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자기 자신에게 질투할 수도 있나 (26/65)


#26화 자기 자신에게 질투할 수도 있나
202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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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마치고 처소로 돌아오니 미라벨이 세탁물을 정돈하고 있었다.

리즈는 가운을 벗고 미라벨이 미리 꺼내어 둔 크레프드신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럼 쉬세요, 아가씨.”

미라벨이 그렇게 말하고서 리즈의 가운을 팔에 걸치곤 나가려는데,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다시 몸을 돌렸다.

“이거…… 잘 썼어요.”

그녀가 뭔가를 내밀면서 말하는데, 내려다보니 리즈 자신이 주었던 돈주머니였다.

“이걸 왜 돌려줘? 갖고 있어.”

“아니에요. 너무 많이 주신걸요.”

“그럼 놔뒀다가 또 필요할 때 써. 데이트할 때 쓰면 되잖아?”

“그럴 순 없어요. 이제 다신 데이트 따위 안 할 거예요. 그러느라 자리 비운 틈에 아가씨가 사라지신 걸 생각하면…….”

“사라진 거 아니라니까. 밤샘 연회 갔다고 서한 보냈잖아?”

그 로레인 귀족이.

“그래도 안 돼요. 저 어젯밤에 아가씨가 진짜로 가출하신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마님은 신경도 안 쓰…….”

미라벨이 저도 모르게 베리움 부인의 이야기를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베리움 부인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아가씨가 상처받을까 봐.

“어머니는 신경도 안 쓰셨다고?”

하지만 리즈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게 뭐? 늘 있는 일이잖아? 오히려 신경 쓰시고 울고불고하시는 게 어머니답지 않은 일이지.”

“그래도…….”

“이 집에서 날 걱정해 주는 건 미라벨 너 하나면 충분해. 네가 열 사람 몫을 해 주는데 무슨 상관이야?”

리즈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잠시 처져 있던 미라벨의 기분도 곧 밝아졌다.

그러더니 리즈가 물었다.

“얼마나 나 찾아다녔어? 너 혼자 찾았어?”

“아…….”

미라벨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케인도 같이 찾아다녔다, 아니 사실은 케인이 더 사색이 되어서 뛰쳐나가더란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가씨의 마음이 다시 케인에게로 향할까 봐서.

“네…… 그럼요. 저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데 어찌나 초조하던지.”

미라벨은 속으로 사죄했다.

‘미안해요, 아가씨.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참, 미라벨.”

“네?”

“데이트는 어땠어?”

“좋았어요. 튤립 축제도 좋았고, 아가씨가 가르쳐 주신 여관 식당 밥도 맛있었어요.”

후우…… 여관 식당 밥이라니. 내가 고작 밥이나 먹으라고 그 여관을 가르쳐 준 건 아니었는데.

휴가 준 보람이 없군.

“그나저나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뭐가?”

리즈가 아무 생각 없이 물기 묻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 내며 물었다.

“그날 화장실에서 웬 여자가 치마에 뭘 흘려서 낑낑대고 있기에 도와주었거든요? 그런데 그거랑 똑같은 자국이 아가씨가 그날 입었던 옷에도 묻어 있지 뭐예요? 하물며 옷도 똑같았어요. 정말 신기하죠?”

“…….”

***

그로부터 며칠은 별다른 일 없는 평온한 날의 연속이었다.

미라벨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바람에 집 안에서만 있어야 했던 것 말곤.

평소에도 집 밖에 잘 나가지 않았던 리즈인지라 딱히 답답할 건 없었다.

그렇게 오늘도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다, 문득 복도 끝에 위치한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그곳은 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틀어박혀 계시던 피아노실이었다.

마침 할 일도 없겠다, 간만에 피아노 연습이나 해 볼까 싶었다.

리즈는 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피아노를 꽤 잘 쳤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녀는 유명 작곡가의 최신 곡 악보는 죄다 사서 제 손으로 직접 쳐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꾸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관뒀다. 귀족 영애답지 못하다고.

하지만 그런 어머니도 살롱을 열 때면 그녀를 꼭 피아노 앞에 앉혀서 연주하게 했다.

‘우리 딸이 이 정도랍니다’라는 걸 뽐내기 위해.

하지만 연주가 끝나고 리즈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질 때면 어머니는 되레 코웃음 치며,

‘이 정도로 박수받다뇨? 하찮은 실력인데.’

하고 자식을 폄하하는 것으로 겸손을 드러냈다.

겸손하려면 혼자 겸손하시지.

어머니의 그런 태도 때문에 한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짜증 나서.

하지만 오랜만에 할 일도 없으니 한 곡 쳐 볼까?

리즈는 검은색 유광 피아노를 마주하곤 잠시 눈을 감았다.

‘뭘 쳐 볼까? 그래, 그게 좋겠다.’

아버지에 대해 유일하게 남은 추억이 있다면 함께 듀엣곡을 쳤던 것이다.

리즈는 피아노에 손을 올리고, 아홉 살 무렵에 아버지와 함께 연주했던 페를리아의 ‘다이아몬드 세레나데’의 고음 파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저음 파트는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다.

낮게 깔리는 선율이 있어 주면 좋겠지만, 지금은 없으니까 뭐. 없는 대로 치는 수밖에.

톡톡톡-.

아버지는 건반 위에서 춤을 춘다고 생각하랬다.

손동작 하나, 손목 돌림 하나까지 놓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리즈는 그 말대로 손가락 구부림, 손끝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또 썼다.

어머니는 티도 안 나는데 뭣 하러 그렇게 일일이 신경 쓰냐고 하셨지만,

휴우-.

귀부인들의 이목에 쏠리는 신경의 십분의 일만 귀에 집중한다면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런 하나하나의 섬세함이 얼마나 음악을 질적으로 높게 만드는지를…….

