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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내가 대신 때려도 돼? (30/65)


#30화 내가 대신 때려도 돼?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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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이야?”

미라벨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모니카를 직시하며 물었다.

“저 사실 그때 봤거든요. 베르트 소공작님께서 릴리아 아가씨께 목걸이 걸어 주셨을 때 리즈 아가씨 얼굴.”

“…….”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이셨어요.”

모니카가 약 올리듯 간사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가지고 싶지 않으셨을까 하고요.”

“잘못 짚었네. 이건 아가씨와 아무 관계도 없어.”

미라벨은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벌써 뭐 하나 날아가도 날아갔으리라.

“그렇군요.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한참 잘못 생각했지. 어떻게 그런 추측을.”

두 사람이 워낙 목소리를 낮춰 대화한 터라 뒤에 서 있는 후배 시중인들의 얼굴엔 답답함이 한가득이었다.

모니카는 더욱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솔직히, 리즈 아가씨가 좀…… 그런 면이 있잖아요? 하나에 꽂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케인한테도 그랬고.”

툭-.

미라벨은 제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케인과 관련지어 아가씨를 조롱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미라벨이 순식간에 모니카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일에 야무진 만큼 머리채를 휘감아 돌리는 손도 야무졌다.

“네가 감히 누굴 모욕해.”

“꺄아악!”

모니카는 맥없이 휘둘렸다. 뭔가를 해 보려는 듯 손을 뻗어 보기도 했지만 미라벨의 머리카락 한 올도 움켜쥐지 못했다.

후배 시중인들은, 개중에 상황 판단력이 빠른 아이 하나만 급히 어디론가 달려갔을 뿐 대부분은 그저 멍하니 구경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일상에 지친 후배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을 때.

“이게 무슨 일이지?”

아수라장의 한복판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라벨은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그들을 멈추게 한 사람은 릴리아였다.

주인 앞에서 그 시중인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가씨이…….”

미라벨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모니카가 릴리아에게 달려갔다.

흐흐흑. 서럽게 우는 모니카의 목소리가 웃음소리처럼 들리는 걸 보니 내가 정말 이성을 잃긴 잃었구나.

자조 섞인 희미한 웃음이 미라벨의 잇새에서 흘러나왔다.

릴리아가 산발이 된 모니카를 보고 잠시 경악했다. 그런 다음 곧바로 미라벨을 매섭게 돌아보며 냉엄한 말투로 물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목소리에 제법 주인 아가씨다운 위엄이 스며 있었다.

미라벨이 눈을 내리 깐 채 대답을 못하고 있자 모니카가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대신 말했다.

“미라벨 님이 아가씨의 목걸이를 훔쳤어요. 그래 놓고 안 훔쳤다고 거짓말해서 한마디 해 주었을 뿐인데, 흐흑…….”

내 목걸이?

릴리아의 의문 섞인 눈이 모니카의 손에 들린 목걸이로 향했다.

알아보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제 목걸이가 맞았다.

베르트 소공작에게 받고 그 자리에서 착용한 후 방으로 돌아와 곧바로 풀어 버린, 아니…… 뜯어내어 보석함 깊숙이 처박아 버린 목걸이.

그 뜯어낸 흔적이 끊어진 잠금쇠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걸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릴리아가 천천히 미라벨에게 다가섰다.

“정말이니?”

차갑고 서늘한 말투에 미라벨의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아니오.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다시 한번 물을게. 정말 그랬니?”

릴리아가 한 뼘 남짓한 거리에 멈춰 서선 같은 질문을 했다.

미라벨은 이미 상황이 제게 상당히 불리해져 있음을 알았다.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웠다는 말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누구도 믿어 주지 않을 게 뻔하기도 했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허접한 변명처럼 들렸으니까.

리즈를 끌어들이는 일은 더더욱 있을 수가 없었다.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죄송합니다.”

“…….”

“제가, 훔친 게 맞습니다.”

짜악-.

정신을 차렸을 땐 미라벨의 얼굴이 한옆으로 홱 돌아가 있었다.

여리여리한 줄 알았는데 손맛이 꽤 매서웠다. 감정이 실린 게 틀림없는 것 같다고 미라벨은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도 참을 만했다.

결국엔 제 생각이 맞았다.

‘릴리아 아가씨 가까이하지 마세요. 앞뒤가 달라 보여요.’

“내가 왜 널 때렸는지 아니?”

릴리아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 말했다.

“목걸이를 훔쳤기 때문이 아니야.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내 시중인에게 위해를 가했기 때문도 아니고.”

“…….”

“네 잘못된 태도가 내 언니를 욕보였기 때문이야.”

릴리아가 못내 안타깝다는 듯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언니가 널 얼마나 믿고 의지했는데,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속상해하겠니? 안 그래?”

“…….”

“오늘 일은 이걸로 덮겠어. 어머니나 언니에게도 말하지도 않을 거야. 특히 언니에겐 더더욱. 고결한 언니가 이 일로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 이 순간, 시중인들의 눈에 릴리아는 무척 자비롭고 관대해 보였다.

조금 전 뺨을 때린 게 너무 하지 않았나 싶었던 생각은 진작에 사라지고 없었다.

릴리아는 부어오른 뺨을 감싼 미라벨의 손을 살포시 끌어내려 제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곤 도무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인자한 미소를 만면에 띠며 훈계를 끝맺었다.

“다신 이 같은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미라벨. 시중인은 주인의 얼굴이니까.”

입술 안쪽 살을 피가 날 정도로 꾸욱 깨무는 미라벨과는 달리, 지켜보던 시중인들은 감동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잘못을 저지른 아랫사람을 너그러이 용서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릴리아는 자신들이 이제껏 원했던 진정한 주인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경에 눈물 한 방울이 막 떨어지려는 찰나.

