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언니 결혼하실래요?
(27/65)
27화 언니 결혼하실래요?
(27/65)
#27화 언니 결혼하실래요?
2023.06.27.
“릴리아, 제이나 베르그송 부인 알지? 지난번 네 성인식에 꽃다발을 선물했던.”
조찬을 들던 중 베리움 부인이 릴리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릴리아가 아침 햇살만큼이나 화사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리시안셔스에 장미를 섞은 꽃다발 말하는 거죠? 정말 너무 예뻤던 기억이 나요.”
“원, 이렇게 기억력이 좋을 데가. 리즈라면 절대 기억 못 했을 거다.”
“저도 기억합니다.”
리즈의 말에 부인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랬니? 난 네가 워낙 세심하지 못해서 그런 건 기억도 못 하는 줄 알았다.”
“제가 기억 못 하는 건 기억할 가치가 없어서겠죠.”
뒤에 서 있던 미라벨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러니까 미움받지.’
케인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혹시 베르그송 부인에 대해 제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있으면 뭐든 말씀해 주세요. 어머니 뜻에 따를게요.”
“넌 정말 예쁜 말만 하는구나, 릴리아.”
리즈의 되바라진 대꾸에 잠시 찌푸려졌던 부인의 얼굴이 다시금 환하게 펴졌다.
“베르그송 부인이 소장 중인 미술품을 몇 점 내다 판다는구나. 그 미술품들 중 화가 리날도의 모닝글로리라는 작품이 있거든? 담백하게 그린 크로키풍 그림인데 그걸 좀 사 오너라. 가격은 부르는 대로 다 주고. 난 그런 거 깎는 거 정말 교양 없고 무식한 짓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부인의 시선이 언젠가 물건값을 절반도 넘게 깎은 적이 있는 리즈에게 잠시 머물렀다. 리즈는 저와 관계없는 이야기라는 듯 태연한 얼굴로 커피를 홀짝였다.
“그럴게요. 어머니 말씀대로 하나도 깎지 않고 제값에 사 올게요.”
릴리아는 순하고 예쁘게 복종했다.
“짐이 무거울 테니 시중인을 한 사람 데려가거라. 누굴 데려갈 거니?”
부인의 말에 릴리아의 눈길이 한순간 케인에게로 향했다.
‘그래. 당연히 케인이지. 케인을 데려가야지.’
커피 잔에 닿은 리즈의 입술이 확신으로 휘어졌다.
“저 혼자서도 충분해요. 저 힘 좋아서 무거운 거 잘 들어요.”
“…….”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리즈의 입매가 탄성을 잃은 활시위처럼 원래대로 돌아왔다.
베리움 부인이 그건 안 될 말이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럴 순 없지. 이제 곧 베르트 소공작의 약혼녀가 될 여인인데 약혼반지 끼기도 전에 손 다칠라.”
“…….”
릴리아의 미소가 살짝 흐려졌지만 자신 외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어머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릴리아는 다시 선택을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번에야말로 케인이지.’
이번에야말로 리즈는 확신했다.
장장 두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케인과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것도 마차라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
“그럼, 언니랑 갈게요.”
“뭐, 나랑?”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리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릴리아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식당 벽면에 나란히 서서 대기하는 시중인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훑으며 말했다.
“일을 시키기 위해서 누군가를 데려가고 싶지 않아요. 짐은 제가 들어도 되니 나들이 삼아 언니랑 다녀올게요.”
“아…….”
시중인들에게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천사 같은 우리 막내 아가씨. 박수라도 칠 기세였다.
감탄하지 않은 건 리즈, 미라벨…… 그리고 케인뿐이었다.
***
마차가 주택가를 벗어나 추수가 끝난 황량한 벌판에 막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더 이상 볼만한 풍경이 없어지자 리즈는 시선을 그만 창에서 거둬들였다.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은 릴리아가 보였다.
‘너도 참 어리석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리즈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리즈가 생각하듯 릴리아는 어리석어서 그리 행동한 게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해.’
케인을 데려가는 건 그녀가 이전에 보여 주었던 신념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누굴 데려가야 한다면 차라리 언니를 데려가자. 그러면 최소한 자신이 안 보는 데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일은 피할 수 있겠지 싶었다.
며칠 전 릴리아는 우연히 복도를 지나치다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음색도 훌륭했고, 선율의 흐름도 매끄러웠다.
감탄의 찬사가 절로 흘러나올 만큼 아름다운 연주였다.
하지만, 연주자의 정체를 안 순간 그 연주는 가장 불결하고 듣기 싫은 소음이 되었다.
결국은 언니가 저렇게 해서 케인을 유혹하는구나.
외모로 통하지 않으니 저걸로 남자의 마음을 흔드는구나.
예전이었다면 그래 봤자 케인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 언니를 대하는 그의 모습은 그저 친절하고 반듯한 시중인의 태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최근의 케인은 조금 달라졌다.
언니를 먼저 챙기고, 언니의 재활을 자처해 돕고, 언니가 말도 없이 사라졌던 날은 언니를 찾아 밤새 거리를 헤맸다지.
다행히 두 사람은 따로 들어왔지만, 릴리아는 그날을 기점으로 마음 한구석에 자라난 불안의 싹을 확실히 감지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불안을 잠재우는 길은 두 사람이 한데 있지 못하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케인을 데려왔더라면 좀 편했을 텐데.”
