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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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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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후회
2023.07.01.
‘젠장. 방에 돌아가 있으라고 말했는데.’
리즈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나 이제 남주한테 찍힌 건가?’
리즈는 도저히 케인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쩐지 몸이 싸한 것이 그가 자신을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원작 스토리를 따르게 되는 것인가.
하아…….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간 필사적으로 노력한 수고가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후회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쉽게 마음을 열진 않지만 한 번 마음을 연 상대에겐 제 모든 것을 주는 리즈였다. 그런 리즈가 피를 나눈 가족보다 각별한 미라벨을 위해 못 할 일이 뭐 있을까?
미움? 까짓것 좀 받지 뭐.
한 사람한테만 사랑받으면 그만이지.
“가자, 미라벨.”
“예, 아가씨.”
리즈는 턱을 치켜들며 애써 당당한 몸짓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중인들이 벌레 피하듯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고, 케인을 스쳐 지날 때 살짝 걸음을 재촉한 것을 제외하면 무난한 행진이었다.
***
리즈와 미라벨이 사라지자 릴리아는 뺨을 감싸 쥐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시중인들이 그런 릴리아를 달래며 씩씩거렸다.
“리즈 아가씨, 어떻게 동생분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리실 수가 있죠? 차라리 저흴 때리시지.”
“아냐, 그래도 내가 맞는 게 나아. 너희가 맞았으면 내 마음이 더 아팠을 거야. 흑…….”
릴리아가 뺨을 감싸 쥐곤 더욱 흐느끼며 말했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시선을 입구 쪽으로 향했는데, 거기에 케인이 아직 있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케인은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릴리아는 처소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모니카가 부축하겠다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그러곤 힘겹게 걸어 케인의 앞을 지나치려는데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대며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아가씨 어떡해! 너무 세게 맞으셨나 봐.”
시중인들이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모니카는 얼른 케인을 다그쳤다.
“뭐 하고 있어? 아가씨 얼른 들어 드리지 않고.”
이번엔 릴리아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케인이 그 지시에 따른 건 몇 초 뒤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머뭇거림이었지만, 워낙 찰나였던 터라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케인은 릴리아를 번쩍 안아 들고 층계를 올랐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릴리아의 입꼬리에 짧은 순간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고마워, 케인.”
케인의 품에서 침대로 옮겨진 릴리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녀의 한쪽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나머지 뺨도 비슷한 정도로 달아오른 걸 보니 꼭 맞아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럼 쉬십시오.”
제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케인이 나무랄 데 없는 예를 갖추곤 돌아서려 했다. 그러자 릴리아가 그를 붙잡았다.
“저기…….”
“말씀하십시오.”
케인이 반쯤 돌아선 몸을 다시 그녀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릴리아는 주저하듯이 말했다.
“……아까 본 거 다 잊어버리라고.”
“…….”
“언니랑 있었던 일 말이야. 언니가 날 때린…… 아무튼 그거 다 잊어버려. 언니는 아무 잘못 없어. 내가 맞을 짓 했기 때문에 맞은 거야.”
케인이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릴리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두 뺨이 더욱 발갛게 물들었다. 릴리아는 조금 더 붉어진, 그리고 부어오른 뺨을 감싸며 더 열렬히 언니를 변호했다.
“혹시나 네가 언니를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볼까 봐 걱정돼서 그래. 넌 언니의 옛 시중인이고, 언니랑 친하니까…… 그래서…….”
“그런 일 없습니다.”
“…….”
케인의 주저 없는 대답에 릴리아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틈에 케인이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했다.
“제가 리즈 아가씨를 안 좋게 생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그러라고 내뱉은 말이지만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애써 불쾌감을 감춘 릴리아는 그녀다운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 고마워. 내 부탁 들어줘서.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어.”
“아가씨가 부탁해서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라…….”
“…….”
“처음부터 나쁘게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릴리아라도 이번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데 조금 더 힘써야 했다.
찰나 굳어진 눈매와 희미하게 떨리는 입꼬리 정도야 그녀가 속에 품은 분노의 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케인은 다시 한번 정중하게 예를 갖추곤 돌아섰다. 릴리아는 이번만큼은 감히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 여쭤보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
문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다 말고 갑자기 생각난 듯, 케인이 스스로 돌아섰다. 그러곤 릴리아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정말로 모니카 님을 믿으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요.”
“……그럼, 믿지. 믿고말고. 내 시중인인데 믿는 게 당연하잖아?”
릴리아는 확신을 담으려는 듯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모자란 믿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그렇군요.”
케인은 단지 그렇게만 말할 뿐, 다른 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세 번째로 정중히 인사를 올리곤 처소에서 물러났다. 완전히 물러났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듯이 단호하게 돌아선 뒷모습이 릴리아를 더욱 분노케 했다.
한데, 분노의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모두 다 언니 때문이야. 언니가 케인을 홀려 버렸어.”
곱게 손질된 리넨 이불이 그녀 손끝에서 완전히 구겨져 버렸다.
***
“왜 그러셨어요?”