그때였다.

소리가 갑자기 풍성해진 건.

리즈는 눈을 떠 옆을 돌아보았다.

음악에 취해 있느라 옆에 누가 와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제야 보였다.

‘케인?’

케인이 세컨드 파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리즈는 놀라서 손을 떼려 했다. 그러자 케인이 청량하게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계속해요. 멈추지 말고.”

이런 적이 있었던가?

아니…… 것보다 케인이 피아노를 칠 줄 알았던가?

자신이 칠 때 뒤에 서 있던 적은 있었다. 아니, 많았다.

케인을 유혹하기 위해 종종 피아노 실력을 뽐내기도 했으니까.

한데 같이 앉아서 쳐 본 적은 없었다. 원작에도 케인이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내용은 없었잖아?

게다가 너무 잘 치는데?

리즈는 자신보다 더 섬세하고, 더 자유자재로 다양한 스킬을 구사하고, 더 풍성한 음을 표현해 내는 케인을 보며 경악했다.

갑자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간 자신의 보잘것없는 연주를 보며 얼마나 비웃었을까?

그가 황태자라는 걸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황족들은 세 돌이 되기 전에 문무를 비롯한 온갖 예술 교육을 받는다는 걸 그때도 알았으면 좋았잖아?

하지만 그럼에도 이 상황 자체가 싫진 않았다.

오히려 곡이 진행될수록 그의 연주는 리즈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가 자아내는 낮고 단단한 음들이 리즈의 높고 불안한 음들을 대들보처럼 잘 떠받쳐 주었으니까.

마침내 곡이 절정에 달하고 두 사람의 손이 교차되었다.

케인의 팔이 리즈의 양팔 사이에 들어오고, 그의 새끼손가락이 리즈의 엄지손가락에 슬쩍 걸쳐졌다.

그런데…… 왜?

리즈는 순간 제 심장을 간질이는 기묘한 감각에 움찔 놀라고 말았다.

뭐지?

음악에 너무 심취한 걸까?

연주가 고조됨과 더불어 흥분 상태에 이른 신경이 이 미묘한 스킨십조차 자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그렇게 의아해하는 있는 사이 케인의 손은 다시 멀어져 갔다.

휴우-.

작은 한숨과 더불어 내려앉는 어깨를 느끼며 리즈는 여태 제가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생각할수록 우스운 일이었다.

고작 손가락 하나 닿는 게 뭐라고.

손도 잡고 껴안기도 하고, 지난번 수중 재활 땐 맨살을 맞대기도 했으면서.

이게 다 음악 때문이었다.

음악은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면이 있으니 케인에 대해 품었던 거부감도 일시적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하긴, 거부감을 지우고 보면 케인은 꽤 괜찮은 남자지. 훈훈하게 잘생기고, 다정하며 든든한 남자.

그런 남자가 자발적으로 다가오는 스킨십이란 꽤 황홀할 테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고, 다시 연주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

멀어진 케인의 손가락이 거미 다리처럼 이쪽으로 슬금슬금 올라오는 것을 지켜보자 리즈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느낀 그 짜릿한 감각을 다시금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리즈에게 공포를 선사했다.

쾅! 쾅! 쾅!

갑작스러운 그녀의 깽판에 케인의 손이 건반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리즈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제가 뭐 실수했어요?”

“아니, 그만하고 싶어서.”

리즈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요? 재미있었는데.”

“난 재미없어.”

“아…… 그렇군요. 할 수 없죠.”

케인이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피아노 칠 줄 안다는 말 없었잖아.”

리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제가 말 안 했던가요? 어릴 때 시골에서 잠깐 배웠어요. 옆집에 음악 선생님이 사셨거든요.”

“아…… 그래?”

그놈의 시골 타령은 언제까지 할 건지.

“아무튼 앞으로 내 연주에 끼어들지 마. 난 누구랑 같이 치는 거 안 좋아해.”

“그래요? 전 아가씨가 또 같이 쳐 줬으면 하시는 것 같아서 끼어든 건데.”

“내가? 내가 언제?”

“아가씨의 피아노 연주가 그렇게 들렸어요. 누구랑 같이 치고 싶다…… 라고.”

리즈는 생각했다.

이 남자,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벼려져 있구나.

“오늘 연주 좋았어요.”

막 돌아서서 나가려는 리즈에게 케인이 말했다.

“음 하나하나가 살아 있다고나 할까? 춤을 추듯 살아 있는 연주예요.”

“…….”

그건 케인에게서 늘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그를 유혹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시절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정말 바라는 것은 간절히 원할 때는 주어지지 않는다더니.’

조금 전의 심장을 간질이는 느낌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번엔 스킨십도 없었는데.

“……그만 가 볼게.”

리즈는 황급히 뒤돌아서며 티 나지 않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나가고 혼자 남은 케인은 그제야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나지막이 중얼댔다.

“귀엽네.”

그의 동그랗고 순진한 눈매가 원래의 깊이 있는 눈매로 바뀌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매는 한층 더 깊어지고, 그 속에 담긴 아콰마린 색 바닷물은 점점 청남색이 되어 갔다.

그 눈으로 좀 전까지 은밀한 교류를 나누었던 피아노를 돌아보는데,

반질반질 잘 닦인 탓에 자신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십 년을 진짜 얼굴과 번갈아 가며 살아온 얼굴.

그래서 자기 자신조차도 가끔은 어느 게 진짜인지 헷갈리는 얼굴.

조만간 정리해야 하는 얼굴……. 그래야 하는데.

갑자기,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

자기 자신에게 질투의 감정이라도 드는 걸까.

제 얼굴을 바라보는 케인의 눈이 혼란으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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