“웃기고 있네.”

***

“너 지금 되게 앞뒤 안 맞는 거 알지?”

이 훈훈한 상황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빈정거림에 모두의 시선이 층계로 향했다.

리즈가 막 거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얼굴엔 삐딱한 웃음이 걸려 있었고, 느릿한 몸짓은 몹시도 불량스러웠다.

그런 모습은 단아하고 기품 있는 릴리아와 아주 좋은 비교 거리가 되었다.

“시중인은 주인의 얼굴이다, 그런데 넌 내 시중인을 쳤다, 고로 넌 나를 친 거다……. 네 논리대로라면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거 같은데, 맞아?”

리즈의 말과 태도에서 위험을 느낀 모니카가 용감히 나섰다.

“리즈 아가씨, 멈추세요. 그러지 않으시면 마님을…….”

하지만 모니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리즈가 그녀의 멱살을 움켜쥐고 코가 맞닿을 정도로 끌어당긴 까닭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눈만 끔벅거리는 모니카에게 리즈가 사나운 눈을 번뜩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도둑년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

모니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는 것을 뒤에 선 시중인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녀들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으므로.

“맘 같아선 네가 한 짓이라 다 까발리고 싶지만……. 어릴 때 네가 나한테 잘해 준 게 있어서 참는 거야.”

나직하게 속삭이는 리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유황불처럼 이글거렸다.

모니카는 그 열기에 질식할 것 같았다.

“두 번은 안 참을 줄 알아.”

리즈가 멱살을 놔주었다. 옆으로 밀칠 필요는 없었다.

사색이 된 모니카가 알아서 비켜섰으므로.

리즈는 제 앞에 트인 길을 천천히 걸어 릴리아와 마주했다.

시중인들은 가슴 졸이며 둘의 대면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걱정하는 쪽은 물론 릴리아였다.

하지만 그들의 우려와는 달리 릴리아는 살짝 손끝이 떨리는 것 외엔 대체로 평온했다.

지난 반절기 동안 그녀는 언니를 상대로 꽤 당당해졌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주눅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렇게 몸을 낮추는 편이 이 집에서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이기에 스스로 선택했는지도.

“언니. 오셨어요?”

릴리아가 공손한 태도로 꾸벅 인사를 올렸다.

입가에 맺힌 은은한 웃음은 핀으로 고정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안정적이었다. 리즈의 말이 있기 전까지는.

“내가 주웠어.”

“……네?”

“내가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 주워서 네 방에 갖다 놓으라 시킨 거야.”

“아…….”

릴리아는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 이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미라벨은 자기가 했다고 거짓말한 거죠?”

“날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그랬겠지. 내가 훔친 거라 의심받을까 봐.”

리즈의 서슴없는 말에 미라벨이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이내 상황을 파악한 릴리아가 픽 웃으며 그녀를 부드럽게 나무랐다.

“그렇게까지 생각하다니. 너무 앞서갔구나, 미라벨.”

다른 시중인들이라면 몰라도 릴리아에 한해 그 말은 진심이었다.

리즈는 망가뜨릴 목적이면 몰라도 탐난다고 가져갈 사람은 아니었다.

하긴, 그것도 이젠 옛말이지만.

“진작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면 좋았을걸. 그럼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릴리아가 이렇게 돼서 유감스럽다는 듯 미라벨에게 말했다.

“좀 더 잘 알아봤어야 하는데. 미라벨의 말만 믿고서 그만 훈계를 해 버렸네요. 언니.”

미라벨의 말만 믿고서.

릴리아는 그 말에 유독 힘을 주었다. 이유야 어떻든 그녀의 거짓말이 우선이니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미라벨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손이 나갔을까 묻는다면,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신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아랫사람의 잘못을 훈계하는 건 주인으로서 당연한 의무니까.

“그런데 릴리아.”

불현듯 리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곡을 찔렀다.

“내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알려 준 게 너 아니었니?”

“…….”

“그런 네가 어째서 대등하게 대해야 할 시중인을 가르치듯 훈계하는 거지? 그것도 손찌검을 하면서?”

고요하던 릴리아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마치. 스스로도 까맣게 잊고 있던 모순을 발견한 듯이.

“그, 그건…….”

당황한 나머지 릴리아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리즈의 너머로 저를 바라보는 예닐곱 쌍의 눈동자가 그녀의 머릿속 안개를 걷어 주었다.

허술한 변명은 오히려 그들의 신뢰를 떨어트릴 뿐이라고 판단한 릴리아는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언니. 생각해 보니 제가 주제넘었어요. 감히 언니의 시중인을…… 제가 뭐라고…….”

목소리에 밴 옅은 물기는 미라벨에게 옮겨 간 순간 흐느낌이 되었다.

“미안해…… 미라벨. 내가…… 흑, 정말 미안해. 원한다면 날 때려도 좋아.”

릴리아의 기지는 적절했다.

일개 하녀에게까지 허리 숙여 눈물 젖은 사과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다시 한번 시중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조금 전의 모순 따윈 까맣게 잊혔다.

하지만.

“내가 대신 때려도 돼?”

리즈에겐 통하지 않았다.

릴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마자 얼굴이 홱 돌아갔다.

촤악-, 소리가 지켜보는 이들의 귓가에 꽤 오래 맴돌았다.

“이건 미라벨을 때린 데 대한 복수야.”

리즈가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거창한 이유를 대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고작 이런 이유밖에 생각할 수 없네.”

어쩌겠어. 나는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걸.

“앞으로 조심해. 한 번만 더 내 사람 건드리면 가만 안 둬.”

그렇게 복수와 경고를 마친 리즈는 미라벨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낸 뒤 돌아섰다.

퍽 당당한 자태였다.

케인과 눈이 마주치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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