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야릇한 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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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야릇한 기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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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야릇한 기류
2023.07.03.
이름을 몰라서 벌을 준다는 건 핑계고, 사실은 제 여인을 때린 것에 대한 응징을 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응징하려는 걸까?
리즈는 마른침만 꼴깍 삼킨 채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뭔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는 것조차 꺼려지는 묘한 정적이 방 안을 휩쓸었다.
도약하기 전에 몸을 잔뜩 웅크리며 힘을 모으는 맹수처럼,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침묵이었다.
갑자기 그 눈동자에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남자의 시선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갔다.
리즈의 콧날을 훑고 입술을 지나…… 아니, 입술에 머물렀다. 한참을 머물렀다.
이상야릇한 두려움에 리즈는 침대보를 와락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헤르시스는 음험한 생각을 품고 있지 않았다.
겁먹은 여자를 강제로 취하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파리해진 얼굴 가운데 유일하게 혈색이 도는 부위라 신기해서 쳐다본 것뿐이었다. 하지만, 견물생심이랄까.
보다 보니 갖고 싶었다. 그리고…… 취하고 싶었다.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톡-, 터질 것만 같은 탐스럽고 영롱한 입술이었다.
자꾸 오르락내리락하며 그의 셔츠 앞섶을 자극하는 봉곳한 신체 부위는 이러한 욕정을 더욱 충동질했다.
어둑해져 가는 방 안,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몸, 고요한 정적 가운데 적나라하게 들리는 불규칙한 숨소리, 저를 올려다보는 말간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야릇한 기류를 자아내는 상대가 바로 제가 좋아하는 여인.
이런 상황에서 맨정신을 유지하는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리즈를 가둔 헤르시스의 두 팔에 점점 핏줄이 불거졌다.
그때였다.
철컹철컹-.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왜 문이 잠겨 있지?”
미라벨의 목소리도 따라 들려왔다.
그러자 팽팽하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끊어져 버렸다.
리즈가 당황한 얼굴로 헤르시스에게 속삭였다.
“어떡해요?”
헤르시스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짜증과 안도감이 뒤섞인 데서 오는 묘한 평정이 그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곤 리즈의 몸도 조심스레 일으켜 주었다.
“열어 줘요.”
아무렇지 않은 지시에 리즈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책망했다.
“미쳤어요? 둘이 문까지 잠그고 뭐 했냐고 물어보면? 그럼 뭐라고 대답할 건데요?”
“사실대로.”
“미라벨 기절해요.”
“기절할 만한 짓 안 했잖아요?”
아 참, 그랬지…… 가 아니잖아?
리즈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일단 문 열어 줘요.”
헤르시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안 돼요.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아가씨! 아가씨 계세요? 주무세요?”
미라벨이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잠자리에 들기에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렇다고 아예 생뚱맞은 시간도 아니었다.
그냥 이대로 잠든 척하는 게 나을지도…….
“열쇠로 열어야겠네.”
안 되겠구나.
찰캉찰캉 열쇠 꾸러미 꺼내는 소리에 리즈는 아연실색했다.
이 순간만큼은 눈앞의 남주보다 미라벨이 훨씬 두려웠다.
헤르시스가 얼른 열어 주라는 듯 턱을 문 쪽으로 까딱해 보였다.
후우-.
한숨을 내쉰 리즈가 눈매를 찌푸리며 투정 부리듯 그를 질책했다.
“전하께서 다 해결하세요. 난 몰라요.”
말을 마친 리즈는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열쇠를 찾는 데 꽤 오래 걸리는지 아직도 찰캉찰캉 맑은 금속음이 울리고 있었다.
리즈는 크게 심호흡을 두어 번 한 뒤 결연한 얼굴로 문고리를 돌렸다.
이제 막 맞는 걸 찾아낸 미라벨이 열쇠 구멍에 찾은 열쇠를 꽂아 넣으려던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아가씨, 주무신 거 아니었어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며 미라벨이 물었다.
“……응.”
“그럼 뭐 하셨어요?”
“…….”
리즈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미라벨의 시선이 리즈의 어깨 너머를 주욱 훑었다. 그러곤 어느 한 곳에서 뭔가를 발견했는지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젠장.’
리즈는 차라리 제 입으로 털어놓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미라벨, 사실은 말이지…….”
“아가씨!”
“……?”
미라벨이 리즈가 열다 만 문을 활짝 열어젖히곤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왜 날도 추운데 창문을 열어 놓으셨어요? 감기 걸리시게.”
“……창문?”
리즈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케인…… 혹은 헤르시스는 없고, 대신 열린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에 커튼만이 살랑살랑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
헤르시스는 리즈의 방 창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후에야 담벼락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곧장 방으로 돌아가려다 바짓단에 묻은 흙을 발견했다.
창문에서 뛰어내려 착지한 순간 한쪽 무릎이 지면에 닿았는데, 아마도 그때 묻은 듯했다.
그는 흙을 탈탈 털어 내며 자조했다.
“나도 참, 이젠 이런 거나 묻히다니.”