리즈가 케인 이야기를 꺼내자 릴리아가 티 나지 않게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대로도 괜찮아요. 그리고 전 케인을 하인이 아닌 대등한 존재로 대하고 싶어요. 일부러 일을 시키기 위해 데리고 다니고 싶진 않아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니까요.”
캬아-.
아무것도 모르는 리즈는 조금 감탄했다.
역시 원작 속 여주답구나. 그에 반해 자기는 얼마나 케인을 부려 먹었던가.
‘케인, 이리 와.’
‘케인, 날 안아 줘.’
‘케인, 내 옆에만 있어.’
다시 생각해도 제 만행이 부끄러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근데 언니, 언니 요즘 왜 구혼 활동 안 하세요?”
갑자기 생각난 듯 릴리아가 물었다.
“잠깐 쉬고 있어. 아직 많이 늦은 나이도 아니고.”
“어머, 많이 늦지 않았다뇨?”
릴리아의 다소 격앙된 말투에 리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릴리아 본인도 스스로 그렇다고 느꼈는지 얼굴을 붉히며 제 참뜻을 밝혔다.
“아니…… 제 생각엔, 언니가 너무 편안하게 생각하시는 게 아닌가 해서요. 성인식 이후로 친하게 지내고 있는 엘프리드 남작 영애는 열일곱인데 벌써 약혼식을 올렸더라고요. 저도 혼인 얘기가 나오고 있고요.”
“그럼 네가 먼저 하면 되잖니?”
뭐가 문제냐는 듯 리즈가 말했다.
“그래도…… 동생이 언니를 앞지를 순 없으니까요. 그건 동생으로서 할 일이 아니죠.”
릴리아가 절대 그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도리가 무슨 상관이니? 임자 있는 사람이 먼저 하는 거지.”
여러 번 생각을 거듭한 끝에 신중히 말을 내뱉는 자신과는 달리, 생각이라곤 거치지 않은 듯 쉽고 가볍게 말하는 언니를 보며 릴리아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하지만 리즈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에겐 혼사 말고 생각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 진전이 왜 이렇게 더디지? 혹시 내가 괴롭혀 주지 않아서인가?’
하긴, 사랑은 장애물을 필요로 하는 법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릴리아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원작대로 따라가다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을 그대로 답습하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아니어도 방해물은 또 있었다. 바로, 베르트 소공작이라는 방해물이.
“언니, 결혼하실래요?”
“……?”
뜬금없는 질문에 리즈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릴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결혼? 누구랑?”
“베르트 소공작이요.”
“…….”
“제가 양보할게요. 원래 언니 짝이잖아요.”
이게 다 무슨 소리일까?
베르트 소공작이라니.
제게 푹 빠진 남자를 내게 양보한다고?
혹시, 그 정도로 자신이 불쌍해 보였나?
아니면…….
리즈는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시중인을 대등한 존재로 생각할 만큼 착한 여주가 저 결혼하기 싫은 남자를 내게 떠넘길 리가.
“사양할게.”
리즈는 단번에 거절했다. 그 단호함이 마음 쓰였는지 릴리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언니가 하루빨리 결혼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는데. 아무래도 제가 주제넘었나 봐요.”
그렇게 생각할 것까지야.
시선을 떨군 채 힘없이 앉아 있는 릴리아에게 리즈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선 말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맙지만, 내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리고…….”
조언을 덧붙인 건 순전히 충동적이었다.
“다음엔 안 그랬으면 좋겠어. 너 좋아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느니 하는 말 말이야.”
“…….”
“싫은 사람을 떠넘기려는 걸로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까. 물론 네가 그럴 리는 절대로 없겠지만.”
“…….”
“그리고 사람은 때때로 거절도 할 줄 알아야 해. 당장은 상처를 좀 받더라도 단호하게 끊어 내는 편이 나아. 안 그러면 상대에게도, 그리고 너 자신에게도 더 큰 상처가…….”
리즈의 조언을 경청하는 릴리아의 태도는 나무랄 데 없었지만.
맞잡은 두 손은 그렇지 못했다.
엄지손가락이 머물렀다 떨어진 손바닥엔 깊은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
사람은 거절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릴리아에겐 그 말을 실천할 기회가 많았다.
베르트 소공작이 매일같이 릴리아를 찾아왔으니까.
하지만 릴리아는 그를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는 예쁨받는 일이라면 백 가지도 넘는 미소와 천 가지도 넘는 말을 자유자재로 변주하여 적재적소에 적용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미움받는 짓은 단 한 가지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날 마차 안에서 고개까지 끄덕이며 경청했던 태도와는 달리, 리즈의 말을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당장은 상처를 좀 받더라도 단호하게 끊어 내야 해.’
그건 언니, 당신이나 할 수 있지.
언니처럼 다른 사람이 싫든 좋든 들이대고, 상처받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독설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나.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독설을 내뱉을 수가 있지?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을 상처 줄 권리는 없어.
릴리아는 언니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중인을 마음대로 부려 먹을 때 그들이 싫어하는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걸까?
케인만 해도 곤욕스러워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제 마음대로 부려 먹었잖아?
그러니까 시중인들이 모두 싫어하지.
결론적으로 언니의 방식은 틀렸다. 어머니도 시중인들도 릴리아의 편이다. 곧 케인도 제 편이 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언니의 지난 십 년간의 영향력이 남아서 저러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