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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벌받아야죠? (32/65)


#32화 벌받아야죠?
202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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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이 문을 잠갔다.

리즈는 당황하고 경악했다.

‘서……설마 지금 날 죽이려고? 한 번 정도는 봐줄 수 있는 거 아냐?’

리즈가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자 케인이 웃으며 안심시켰다.

“아무 짓도 안 해요.”

“아…… 아무 짓도 안 하는데 문을 왜 잠갔어?”

“귀찮은 일이 일어나는 게 싫어서요.”

“귀찮은 일이 뭔데?”

“갑자기 누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할 말을 끊는다든가 하는 일.”

아…… 그는 몇 시간 전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때 뭔가를 말하려다 끊어졌지.

그럼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고…….

리즈의 굳어진 어깨가 슬며시 가라앉았다.

제가 우려하는 일이 아니었다 생각하니 당장은 안도할 수 있었다. 당장은.

“하고 싶은 말, 해 봐.”

리즈가 말했다. 그의 입술을 주시하는 보랏빛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일렁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지만 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즈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시선이 너무 비장해 보여서 리즈는 감히 재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케인이 깊은 한숨을 후우-, 내쉬었다.

이제 진짜로 뭔가 말하려나 보다 싶어 리즈는 숨까지 참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눈을 감았다 뜬 것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었으니까.

눈 색깔이 변했다. 아니, 변해 갔다.

남국의 바닷물처럼 청량하던 아콰마린 빛깔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달라진 건 눈 색깔만이 아니었다.

모근에서부터 머리칼 끝까지 새로운 색이 입혀지고, 얼굴 윤곽도 조금씩 달라졌다.

그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침착하고 결연한 표정을 보아하니 의도적으로 이 상황을 만든 게 분명했다. 리즈에게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대체 왜…… 여주가 아니라 내게 본모습을 보여 주는 거야?’

놀란 와중에도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가 변신을 끝마쳤을 땐 더 이상 이유 따윈 궁금하지 않았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중요한 건, 바뀐 남자가 리즈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 오직 그뿐이었다!

“다…… 다, 당신은…….”

리즈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제가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싶어 여러 차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듯 케인이…… 아니, 로레인 귀족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싱긋 웃었다.

몹시 매혹적인 미소였다. 무도회에서 춤을 신청할 때도 저런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 무도회.

어쩐지 손발이 딱딱 맞는다 했다. 어렵고 생소한 곡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황망한 얼굴로 그 말만을 속으로 되뇌는 사이, 로레인 귀족이…… 아니, 남주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그리고 물었다.

“내 이름이 뭐죠?”

순간 리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이름? 평소에도 기억 못 하는 것을 지금처럼 정신없는 상황에서 기억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건 리즈의 사정이지, 남주의 사정은 아니었다.

그의 금안이 깊고 그윽한 빛을 띠었다.

느릿하게 걸음을 내딛는 몸짓은 어둑해지기 시작한 방 안 풍경과 어우러져 그를 몹시 위협적으로 보이게 했다.

리즈가 사색이 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는 서둘러 거리를 좁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그녀가 제 손아귀에 있었으므로.

그가 입가에 매끄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내 이름 기억 못 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죠?”

***

그도 이런 식으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리즈 인생에서 케인을 가능한 깔끔히 퇴장시킬 생각이었다.

케인과 본래의 자신이 조금도 관계없는 사람이라 믿게 할 생각이었다.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

그 말을 듣기 전까진.

‘저는 그 남자를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그 남자는 제 모든 것을 알고 있거든요. 습관, 식성, 잠버릇, 그리고…….’

가족의 무관심 속에서 겪어야 했던 아픔까지…… 라는 말을 하려 했겠지. 하지만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거다.

고작 마음에 안 드는 남자 하나 떼어 내느라 거짓말하는데 그런 과거사까지 들먹이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리즈. 그거 완전한 거짓 아니지 않아?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확신했다.

리즈의 고백이 어느 정도는 진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조금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건 피아노 연주였다.

함께 피아노를 치며 슬쩍 손가락을 걸쳤을 때 동요하는 리즈를 보며, 그는 그녀 안에 케인에 대해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한 마음이 남아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리즈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마음을 주는 타입이었다. 그 많은 시중인들 중 오직 미라벨만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겉과 속이 똑같다는 이유로. 제게 다가오는 귀족 영식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케인에게만 애정을 쏟았다.

제 눈물을 처음으로 닦아 주었다는 이유로.

그랬던 그를 갑자기 밀어내는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케인과 본래의 자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리즈의 선택은…….

케인이라는 것을.

케인에게 열었던 마음을 이 낯선 남자에게 열어 보이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니, 평생 열지 않을지도 몰랐다.

물론 곁에 두면 어떻게든 웃어 보이기야 하겠지. 제 속내를 감추고 겉으로는 행복에 들뜬 사람처럼 행동할 테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리즈를 갖고 싶지 않았다.

이미 리즈와의 깊은 유대감을 경험한 그로선, 그런 식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에게 좋은 면만을 드러내 보이며 살아가는 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리즈가 케인에게 그랬듯이 제 앞에서 웃고, 화내고, 요염하게 유혹하길 바랐다. 또한 감정 밑바닥까지 드러날 정도로 울길 바랐다.

