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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계획적인 고백 (34/65)


#34화 계획적인 고백
202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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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는 요즘 따라 릴리아의 신경이 날카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늘 온화하고 다정한 아가씨였는데, 요즘만큼 대하기 어려울 때가 없었다.

리즈에게 뺨을 맞은 여파 때문일까?

아니다. 제가 아는 릴리아 아가씨는 그 정도 역경에 기분이 좌우될 정도로 약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난은 사람을 현명하게 만든다며 언니의 구박을 반기는 아가씨였다.

그렇다면 설마…….

‘내가 목걸이 사건의 진범인 걸 알아차린 걸까?’

아가씨를 모신지 일 년.

모니카 그녀가 골라 주는 장신구만 착용하는 아가씨는 제가 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는 보석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했다.

베르트 소공작이 보내온 에메랄드 목걸이도 그중 하나였다.

아니, 그 목걸이는 다른 것들보다 특별히 더 신경 쓰지 않았다. 받은 첫날, 감동한 얼굴로 소공작의 앞에서 목에 걸어 본 이후론 단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안심하고 빼돌렸는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모니카!”

모니카는 갑작스러운 아가씨의 부름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기분 탓일까? 오늘따라 유독 아가씨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들렸다. 마치, 리즈 아가씨의 한창때처럼.

“네, 아…… 아가씨.”

모니카가 쭈뼛거리며 릴리아의 앞에 섰다. 그러자 릴리아가 다소 날카로워진 눈매로 그녀에게 물었다.

“케인은 왜 온종일 보이지 않는 거지?”

“네? 케인이요?”

모니카는 안도했다. 아가씨의 심기가 불편한 게 자신 때문이 아니구나 싶어서.

“케인은 오늘 장작 담당이라……. 아마도 정원에서 장작을 패고 있을 거예요.”

“……그렇구나.”

릴리아의 표정이 이내 부드러워졌다. 마치, 예상했던 곳에 있지 않아 다행이라는 듯.

그러더니 갑자기 단장을 부탁했다. 옷도 가진 것 중에 가장 예쁜 걸 꺼내 달라고 했고, 장신구도 지난번 베리움 부인이 선물했던 루비 세트를 꺼내 달라 했다.

모니카는 그 이유가 남자 때문일 거라고 조심스레 예상했다.

하지만 케인은 아니었다.

그녀가 예상한 남자는 바로, 베르트 소공작이었다. 그가 오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루비 세트 대신에 베르트 소공작이 선물한 에메랄드 목걸이가 어떠냐며 넌지시 권유했다. 이제는 잠금 고리도 고쳐 놓은 터라 착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모니카.”

릴리아가 우아한 목소리로 모니카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어렴풋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 에메랄드 목걸이는 너 가지도록 해.”

예상치 못한 말에 모니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걸 제가 감히 어떻게…….”

“내가 주는 선물이야. 앞으로 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알았지?”

릴리아가 입꼬리를 예쁘게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 말이 훔치면 죽여 버리겠다는 말보다 더 섬뜩하게 느껴진 모니카는 속으로 결심했다.

앞으로 다신 아가씨의 물건에 손대지 않겠다고.

이윽고 치장을 마친 릴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니카가 치맛단을 붙잡아 주겠노라 말하며 함께 뒤를 따랐다.

나른한 오후 햇살이 복도 융단 위에 창 그림자를 비스듬히 드리웠다.

릴리아가 이를 사뿐히 밟으며 저택 입구를 향해 갔다.

현관을 막 지났을 때 릴리아가 제 치맛단을 붙잡고 있는 모니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모니카. 깜박하고 방에 창문을 닫고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돌아가서 창문 좀 닫아 줄래? 가정 교사가 준 교재를 펼쳐 놓고 나왔는데 바람에 날아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예, 그럴게요. 그럼 얼른 닫아 놓고 다시 나올게요.”

“아니, 굳이 다시 나올 필요는 없고…….”

“……?”

