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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우리 아가씨 다치면 안 되니까 (35/65)


#35화 우리 아가씨 다치면 안 되니까
20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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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과 로레인 귀족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리즈는 거의 처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갑자기 나타날까 봐 혼자 있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미라벨을 잡아 두려 애썼다.

“미라벨, 조너선과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어?”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그…… 랬나?”

생각해 보니 그렇군. 흘려들어서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럼, 둘이 어디까지 나갔어? 뽀뽀는 물론 했겠지? 키스는?”

“그것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아직…….”

손밖에 못 잡아 봤다고 했었지. 딱히 믿어지진 않았지만. 아…… 그럼 이제 무슨 말로 어떻게 더 잡아 둔담?

“아가씨, 죄송한데 아래층에서 신입 시중인들 교육 좀 시켜야 해서요.”

미라벨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리즈는 더 난감했다.

“그거 모니카 시키면 안 되는 거야?”

“모니카는 따로 마님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요. 제가 해야 합니다. 제 오랜 업무이기도 하고요.”

“그…… 그래.”

미라벨이 얼마나 책임감 강한 성격인지 잘 아는 리즈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럼 나가 봐.”

“이따 일 끝나면 또 들를게요. 잠깐만 쉬고 계세요.”

평소답지 않게 아가씨가 붙잡아서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볼 만큼 미라벨은 여유롭지 않았다. 그녀는 아가씨가 심심하셔서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서 처소를 나갔다.

미라벨이 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리즈는 재빨리 문을 잠갔다.

그걸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창문도 모조리 잠그고 커튼까지 꼼꼼히 쳤다.

지난번에 보니까 삼 층을 일 층처럼 뛰어내리던데, 삼 층을 일 층처럼 뛰어오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렇게 빛 한 점 들지 않는 폐쇄적인 암흑 상태로 만들고 나서야 리즈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침대에 털썩 누워 그녀는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벌써 한 절기의 삼분의 이가 지나갔다.

조금만 더 있으면 황태자도 황궁으로 돌아간다.

후계자가 실종된 지 만 십 년이 지나면 죽은 것으로 간주해 다음 계승권자에게 황위가 넘어가게 되니까, 그 안엔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황위를 포기할 게 아니라면.

황위를 포기할 게 아니라면…….

“에이,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리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떨쳐 버렸다.

아무튼 이 갑갑하고 숨 막히는 생활도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나마 견딜 만하지만, 그래도……. 삼십 일은 너무 길다.

‘좀 빨리 돌아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전하? 이왕이면 당신의 여주까지 모시고요.’

그렇게만 되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제 오랜 숙원인 결혼도 생존을 위한 간절함 앞에선 빛을 잃었다.

리즈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협탁에 놓인 물을 한 컵 주욱 들이켰다.

꿀꺽꿀꺽. 식도를 시원하게 통과하는 느낌이 났지만…… 느낌뿐이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최근 들어 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가시질 않았다.

리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위치한 고동색 물푸레나무 콘솔로 다가갔다.

거기엔 미라벨이 가져다 둔, 레몬 한 조각을 띄운 냉수를 가득 담은 주전자가 항상 있…… 어야 하는데, 왜 비어 있지?

‘아…… 이런.’

리즈는 불과 반 시간 만에 제가 주전자 한 통을 다 마셔 버렸음을 깨달았다.

할 수 없었다. 리즈는 종을 울렸다.

한 번, 두 번.

두 번 울리면 미라벨, 세 번 울리면 케인이었다. 자신과 하인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빙의를 깨달은 이후로 종이 세 번 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영원히.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종을 울리고 막 돌아섰을 때였다.

‘빠르기도 해라. 근처에 있었던 건가, 미라벨?’

리즈는 아무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허억!

문고리를 잡지 않았다면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아…… 그…… 저…….”

눈앞의 상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어버버하니 그가 말했다.

“그냥 케인이라고 불러요. 아가씨.”

붙임성 있는 말투, 생글거리는 미소.

항상 봐 오던 케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목소리와 표정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리즈는 이제 더 이상 그를 케인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네.”

“문은 왜 잠그고 있었어요?”

케인이 물었다.

리즈는 그럴싸하면서도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대답을 찾으려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문 잠긴 건 어떻게 알았어…… 요? 문고리 돌리는 소리 안 났는데…….”

“그냥 느낌으로.”

느낌으로 그런 것도 알 수 있구나.

리즈는 이 남자를 알면 알수록 두려워졌다.

“일단…… 들어오세요.”

여기서 이렇게 얘기하기엔 그의 비밀이 너무 무거우니까.

하지만 그가 웬일로 거절했다.

“됐어요.”

“……?”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방에 들어가지 않을게요. 대신, 나랑 좀 갈 데가 있어요. 그 말 하러 왔어요.”

“가…… 갈 데가 어딘데요?”

‘혹시 나를 집 말고 밖에서 해치우려고?’

리즈가 공포감이 스며들기 시작한 눈빛으로 물었다.