어디 한 군데 부러지지 않았다는 걸 위안으로 삼기에 그는 너무 뛰어나고 날렵한 몸의 소유자였다.
“이샤르가 이걸 알면 엄청 비웃겠군. 나도 이제 한물갔다고 생각할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스스로가 한심스러운 것치고 그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처음이었다. 이샤르가 아닌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건. 반드시 숨겨야 했던 비밀이었으므로.
대담하게 고백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그는 꽤 긴장했다. 리즈의 표정 변화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온 신경을 끌어모았다.
혹시 자신을 괴물로 생각하진 않을까? 얼굴이 바뀌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걸 보고 혹시 기절하진 않을까? 다신 안 보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는 정말 진지하고 심각하게 걱정했다.
물론 다신 안 보겠다고 한들 그쪽에서 그렇게 놔두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그녀가 조금 덜 경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경악을 하는 건 괜찮다. 혐오스럽게만 생각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한데…….
리즈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담담했다. 물론 놀라긴 했지만 그건 얼굴이 바뀌어 가는 과정 때문이 아니라, 바뀐 자신이 그녀가 이전에 알던 어떤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순간 깊이 안도했다.
‘내 이름이 뭐죠? 다음에 만날 때 기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한다고 했죠?’
‘자…… 잠깐만요. 기억해 볼게요. 그…… 헤…… 헤리온? 헤로스? 헤센트?’
한 글자라도 맞춘 게 대단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풀 네임을 다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게 그녀에게 있어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십 년을 함께 지내 왔으니까.
리즈가 기억하는 남자 이름, 이성으로서 유의미한 남자 이름은 오직 케인뿐이었다. 그도 그녀의 관심이 멀어진 후에야 알았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특권이었는지를.
하지만 이젠 그 이름을 점차로 지워 가고 대신 헤르시스라는 이름을 그녀 뇌 속에 각인시켜야 한다. 자신은 더 이상 케인으로 살 수 없고, 그건 자신의 진짜 이름도 아니니까.
리즈도 이 얼굴이 가진 몸과 영혼이 케인의 것과 똑같다는 걸 알았으니 그리 어렵지도 않을 터였다.
헤르시스는 리즈의 방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좀 전까지 투명하던 창이 금세 붉은 벨벳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분명 미라벨이 바깥을 내다보지 못하도록 리즈 본인이 직접 쳤을 것이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커튼을 꼼꼼히 닫아 두었을 생각을 하니 헤르시스는 자꾸 키득키득 웃음이 지어졌다.
“귀엽네, 리즈 베리움.”
더 늦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낯선 모습으로 정원을 서성이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들켜서 좋을 건 없으니까.
빛 한 줌 새어 나오지 않는 자줏빛 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뒤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뒤늦게 인식된 한마디 때문이었다.
‘전하께서 다 해결하세요. 난 몰라요.’
***
리즈는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남자는 시종일관 리즈의 혼을 쏙 빼놓았고, 마지막까지 범상치 않은 방식으로 사라졌다.
생각해 보니 첫 만남 때도 그랬다.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화려하게 등장해선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춤을 리드하며 리즈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저잣거리 공터에서 불량배들을 처치했을 때도 그랬다.
날렵하고 야성적인 몸놀림,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빠른 판단력, 그리고 절대적인 자신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힘이 그에겐 분명히 있었다.
돌이켜 보면 헤르시스가 등장하면 주변이 일순 흐릿하게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오직 그만이 또렷한 윤곽과 선명한 색채를 가진 사람 같았다.
그걸 단순히 잘난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이라고 치부해 버린 건 빙의자로서 뼈아픈 실수였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았다면 알 수 있었을 것을.
그것이 바로 소설 속 주인공의 존재감이라는 것을.
릴리아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녀 뒤로 후광이 비추는 것과 같은 종류의 존재감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어떻게서든 만남을 피했을 텐데.
어리석었다.
그의 손을 잡고 밤거리를 거닌 일과, 침대에서 그와 마주 본 채 눈뜬 일을 상기하자 리즈의 얼굴은 점점 흙빛이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으면 제가 정식으로 교제를 청할까 하는데.’
고백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케인이라는 걸 알고 나니 확신이 사라졌다.
십 년간이나 철벽을 쳐 대던 그 마음이 이제 와서 바뀔 리 없잖아. 더군다나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
심심했나?
아니면 궁금해서?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 의아해서?
리즈의 생각은 계속 한자리를 맴돌았다.
그 외의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보기엔 케인의 지난 거절이 너무 차갑고 분명했다.
‘죄송하지만 리즈 아가씨, 저는 아가씨를 한 번도 여자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고요.’
원작에서 그는 빈말을 하지 않는 남자로 묘사되어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후우-.
리즈는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중요한 건 그가 내릴 그녀에 대한 처분…… 뿐.
‘나는 이제 어떻게 될까.’
리즈는 궁금해졌다.
‘여주에 대한 마음은 자각했을까.’
그 또한 궁금했다.
불현듯 조금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나른하게 웃어 보이면서도 눈빛만은 노란 불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역시…… 복수심인 걸까? 내가 릴리아를 때려서?’
리즈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