“그냥 가기 전에 케인만 좀 불러 줘. 그에게 따로 시킬 일이 있어서 그래.”

모니카는 그녀에게 하사받은 에메랄드 목걸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이 상황이 조금 묘하다는 의심조차 해 보지 않았다. 그녀는 두말 않고 복종했다.

“예, 그럴게요.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

릴리아는 정원 끝자락에 위치한 느티나무 아래를 서성이고 있었다.

이 느티나무는 초대 베리움 후작이 제국의 건국에 공헌한 대가로 후작위를 하사받으며 심은 기념수였다.

베리움 가문의 살아 있는 가보인 셈이다.

하지만 그 베리움 가문의 피를 반씩이나 물려받은 릴리아에겐 이 가보가 주는 영광이 하나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릴리아의 관심은 나무가 아니라 사람에게 있었고, 이제 막 그 사람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금발에 아콰마린 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 노예라기엔 너무 근사한 남자.

베리움 부인은 그를 노예 경매에서 낙찰받았다고 했다.

재미 삼아 참석했을 뿐 노예를 살 생각 따위 전혀 없었지만, 그가 매물로 나왔을 때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금액을 불렀노라 말했다. 과연 그럴 만했다.

그는 누가 봐도 탐날 정도로 훈훈한 외모의 소유자였으니.

릴리아는 그가 몰락 귀족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반역을 저지르거나 사업에 실패해 몰락한 귀족들의 자제를 저런 식으로 노예 시장에 물건처럼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으니까.

아무튼 그 근사한 남자가 지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릴리아는 그를 보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이 햇살에 조금 더 잘 비쳐 들도록 나무 그늘에서 한 발자국 나와 섰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가씨.”

가까이 다가온 케인이 꾸벅 인사를 올리곤 말했다.

“아…… 와 줬구나, 케인.”

릴리아가 이제야 그를 발견했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시키실 일이 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십니까?”

“사실은…….”

릴리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거 없어.”

“…….”

“그냥 잠깐 쉬라고 부른 거야. 혼자서 장작 패는 거 힘들잖아.”

릴리아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케인은 이 배려가 전혀 고맙지 않았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그만큼 끝나는 시간이 늦어져서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실 힘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케인은 이런 단순한 막일을 좋아했다. 일하다 보면 머릿속에 아무런 잡생각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만…….”

“잠깐만!”

막 돌아선 케인을 릴리아가 다급히 붙잡았다.

케인이 무심한 얼굴로 다시 뒤돌아섰다.

“그래, 그건 핑계야. 사실은 너와 잠깐 얘기가 하고 싶어.”

릴리아가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걸음을 옮겨 그와 서 있는 위치를 바꾸었다.

이제 케인의 얼굴에 햇살이 드리워졌다. 백금발이 내리쬐는 햇살에 반사되어 은발처럼 보이고, 눈은 더욱 투명하게 빛났다.

이목구비도 한층 섬세해졌다.

케인은 아주 잘생긴 미남은 아니었다.

객관적인 외모로만 따지면 베르트 소공작 쪽이 그보다 미남일 것이다.

하지만 릴리아의 눈엔 케인이 더 잘생겨 보였다.

이유는 많았다.

웃을 때 휘어지는 눈매, 상냥한 미소, 서글서글한 성격, 성실한 자세, 그리고…… 언니가 그에게 보이는 관심.

처음에는 그저 복도에서, 식당에서, 거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하는 그에게 왠지 모르게 시선이 향했다.

가벼운 호기심이었다.

귀족과 다를 바 없는 외양. 하지만 신분은 비천한 노예.

외양과 신분의 괴리감에서 비롯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감정이 이토록 발전한 건 언니 때문이었다.

다혈질인 성격 빼곤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보이는 언니가 저 남자한테 죽고 못 사는 이유는 뭘까.

그 호기심이 케인을 원래보다 더욱 근사하게 보이게 만들었음을 릴리아는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계기가 뭐 중요할까. 지금 제 마음에 오직 이 남자만 있다는 게 중요하지.

