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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황족이 뭐 대단한 거라고 (25/65)


#25화 황족이 뭐 대단한 거라고
202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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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왔을 때, 예상대로 미라벨은 난리가 났다.

그래도 남자가 전한 서한 때문인지 예전만큼 심하게 울부짖진 않았다.

“아가씨, 다음번엔 말 좀 하고 가 주세요. 저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요.”

“응, 미안해. 급하게 연락받고 가느라.”

어머니는 예상대로…… 안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어머, 너 이제 들어왔니? 난 또 어젯밤에 들어왔다고.”

“…….”

“다음번엔 말 좀 하고 나가 놀렴.”

‘말하면, 기억은 하실 건가요?’

리즈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러곤 홀을 가로질러 제 처소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하지만 다섯 계단을 오르기 전에 이쪽으로 내려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케인, 그가 이제 막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중이었다.

케인은 잠시 동안 리즈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더니, 늘 그렇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예를 갖추었다. 어쩐지 그 얼굴이 조금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해사한 웃음만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아니, 조금 더 그윽해진 것 같기도 하고.

“모임 다녀오셨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재미있으셨습니까?”

케인이 리즈와 같은 계단에 서선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리즈는 짧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응. 그래. 재밌었어.”

“다행이네요.”

케인이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 순간 문득, 리즈의 머릿속에 어제 먹었던 약과 그 약이 주는 고통이 떠올랐다.

내장이 헤집어지는 엄청난 고통.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

한 번으로도 견디기 힘든 그 과정을 얼마나 자주, 오랫동안 겪어야 했던 걸까. 이 남자는.

리즈는 갑자기 케인이 가엽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어루만져 주고 싶었던 걸까?

저도 모르게 손이 들썩였다.

느닷없이 들려온 청아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는 실수를 범했을 게 분명했다.

“케인.”

리즈가 흠칫 놀라며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그사이 가슴께까지 올라왔던 손은 다시 아래로 축 내려뜨려져 있었다.

릴리아는 케인에게 뭔가를 말하려 계단을 내려오다 이제 막 귀가한 리즈를 발견했다.

잠깐 동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멈춰 서 있던 릴리아는, 곧 한달음에 리즈에게 다가와 두 손을 붙잡고선 눈물을 글썽였다.

“언니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

“언니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납치라도 당한 줄 알고. 이렇게 돌아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그렇게 애정이 담뿍 담긴 말을 늘어놓더니 급기야 리즈를 껴안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릴리아의 가녀린 팔에 감싸인 리즈는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릴리아와 자신이 이렇게 살가운 사이였던가?

얼마 전에 화해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서먹한데. 저만 그런가?

“다음번엔 꼭 저도 데려가 주세요. 언니처럼 아름다우신 분이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알았어.”

리즈는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지 않은 애정 공세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뭔가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으니까.

또, 원작 여주와 남주의 사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나 이만 가 볼게. 피곤해서 좀 씻어야 할 것 같아.”

“네, 그래요. 안 그래도 언니가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시중인에게 목욕물 받아 놓으라고 했어요. 곧장 욕장으로 가시면 될 거예요.”

언제 또 이런 준비를.

“고맙구나.”

리즈는 짧게 인사하고선 층계를 올랐다.

완만하게 휘어지는 층계 끝에서 리즈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릴리아가 케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머뭇거리고 있었고, 케인은 경청하는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 그를 어설프게 위로하려던 시도가 불발된 것이 못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그를 감싸 주는 건 여주의 역할이니까.

그는 여주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위로받는 원작 남주니까.

그나저나 케인. 릴리아의 선하고 친절한 면모를 보았으니 한층 마음이 깊어졌겠지?

원작에 의하면 케인은 릴리아가 자신을 괴롭히는 언니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게 감싸 주는 그 착한 마음씨 때문에 더욱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뭔가 굉장히 감동적인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케인의 눈을 완전히 멀게 만든 말이었는데. 그 말이 뭐였더라?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였던가.

리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처소로 돌아갔다.

***

“저한테 시키실 일 있으세요?”