그녀의 깜깜한 우주 속에서 오직 저 하나만이 절대적으로 빛나는 별이길 바랐다.

그러려면 케인, 헤르시스.

둘은 한 사람이어야 했다.

자신이 언제까지고 케인으로 살 수는 없으니 방법은 그뿐이었다.

***

“자…… 잠깐만 시간을 좀 줘……. 아니, 주세요.”

리즈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남자를 저지하려는 듯 두 손을 뻗었다.

그는 의외로 순순히 걸음을 멈춰 주었다. 리즈는 그 틈에 재빨리 그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어…… 그러니까 좀 전까지 기억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헤…… 헤리온?”

“아닌데?”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재밌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럼…… 헤스티온?”

“그것도 아냐.”

리즈가 한 번 틀릴 때마다 남자는 한 걸음씩 다가왔다.

얼마든지 계속해 보라는 듯 자비로운 미소까지 띠면서.

리즈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한 걸음씩 물러나며 아무거나 던졌다.

“아…… 아니에요? 그럼…… 일단 ‘헤’로 시작되는 건 맞는 거죠? 헤…… 헤로스? 헤센트? 헤미르…….”

“헤르시스.”

필사적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결국 남자가 말해 주었다.

“마……맞아, 헤르시스. 그래, 헤르시스였어.”

리즈가 그래도 절반은 맞췄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자신이 남자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 테니까 한 글자 맞춘 것만도 대단하다고 여기고 봐주겠지.

“그다음은?”

“……?”

“계속해야죠?”

“계, 계속 말…… 해야 해요?”

“당연하죠. 그다음에 다음까지 전부 말해야죠.”

‘야, 이 미친놈아! 이 정도 했으면 됐잖아? 나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봐줄 생각이 없는 남자는 계속해서 다가오고, 리즈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다행스럽게도 이 방은 명문가 장녀의 방답게 무척 넓어서 물러날 공간 또한 얼마든지 있었다.

“잠깐만 ‘카’…… 로 시작되었던 거 같은데……. 카…… 카지…….”

그런데 끝도 없이 물러날 수 있을 것 같던 공간 속에 발에 걸리는 게 있었으니,

“으, 으악!”

침대였다.

리즈가 침대에 걸려 뒤로 넘어갔다. 케인이었던 남자가 눈 깜짝할 새 다가와 리즈를 받쳤지만, 둘이 함께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는 사태만 일으켰을 뿐이었다.

리즈에겐 몹시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쪽에는 기회가 되었다.

그녀를 두 팔 안에 가두고 위협할 수 있는 기회.

“자…… 이젠 말해 볼래요? 내 이름?”

리즈는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위를 정복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늘어진 눈매 사이로 번뜩이는 두 금색 눈동자가 요전 날 새벽을 상기시켰다.

점점 밀려오는 밤그림자도, 침대 위라는 배경도, 그와 자신의 대치 구도도 그날과 똑같았다.

하지만, 리즈의 감정은 그날과 똑같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이 불안정한 호흡으로 크게 들썩였다.

한 번 들썩일 때마다 남자의 늘어진 셔츠 자락에 가슴 끝이 닿았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적어도 리즈에겐.

‘어떻게 이 남자가 케인일 수가 있지? 어떻게 케인이 이 남자일 수가 있어? 어떻게 이 남자가……’

원작 남주일 수가 있을까!

눈앞에서 변해 가는 과정을 목격하고도 리즈는 좀처럼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짧은 순간 극심한 혼란을 겪은 나머지 망상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덴 없어요?’

하며 백금발에 푸른 눈동자의 남자가 생글거리며 일으켜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감은 눈은 리즈에게 애먼 기억만을 불러왔다.

「새카만 흑발에 순금을 녹여 주조한 듯 찬란하게 반짝이는 금안의 남자가 등장했다. 그러자 대관식장이 혼돈에 휩싸였다. 그는 오래전 실종된 황태자…….」

뒤늦게 떠오른 원작 구절이 리즈의 기대를 꺾어 놓았다.

리즈는 천천히 눈을 떴다.

새카만 흑발에 순금을 녹여 주조한 듯 찬란하게 반짝이는 금안의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틀림없는…… 남주였다.

“……죄송합니다.”

리즈가 사죄했다.

“모르겠습니다. 이름.”

현실을 직시하자 체념이 밀려왔다. 떨림이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렇군요.”

헤르시스의 눈매가 나른하게 휘어졌다.

“그럼, 벌을 받아야죠?”

“무슨 벌을…… 어떻게 내릴 건데요…….”

점점 기어들어 가는 물음에 그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글쎄요.”

다음 순간, 리즈는 제게 점점 가까워지는 헤르시스의 얼굴을 보았다.

허업!

그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리즈는 숨을 들이켰다. 너무 놀라 눈을 감을 생각도 못 했다.

‘뭐…… 뭐 하려고!’

그녀는 둥그렇게 부릅떠진 눈으로 한껏 가까워진 남자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눈 속에 제 얼굴이 보였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와중에도 그건 보였다.

바보같이 잔뜩 굳어 있는 얼굴.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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