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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저 아가씨한테 할 말 있습니다 (29/65)


#29화 저 아가씨한테 할 말 있습니다
20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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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들어가도 돼요?”

듣기 좋은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리즈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들어와.”

그러곤 그사이에 자신의 실내복이 흐트러진 데는 없는지 살펴보았다.

살짝 구겨진 것 외엔 괜찮았다.

문이 열리고 케인이 들어왔다.

말끔한 얼굴이었다. 고통이 언제 스쳤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 사실에 작게 안도한 리즈의 눈에 그제야 들어온 것이 있었다.

그가 홍차와 갓 구운 마들렌을 쟁반에 받쳐 들고 있었다.

“그걸 네가 왜 들고 와?”

리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케인이 쟁반을 리즈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드시라고요. 좋아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이걸 왜…… 미라벨 시켜도 되는데.”

“제가 갖다 드리고 싶어서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낯빛도 그대로였다.

그래서…… 안심했다. 별 뜻 없는 말인 것 같아서.

“잘…… 먹을게.”

마침 배도 고팠던 찰나 잘 되었다.

리즈는 손을 뻗어 마들렌을 한 조각 집어 들었다.

그러곤 늘 하던 대로 홍차에 끝을 살짝 적셔 한 입 베어 물려 하는데…….

가만히 서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케인의 시선에 동작이 멈췄다.

“……안 나가?”

“다 드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지고 나가려고요.”

케인이 눈매를 부드럽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왜…….

찜찜함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리즈는 촉촉이 젖은 마들렌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맛이었다.

고소한 버터 향에 따뜻하고 포슬포슬한 식감. 입안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함은 그녀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잊고 이 순간이 주는 행복에만 집중하게 했다.

그 행복감이 사라진 건 그녀가 세 개째의 마들렌을 입속에 밀어 넣을 때였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리즈가 슬쩍 시선을 들었을 때, 그녀가 본 건 자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케인의 두 눈동자였다.

갑자기 리즈는 자신이 마들렌을 씹고 있는지 스펀지를 씹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쿨럭!”

급기야 사레까지 들리고 말았다.

입을 틀어막고 캑캑대니 케인이 얼른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러곤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입술을 톡톡 닦아 주었다.

리즈는 점점 더 의아해졌다.

손수건만 줘도 되는데. 왜 자꾸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거지?

얼굴은 또 왜 이렇게 가까운 거야?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네.

케인은 리즈가 입을 틀어막은 손까지 깨끗이 닦아 낸 뒤에야 비로소 손수건을 거둬들였다.

리즈의 호흡도 그제야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저 아가씨한테 할 말 있습니다.”

불쑥 내뱉은 케인의 말에 리즈는 다시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안 듣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런 위화감과는 별개로 묘한 호기심도 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저 사실은…….”

벌컥-.

갑작스레 난입한 누군가가 케인의 말을 잘랐다.

“아가씨!”

리즈와 케인의 시선이 동시에 열린 문으로 향했다.

나이 어린 시중인 하나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큰일 났어요!”

***

미라벨은 리즈의 명을 따르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다 베리움 후작부인의 부름을 받았다.

사유는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오늘 모임에 입고 갈 의상 좀 골라 주지 않겠어? 다른 여인들이랑 색과 디자인이 겹치지 않게.”

자신의 옷은 자신이 선택하는 베리움 부인이었지만, 한 달에 한 번 있는 처녀 적 친구들과의 모임에 갈 때면 이렇듯 미라벨의 손을 빌렸다.

미라벨은 어릴 적 양재사 친척 밑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배운 탓에 그런 쪽으로 안목이 좋았다.

그녀는 부인만의 개성이 잘 드러나도록 의상과 구두, 코르사주를 골라 주었고, 거기에 맞는 향수와 색조 화장품까지 일러 주었다.

그러느라 목걸이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다.

베리움 부인의 처소에서 나와 식당으로 이동하던 중, 미라벨은 관엽 식물 하나가 복도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가 이걸 여기에 두었담?”

쯧쯧.

미라벨은 혀를 끌끌 차며 빈틈투성이인 새 하녀장을 나직이 질책했다.

그러곤 저라도 옮기기 위해 다리를 넓게 벌려 화분을 껴안는데,

“미라벨 님. 제가 도울게요.”

후배 시중인 레나가 달려와 힘을 보태려 했다.

“됐어. 이 정도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 너는 가서 네 일이나 봐.”

“그래도…….”

“으쌰!”

미라벨이 기합 소리와 함께 화분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타닥-, 하고 돌과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 일에 집중하느라 미라벨은 깨닫지 못했다. 대신 레나가 그녀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을 주워 들고 멀어져 가는 미라벨을 부르려다 멈추었다.

어디서 본 듯한 목걸이였다.

손바닥에 놓인 에메랄드 펜던트를 내려다보며 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때마침 입구에 들어선 시중인들이 멀뚱히 서 있는 레나를 발견하곤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이것 좀 봐 봐.”

레나가 손바닥을 그들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니?”

동료 시중인의 눈이 반짝했다.

“이거, 릴리아 아가씨 거 같은데? 베르트 소공작님께 선물로 받은.”

그 말에 다른 시중인들도 뒤늦게 알아보곤 짝-,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맞네. 직접 걸어 주시면서 고귀한 당신에 한참 못 미치는 미천한 물건이지만 받아 주시면 평생 영광으로 생각하겠다며 낭만적인 멘트까지 곁들이셨잖아.”

