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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남주의 고충을 이해하다 (28/65)


#28화 남주의 고충을 이해하다
202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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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아는 리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라면 좀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베르트 소공작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다고, 반드시 해 보이겠다고 생각했다.

“차가 맛있군요.”

“네…….”

“내일 저와 바람이나 쐬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바람 쐬기 좋은 장소를 봐 두었는데.”

“제가 내일은 좀 곤란해서요.”

“그럼 모레는…….”

“모레도 제가 좀…….”

“그럼 언제가 괜찮겠습니까? 릴리아 양이 편할 때 언제든 맞추겠습니다.”

“글쎄요, 저도 언제가 될진 장담 못 하겠어요. 당분간은 집에 계속 있어야 할 것 같고…… 또…….”

“그럼 저도 언제까지고 기다리겠습니다. 릴리아 양이 시간 날 때까지.”

“아뇨, 그러지 마세요!”

갑작스레 저도 모르게 단호한 말투가 나오자 베르트 소공작보다 릴리아 본인이 더 놀랐다.

그녀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둥대며 제 참뜻을 전했다.

“아…… 그러니까 제 말은……. 소공작님께서도 많이 바쁘실 테고, 또 저를 기다리느라 다른 분들과의 소중한 약속을 못 지키는 건 또 그것대로 안타까우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안하게 생활을 즐기시라는 뜻에서…….”

이를 멀리서 지켜보는 인물이 있었다.

쯧쯧.

창틀에 기대어 이 광경을 내려다보며 리즈가 혀를 끌끌 찼다.

“참 애쓴다, 애써.”

삼 층에 있어서 대화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는 눈치로 알 것 같았다.

“거절을 못 하네, 거절을.”

하긴, 릴리아는 남을 기분 좋게 해 주는 품행이 몸에 밴 여인이니 거절은 어쩌면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입술을 달싹이며 불안정해 보이는 릴리아를 내려다보며 리즈가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남주가 좀 도와줘야 하는데.”

원래라면 남주가 저 순간에 나타나서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로 릴리아를 데리고 나와야 하는데. 그래야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되는데, 도무지 그럴 기미가 없으니.

언질이라도 좀 줄까?

리즈는 방을 나와 제일 먼저 보이는 시중인에게 물었다.

“케인은 어딨지?”

“아마 자기 방에 있을걸요?”

“아…… 그래?”

리즈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복도 모퉁이를 막 접어들려는 찰나 모니카가 그녀 앞을 쌩 하고 스쳐 지나갔다.

흠칫 놀라 멈춰선 리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네. 뭐가 저리 급해서는. 하녀장이 되더니 많이 바쁜가.’

리즈는 의아하게 여기며 모니카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한데, 순간 발밑에 반짝이는 뭔가를 발견한 리즈가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를 굽혀 떨어진 물건을 집어 들어 보니, 얇은 금줄에 엄지손톱만 한 에메랄드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였다.

‘모니카 건가?’

하지만 그런 것치곤 꽤 값이 나가 보였다.

리즈는 목걸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쩐지 눈에 익은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이걸 어디서 봤더라?’

아…….

기억은 금세 떠올랐다.

릴리아가 베르트 소공작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어머니와 시중인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베르트 소공작이 직접 그녀 목에 걸어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 떨어져 있는 걸까?

고개를 갸웃하며 목걸이를 살피는데, 문득 잠금 고리 부분이 끊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이것 때문이구나. 이거 고치려고.’

리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모니카는 이미 사라지고 없으니 목걸이는 도로 릴리아의 방에 가져다 두는 수밖에 없었지만, 리즈는 그것을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일단은 케인부터 만나야지.

만나서 여주가 베르트 소공작의 끈질긴 구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좀 도와주라고 넌지시 권해 봐야겠다.

그게 가장 우선이니까.

리즈는 목걸이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케인의 방문 앞으로 다가가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올렸는데.

“으으윽…….”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문을 타고 들려왔다.

“……!”

리즈의 머릿속에 퍼뜩 스쳐 지나가는 일이 있었다.

‘약 때문이야.’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겪고 싶지 않으면 겪지 않아도 되는 자신과는 달리, 케인은 매 열흘마다 그 고통의 순간을 마주해야 했다.

예전이었다면 당장에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 그를 안아 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리즈는 노크하려던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그녀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케인은 고통을 잘 참는 남자였다.

언젠가 함께 나간 사냥터에서 리즈가 활을 오조준하는 바람에 케인의 어깨 안쪽에 화살이 박힌 적이 있었다.

살갗을 깊숙이 파고드는 미늘 촉이라 꽤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오히려 울먹이는 리즈를 달랬다.

열병에 걸린 리즈를 간호하다 그 열병을 고스란히 옮았을 때도 그랬다.

너무 멀쩡해서 아픈 줄도 몰랐다. 나중에 그를 졸라 등에 업혔을 때, 맞닿은 가슴에 전해지는 용광로 같은 열감을 느끼고서야 그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랬던 그가 저렇게 통증을 호소하니, 그 고통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리즈는 짐작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과 먹는 양도 달랐으니.

리즈는 저도 모르게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참. 피아노 칠 때도 그러더니, 설마 아직도 저 남자에게 미련이 남은 걸까.’

하지만 리즈는 이내 도리질을 치며 제 생각을 부정했다.