미라벨의 질책 섞인 물음에 리즈가 답했다.
“나도 후회하고 있어.”
“……?”
“한 대 더 때려 줬어야 하는 건데.”
“아가씨!”
“아무튼.”
리즈가 질책했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거야? 내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걸 주워서 갖다 주라고 했다고 말했으면 됐잖아.”
“아가씨께서 책잡히는 게 싫어서요. 혹시나 아가씨가 도둑으로 몰릴까 봐.”
이미 리즈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미라벨에게 당시 상황을 자세히 말해 주지 않은 것을.
그랬다면 모니카에게 전해 주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될 수 있었을 텐데.
명백히 자신 탓이었다. 케인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져 일을 크게 만들었다.
하긴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일까.
그런다고 그녀가 저지른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도둑으로 좀 몰리면 어때? 그래 봤자 난 이 집 주인인데 설마 날 어떻게 하겠어?”
애써 당당함을 가장한 리즈의 말에 미라벨이 후우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인심을 잃으시겠죠.”
“잃을 인심도 없어. 그러니까 앞으론 그런 걱정 말고 마음껏 날 팔아. 알았지?”
“…….”
하지만 미라벨은 대답할 수 없었다.
‘감히 어떻게 내가 아가씨를 팔겠어요?’
미라벨은 지금의 상황이 아주 안타까웠다.
이렇게 된 거 처음부터 자신이 훔쳤다고 할 것을. 괜히 욱하는 마음에 일을 크게 만들어서 아가씨를 손가락질받게 했다.
가뜩이나 릴리아 아가씨가 대세로 떠오르는 상황에 이제 리즈 아가씨의 자리는 좁아지다 못해 점 하나로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이만 나가 볼게요.”
미라벨은 심란한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서둘러 물러났다.
문이 달칵 닫히고 방에 혼자 남은 리즈는 드디어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젠장, 미쳤어! 케인이 보는 자리에서 악녀 짓을 하다니. 난 죽었네, 죽었어!”
리즈는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한탄에 한탄을 거듭했다.
그간 잘 버텨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야말로 단단히 찍히겠구나 싶었다.
케인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라도 해 볼걸.
미라벨이 맞는 걸 보고 눈이 뒤집혀선…….
“잠깐!”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 건 그때였다.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른다. 소설 설정상 두 사람의 사랑은 악녀의 악행을 촉진제 삼아 더 깊어지도록 되어 있으니까.
벌겋게 부어오른 릴리아의 뺨을 치료해 주며 케인이 비로소 제 마음을 깨닫고, 그렇게 불이 붙은 사랑이 그로 하여금 릴리아를 하루빨리 이 집구석에서, 악녀 같은 언니한테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각오를 다지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더 바랄 게 없는 최상의 전개다.
케인은 더는 고통스러운 약을 먹지 않아도 될 테고, 리즈 자신은 마음 놓고 편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여전히 릴리아의 뺨을 때린 일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뭐, 한 번 정도는 봐주지 않겠어?”
여기서 악행을 더 저지르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잔뜩 굳어 있던 리즈의 미간이 부드럽게 펴졌다.
먹구름이 걷힌 하늘의 태양처럼 밝은 미소가 리즈의 얼굴에 천천히 번져 갔다.
리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옷장으로 다가가 청록색 모직 숄을 걸친 뒤 문으로 걸음을 향했다.
한동안 방에서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전나무 숲 위로 드넓게 펼쳐진 살구 빛 하늘은 창 너머로만 보기엔 너무 아까웠고, 모든 일은 다 잘 될 테니까. 아마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긴 리즈는 복도에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이제야 나오시네요.”
팔짱을 낀 채 벽에 나른하게 기대어 선 케인을 발견했다.
마치 숨 쉬는 법을 잊기라도 한 듯 리즈의 호흡이 멎었다.
“너…… 어……언제부터 여기에……?”
겨우 숨을 내뱉은 리즈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케인이 대답했다.
“한 시간 전부터요.”
하, 한 시간…….
“아니…… 왜……?”
“아가씨가 안 나오시니까요.”
리즈의 목소리는 점점 더 떨리는데 케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분해져 갔다. 언뜻 살기가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침착해야 해.’
리즈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서 물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안 나오는데 네가 왜 여기 있냐고.”
“아……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
“들어가면 되는데 왜 여기 있었을까요?”
케인이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는 듯이 씨익 웃는데, 그 모습이 리즈를 더욱 오싹하게 만들었다.
설마 이 남자, 한 번도 봐주지 않을 생각인가? 그 정도로 릴리아에 대해 강렬한 사랑을 자각한 걸까?
“그럼 들어가죠. 지금.”
망부석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 리즈의 어깨를 케인이 가볍게 그러쥐고, 문안으로 밀어 넣었다.
잔뜩 겁에 질린 리즈는 그 손을 뿌리쳐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손에 밀려 종종 뒷걸음질 쳤다.
두 사람 다 완전히 처소 안으로 들어서자 케인은 리즈의 어깨를 놔주었다.
그러곤.
딸깍-.
문을 잠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