이유랄 것도 없이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쇠약해진 몸이 예정된 수순을 거쳐 죽음에 이르렀을 뿐이었다.
어린 헤르시스는 날마다 부모님을 찾아가 손을 잡아 드리고, 책도 읽어 드리고, 노래도 불러 드렸다. 병자에게 가장 힘이 되는 것이 그들이 사랑하는 존재가 불러일으키는 희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희망이 가져다준 기적의 사례를 정독하며, 그 기적에 한 가지 더 사례를 추가할 수 있길 어린 소년은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
그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내가 그분들에게 있어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은 그때도 지금도 들지 않아. 다만 기적을 일으키기엔 너무 멀리 갔던 거지.”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황 내외의 몸 상태는 꾸준히 나빠졌다. 명약이란 명약은 다 갖다 바치는데도 도무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린 헤르시스는 날마다 눈 뜨는 게 무서웠다.
오늘은 또 얼마나 피를 토하실까, 눈 밑 그림자는 얼마나 짙어져 있을까.
점점 반듯해지는 글씨, 늘어 가는 검술 실력을 더는 보실 수도 없을 정도로 부모님의 시력이 약해지고,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인 순간이 결국 찾아왔다.
부모님을 알현하지 않는 시간에 그는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기도를 했다.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주실 줄 알았다. 신들은 어린아이의 기도에 기쁘게 응답해 주신다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인생 가장 열렬하고 절실한 기도를 올린 날, 그의 부모님은 나란히 죽음을 맞이하셨다.
그가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을 때 본 것은, 사이좋게 손을 꼭 잡고서 평온하게 잠든 듯 누워 있는 제 부모님의 파리한 육신뿐이었다.
“슬퍼해야 마땅한데 그 순간엔 배신감이 들었어.”
당시의 감정을 말하는 그의 어조엔 절제된 슬픔이 스며 있었다.
“나만 두고 두 분이 사이좋게 멀리 가신 거야. 꼭 식탁에서 두 분이 내가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대화를 나누셨을 때처럼, 그렇게 따돌려진 기분이 들었지. 두 분의 대화에 끼고 싶어 밤새워 책을 읽고 공부도 했는데, 그런데도 버려졌구나…… 싶더군.”
그 생각은 한동안 어린 소년의 머리와 가슴을 지배했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며칠 후 선황 부부를 황실 묘소에 안치하고 돌아온 직후, 그는 비로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한 상실의 아픔과 직면하고서 깊은 슬픔을 느꼈다.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조차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기묘하리만큼 낯선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조금만 실수해도 친척들은 후계자 자질을 거론해 댔고, 원로 대신들은 감당하기 힘든 난제를 안기며 그를 몰아붙였다.
어린 소년은 그 모든 상황을 제 탓으로 돌렸다.
“내가 부족해서 이런 취급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지 않고서야 부모님 살아생전에 내게 그토록 호의적이던 이들이 한순간에 달라질 리 없다고 믿었으니까.”
그 외에 다른 이유를 생각하기에 일곱 살 아이의 마음속은 너무 순수했다.
어린 헤르시스는 점점 의기소침해졌고, 눈치를 살피게 되었고, 예민해졌다.
그런 그를 따스하게 감싸 준 사람이 바로 그의 숙부, 몬타네르 대공이었다.
‘가엾은 전하. 이젠 나만 믿으세요. 제가 당신을 지켜 드리리다.’
겁먹은 새끼 짐승이 혈육을 의지하는 것 말고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 숙부를 믿었어. 결국은 그가 가장 못 믿을 인간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