‘아니야. 좋아하는 감정과 연민은 별개랬어. 비단 케인이 아니더라도 이런 마음이 들었을 게 분명해.’

잠시 후 스르르-, 하고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마 고통이 멎으면서 긴장으로 웅크렸던 몸을 펴는 것이리라.

리즈는 안심했다.

이제 멈추었구나.

물론 열흘 뒤엔 또다시 이런 고통을 반복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지나갔다.

리즈는 케인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몸을 돌렸다.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

릴리아는 베르트 소공작이 계속해서 자기 뜻대로 떨어져 나가지 않자 짜증이 났다.

아니, 이 정도 했으면 좀 알아먹을 때도 되지 않았나?

조금 더 세게 말해야 하나? 아니면 어머니께 말해 볼까?

“요즘 소공작이 자주 오는구나. 약혼을 빨리 진행하길 바라는 눈치던데, 넌 어떠니?”

하지만 어머니의 말에 릴리아는 차마 생각했던 바를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근데 공작님과 그 부인께서 반대하지 않으실까요? 저 같은 사생아를 며느리로 들이시기 탐탁지 않으실 텐데…….”

제발 반대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릴리아가 넌지시 물었다.

“조금 그러기도 한 거 같다만, 소공작이 워낙 네게 빠져 있어서 말이야.”

“언니도 아직인데 제가 먼저 가도 될는지…….”

“어머, 이렇게 제 언니를 생각하다니.”

릴리아의 의도를 모르는 부인은 감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 건 걱정 안 해도 된다. 오히려 사람들은 네가 언니보다 잘났기 때문에 좋은 짝 만나 먼저 결혼하는 거라고 말하더라.”

“아…… 네.”

릴리아의 얼굴에 일순 낭패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어머니를 공략하긴 실패한 것 같다. 그럼 어쩌지?

베르트 소공작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 찰거머리 같은 인간은 떨어질 기미가 없단 말이야.

순간 짜증이 치솟은 릴리아가 한탄하듯 베리움 부인에게 물었다.

“베르트 소공작님께선 제 어디가 마음에 드셨을까요? 사교계의 최고 인기남이시잖아요. 사교계엔 훨씬 더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들이 많을 텐데.”

“글쎄. 아마도…….”

어머니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 단아하고 정숙한 태도 때문 아니겠니? 원래 인기 있는 남자일수록 조신한 여인을 선호하는 법이니까.”

조신한 여인이라…….

어머니의 말을 가만히 되뇌던 릴리아의 입꼬리가 천천히 위로 당겨졌다.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아가씨 무슨 걱정 있으세요?”

리즈가 줄곧 멍하니 있자 미라벨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묻기 전까진 리즈는 자신이 멍하니 있는 것도 몰랐다.

케인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기, 미라벨.”

리즈는 미라벨에게 넌지시 물었다.

“네, 아가씨.”

“케인 말인데…….”

“…….”

케인의 이름이 나오자 미라벨의 입매가 굳어졌다.

“괜찮아 보여? 어때?”

“뭐 가요?”

“아니, 그러니까…… 멀쩡하더냐고.”

“너무 멀쩡하던데요?”

“아…… 그럼 됐고.”

“혹시 아가씨…….”

머쓱한 얼굴로 대화를 마무리 짓는 리즈에게 미라벨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아직도 케인한테 마음 있으신 건 아니시죠?”

“아냐. 그런 거.”

별소릴 다 듣겠네.

“그냥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그래.”

리즈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운명의 작대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아는데 마음이 남아 있을 리가.

그저…… 잠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을 뿐이다.

“그럼 다행이고요.”

주변 정리를 마친 미라벨이 방을 나가려 돌아섰다.

문득 화장대 위에 올려진 낯선 목걸이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거. 아가씨 거예요?”

미라벨이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거.”

온통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 탓에 리즈는 릴리아의 방에 목걸이를 놔두고 온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거야. 릴리아 것 같은데 내려가는 김에 릴리아의 방에 가져다줄래?”

“네, 그럴게요.”

미라벨이 나가고 리즈는 안락의자에 기대앉아 창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햇빛이 밝게 내리쬐는데도 초겨울답게 스산한 정경이었다.

여름과 가을, 녹음과 단풍으로 싱그러움과 화려함을 뽐내던 나무는 어느새 헐벗은 나뭇가지만 차가운 대기 중에 드리우고 있었다. 꽃들이 다채로운 색상을 뽐내던 화단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황량한 겨울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안 그래도 심란한 리즈의 마음이 더욱 심란해지고 말았다.

‘이제 그만 황궁에 돌아가시지.’

리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케인이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거기에 이젠 케인을 눈앞에서 치우고 싶다는 마음 외에 또 다른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그만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하루라도 빨리 여주와 잘돼서 원작처럼 함께 입궁했으면 했다.

그러면 모두가 좋을 텐데.

케인에게 뭔가 거창한 속셈이 있는 걸까?

이를테면, 자신의 등장이 가장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시점을 노린다든가 하는…….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리즈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곤 문을 향해 조심스레 소리 내어 보았다.

“……미라벨?”

하지만, 그녀가 아니라는 걸 리즈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무심결에 동요하는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그 증거였다.

문 밖의 방문자가 케인……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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