이 집에 온 이래 릴리아의 마음속 남자는 케인이 유일했다. 딱 이틀을 제외하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금색 눈을 가진, 신이 작정하고 빚은 예술품에 가까웠던 남자.

자신의 성인식에 나타난 남자를 보았을 때, 릴리아는 제 심장 고동이 음악 소리보다 더 크게 울릴까 봐 걱정했다.

그 남자를 보았던 여파가 이튿날까지도 이어져서 꽤 힘들었다.

솔직히 그땐 케인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튼, 딱 그 이틀만 빼곤 케인이 릴리아의 마음속에 자리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하십시오. 기다려 드리겠습니다.”

케인이 차분하게 말했다.

릴리아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고르는 듯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사실 할 말은 이미 다 정해져 있었고, 호흡도 고를 필요 없이 안정적이었다.

그녀가 기다리는 건 ‘때’였다.

문득 저 멀리 저택 안으로부터 웅장한 괘종시계 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세 시라는 뜻이다.

릴리아는 슬쩍 케인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이제 막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흑단백석 브로치를 크라바트 장식으로 달고, 앞머리는 깔끔하게 뒤로 넘긴 곱상하고 온화한 미남자. 바로 베르트 소공작이었다.

기다리던 ‘때’가 찾아왔다.

“케인, 나 네가 좋아.”

릴리아가 고백했다. 그러곤 그의 탄탄한 가슴을 두 손으로 짚으며 뒤꿈치를 세웠다.

키스할 생각이었다.

계획적이었다고 해서 케인을 향한 릴리아의 마음이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고 싶었다. 이렇게 낯이 화끈거리는 용기를 두 번 낸다는 건 무리다. 그럴 바엔 단 한 번의 시도로 케인의 마음도 사로잡고, 저 찰거머리 같은 베르트 소공작도 떨쳐 내면 좋지 않은가?

릴리아는 눈을 감고 케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그런데…….

“아가씨.”

케인이 릴리아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래서 그녀의 입술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릴리아의 당혹스러운 눈동자에 케인의 무심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이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뭐…… 뭐가? 혹시…… 거절…… 뭐, 그런 거야?”

릴리아가 뒤꿈치를 바닥에 내리며 말했다.

그녀답지 않은 동요가 목소리에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그것도 맞는데.”

케인이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감히 충고드리자면, 마음을 고백하는 데 계산이 들어가선 안 됩니다.”

릴리아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대……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분명 이 남자는 저쪽을 등지고 있고, 베르트 소공작은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거리에 있는데 말이다. 물론 소공작 쪽에서 이쪽을 보는 덴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하지만 그건 릴리아가 케인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다.

케인 속 헤르시스가 암살에 대비한 훈련을 얼마만큼 지속해 왔는지, 잠자는 시간을 포함해 살아 있는 모든 순간에 얼마나 감각을 예민하게 벼려 왔는지 알았다면 릴리아는 결코 이런 약은 수를 쓰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베르트 소공작이 탄 마차가 저택 바깥의 거리 모퉁이를 접어들기도 전에 그 존재를 알아차렸다.

“하…… 하지만…….”

마음만은 진심이라는 말을 릴리아는 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케인이 차갑고 낯설게 느껴져서 그러지 못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케인이 표정을 부드럽게 풀며 릴리아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전 그냥 노예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사람한텐 안 그러시길 바랍니다.”

그의 상냥한 당부가 백 마디 비난보다도 더 날카롭게 가슴에 박혔다.

케인은 왔을 때와 똑같이 정중한 예의를 갖추곤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케인이 사라지자 비로소 릴리아의 눈에 들어온 얼굴이 있었다. 상심으로 일그러진 베르트 소공작의 얼굴이었다.

그는 손에 든 꽃을 축 떨구더니, 그 꽃만큼이나 축 처진 어깨로 돌아섰다.

그래도 목적 하나는 달성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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