“나도 기억나.”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러자 최초로 목걸이를 발견한 레나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 전에 미라벨 님에게서 떨어졌어.”

“미라벨 님?”

일순 모두의 시선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의혹으로 빛났다.

“에이, 설마. 네가 잘못 봤겠지.”

“아닌데. 분명히 봤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아가씨의 목걸이를 내가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건 그런데…….”

사건이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고, 시중인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야?”

때마침 주위를 지나던 모니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곤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제 아랫사람들을 매섭게 훑던 모니카의 눈이 목걸이를 발견하곤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이, 이게 어디서 났지?”

그녀가 상기된 얼굴과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시중인들은 그녀가 이토록 흥분하는 이유가 주인 아가씨의 목걸이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한 놀라움 때문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레나가 봤는데 미라벨 님에게서 떨어졌대요.”

“이게 왜 미라벨 님의 주머니에서 나온 걸까요? 하녀장님.”

시중인들이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모니카를 쳐다보았다.

모니카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니까.

어째서 자신이 릴리아의 방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 목걸이가 미라벨의 손에 있었던 건지.

어디에 떨어트렸는지 샅샅이 찾아도 보이지 않던 목걸이가 어째서 하필이면 미라벨의 손에…….

‘가만.’

당혹으로 일그러진 모니카의 눈이 일순 생기로 반짝였다.

범행을 미라벨에게 덮어씌우면 어떨까?

물론 본인은 절대 안 훔쳤다고 하겠지만, 모든 상황이 그녀를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지 않나.

어쩌면 이것이 그녀를 이 집에서 쫓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 모른다.

리즈 아가씨가 좀 문제긴 하다만…… 아니지.

오히려 리즈 아가씨까지 묶어서 보내 버릴 수 있을지도. 아가씨는 일을 좀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니 틀림없이 마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될 테지.

마님께서 누구 편을 더 들까?

맞선을 두 번이나 퇴짜당한 제 친딸? 아니면 저를 사교계의 여왕으로 끌어올려 줄 미래의 공작부인?

답이 너무 뻔하잖아.

모니카의 얼굴에 이젠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리즈가 싫었다.

뭐든 미라벨, 미라벨. 내가 미라벨보다 저를 먼저 알고 더 챙겼는데.

갖고 싶다는 거 먹고 싶다는 거 사러 발에 땀나게 뛰어다녔는데 총애하는 건 미라벨이었잖아?

나한텐 맨날 막말이나 하더니.

모니카는 언제나 리즈의 몰락을 기도했다.

보아하니 이제 그날도 머지않은 듯했다.

“목걸이 이리 줘.”

모니카가 손을 내밀자 레나가 그 손에 촤르르 목걸이를 떨어뜨렸다.

그것을 움켜쥔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거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미라벨 님!”

관엽수의 흐트러진 잎을 정리하던 미라벨이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섰다.

“무슨 일이야?”

미라벨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는 모니카와 그 뒤에 늘어선 묘한 눈초리의 후배 시중인들을 발견하곤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조금 전에 제가 하도 어이없는 소리를 들어서 확인 좀 해 보려고요.”

“어이없는 소리 뭐?”

둥그렇게 뜬 눈으로 어리둥절해 있는 모니카의 눈앞에 목걸이 하나가 대롱거리며 나타났다.

“이거 미라벨 님이 갖고 계시던 게 맞나요?”

“……어?”

미라벨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제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 아마도 맞는 듯했다.

“맞아. 내가 떨어뜨렸나 보구나.”

일말의 동요도 없는 시인에 모니카가 픽 하고 실소를 내뱉었다. 다른 시중인들의 얼굴엔 실망의 빛이 감돌았다. 하지만 눈치가 썩 빠르지 않은 미라벨은 이 상황이 제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잘됐네. 그거 네가 릴…….”

“미라벨 님이 그러실 줄은 몰랐어요.”

“……?”

“세상에. 도둑질이라뇨.”

미라벨의 표정이 황당함을 띠었다. 모니카의 비난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오해받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냐, 그런 거. 설마 내가 도둑질을…….”

“그럼 이걸 왜 미라벨 님이 가지고 계신 건데요? 릴리아 아가씨의 보석함 속에 얌전히 있어야 할 물건이.”

“그건…….”

미라벨은 잠시 고민했다. 고민하고 망설이는 게 이 상황에서 전혀 득 될 게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리즈 아가씨의 이름을 말해도 될까?

미라벨은 아니라고 보았다.

자신이 오해받았듯 리즈도 오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가 과거 릴리아를 얼마나 미워했는지를 돌이켜보면 아예 말도 안 되는 오해는 아닐 터였다.

가뜩이나 입지가 좁아져 있는 리즈를 더욱 궁지로 내몰 수는 없었다.

리즈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어야 한다.

“주…… 주웠어.”

“주웠다고요?”

“그래. 주웠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내가 주웠어.”

모니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목걸이는 우리 릴리아 아가씨가 아까워서 잘 끼지도 않고 보석함 속에 고이 모셔 둔 장신구라고요. 함부로 바닥에 굴러다닐 이유가 없잖아요.”

“…….”

이런 순간이 처음인 미라벨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입술을 꾸욱 깨물고 바닥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모니카가 한 발 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미라벨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리즈 아가씨가 시킨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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