“가 보면 알아요.”

“지금…… 요?”

케인이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따 밤에. 다들 잠들었을 때 몰래 갈 거야.”

“아…….”

다들 잠들었을 때…… 몰래…….

“이따 열한 시에 데리러 올게요.”

케인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찡긋해 보이고 돌아섰다.

하마터면 안도할 뻔했다.

그 장난기 감도는 모습이 도무지 자신을 해코지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그가 공터에서 불량배들을 처치할 당시 어떤 표정이었는지를 상기하자 다시 팔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케인이 몇 걸음 걷다 말고 다시 돌아섰다.

“문 잠그지 마요. 알았죠?”

그 말이 마치, 잠겨 있으면 부수고라도 들어갈 거라는 말처럼 들렸다. 리즈는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 같았다.

“네…… 그, 그럴게요.”

떨림이 고스란히 밴 목소리로 대답하며 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몇 번이나.

***

리즈는 열한 시가 되기 두 시간 전부터 불안에 떨었다.

초침이 한 칸씩 움직일 때마다 심장 박동도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가는 게 그렇게나 무서울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다른 사람 처소에라도 들어가 함께 잠을 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족이 없었다. 릴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는…….

어머니랑 같이 한방을 쓰느니 차라리 케인을 상대하는 쪽이 나아 보였다.

마침내 시계가 열 시 반을 가리켰을 때, 리즈는 체념하곤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곤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어 넘겨 하나로 질끈 묶었다. 옷은 간편하고 활동하기 좋은 것으로 입었다. 그가 그녀를 무도회 같은 곳에 데려갈 생각은 아닌 게 확실하므로.

준비를 끝마친 다음 리즈는 침대에 걸터앉아 얌전히 케인을 기다렸다.

온 신경이 문 쪽에 가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조그만 소리 하나에도 몸이 절로 굳었다.

어쩌다 삐걱하고 가구가 팽창하는 소리라도 들리면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도 들었다.

이대로는 무리다.

케인의 손에 죽기 전에 신경 쇠약으로 죽을 것 같았다.

일순 자책감도 들었다.

‘이 바보야. 정체를 알아차리자마자 도망부터 갔어야지.’

하지만 케인의 본모습이 가진 어마어마한 감을 몰랐다면 모를까. 눈으로 직접 확인까지 한 이상 도망이라는 선택지는 그리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금세 잡힐 것 같았다. 자신이 리즈 베리움으로 있는 한, 분명히.

마침내 들려온 발소리에 리즈의 얼굴색이 달빛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투둑-, 투둑-.

융단을 밟고 복도를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는 이제 막 열한 시를 넘어가는 초침에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듯 절도 있고 묵직했다.

걸음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고 있었다.

리즈는 제 심장이 이대로 흉곽을 뚫고 튀어나오지 않을까 궁금할 지경이었다.

너무 세차게 뛰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노크 소리가 들리면 기절할 것도 같았다.

차라리 제 쪽에서 먼저 열어 버리는 게 나을 듯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샌가 문고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

벌컥-.

케인이 노크를 하려던 포즈 그대로 손등을 내보인 채 정지해 있었다.

예상외의 과감함에 놀랐는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눈매를 초승달처럼 접어 웃으며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그…… 그런 의도가 아닌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마음은 조금 안정되었다.

“진작 올 걸 그랬네? 이렇게 나 기다리는 줄 알았으면.”

“…….”

“시간이 너무 안 가더라고.”

그가 정말 기다리기 지루했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나는 시간이 너무 빨리 가던데.’

하지만 리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준비된 거 같은데 나가요.”

케인이 리즈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곤 제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분명 부드럽게 끌어당기는데도 리즈는 속절없이 딸려 갔다.

불이 꺼진 복도는 어두컴컴했고,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이 층에는.

“아래층에도 별로 없어요.”

케인이 불안해하는 리즈에게 생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는 로브를 두르고 있었고, 아직 후드는 쓰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든 또 다른 갈색 로브를 리즈의 등 뒤로 둘러 주곤 머리 위로 후드를 씌워 주었다.

“……어딜 가는데요?”

리즈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다정한 행동으로 봐선 죽일 것 같지 않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따라와 보면 알아요.”

케인이 씩 웃으며 말하고선 리즈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엔 손목이 아니라 손 전체를 감쌌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 리즈의 자그마한 손은 다 들어오고도 남았다.

케인은 리즈를 중앙 계단이 아닌 다른 통로로 이끌었다. 그곳은 시중인들이 오물을 버리기 위해 다니는, 일명 ‘오물 계단’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습하고 눅진한 냄새가 났다.

게다가 너무 어두웠다. 등불을 들고 있지 않은 탓에 눈앞이 계단인지 평지인지도 알기가 힘들었다. 리즈가 불안하게 걸음을 떼려는 그때,

“으앗!”

케인이 리즈를 번쩍 안아 들고 들짐승처럼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씨 다치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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