케인이 자신을 부른 릴리아에게 물었다.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살짝 흐려져 있었다.

“아니, 꼭 시킬 일이 있을 때만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

“난 우리가 동등한 입장이라고 생각해, 케인.”

릴리아가 사슴 같은 눈망울을 일렁이며 말했다. 케인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난 널 이 집 노예나 하인으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사실 나도 뭐 뼛속까지 고귀한 신분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나도 이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존재나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우린 다 같은 인간이잖아? 처음부터 남의 집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케인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릴리아의 장밋빛 뺨이 더욱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당혹감으로 허둥대며 말했다.

“아……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알겠습니다.”

“……?”

“아가씨 말씀 잘 알겠다고요.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라는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거죠?”

릴리아의 얼굴이 다시금 환해졌다. 역시, 케인은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구나.

“저도 아가씨 의견에 동의합니다. 세상에 하찮고 싶어서 하찮은 사람은 없죠.”

케인의 간결하고 담백한 동의는 릴리아가 발언을 이어 나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 맞아. 신분 따윈 불합리한 거야. 그치? 왕으로 운명 지어진 사람도 없고 귀족으로 운명 지어진 사람도 없어. 우린 모두 평등해.”

“…….”

“그런데 어째서 누군 왕이어야 하고, 누군 시중인이어야 하는 거지? 따지고 보면 다 같은 사람인데. 황족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들 중에 제대로 된 일을 하는 자들이 누가 있어? 피땀 흘려 일해 보지 않은 자가 대다수잖아? 나는 그런 혈통만 믿고 거드름 피우는 자들보다 차라리 정직하게 일해서 돈 버는 네가 훨씬 더 고결하다고 생각해.”

케인은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릴리아는 계획했던 것보다 너무 많은 말을 해 버린 게 은근슬쩍 후회되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 자신이 다른 여자들보다 정신적으로 우월하다는 점을 부각할 수 있지 싶었다.

그녀는 케인의 마음을 제 쪽으로 향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보이는 매력만으론 안 되었다.

나름 미인 소리 듣는 리즈가 제 육체적인 매력으로 그를 줄곧 흔들어 댔지만 보기 좋게 실패하지 않았는가.

그를 공략하기 위해선 한 차원 높은 것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고매한 품성이라든가.

릴리아는 신분제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늑함을 느끼는 귀족 여인들, 하층민의 삶 따위 알지도 못하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그녀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걸 보여 줄 생각이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을 가진 여인인지, 얼마나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인지를 깨닫게 해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황족을 비난할 생각까진 없었지만…….

뭐 어때? 이 집에 황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가씬 정말 보통 귀족 영애들과는 다르시네요.”

이윽고 케인이 입을 열었다.

잠깐 긴장으로 굳어졌던 릴리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케인으로부터 저 말을 듣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근데,”

하지만 이어진 말에 릴리아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모든 황족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

“물론 저도 지난 역사 속에서 황족이 저질렀던 만행이나 실책을 돌아볼 때마다 회의가 들곤 합니다. 두 번 다시 되풀이되어선 안 되는 일이죠. 그 점에선 아가씨의 말에 깊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케인이 잠시 호흡을 고르고서 말을 이었다.

“황족들이 혈통을 특권 삼아 놀고먹는다는 말엔 동의할 수 없겠네요. 젖을 떼기도 전에 문무 교육을 시작해야 하고, 아니, 이건 태어난 직후부터라고 말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겠네요. 그리고 다섯 살이 되면 원로 회의에 참석해서 귀족과 대담을 겨뤄야 합니다. 어리다고 봐주는 법은 없어요. 오히려 더 물어뜯으면 물어뜯었지. 일종의 기선 제압이죠.”

“아, 아니 나는 그게…….”

“특히 황태자는 다른 귀족 자제들이 집안에서 편하게 공부하고 있을 때 제국 전역을 다니며 시찰해야 하는데, 이때를 위해 평소에도 긴장을 놓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일부러 살수를 고용해 틈틈이 스스로를 노리게 하거든요. 암살을 대비한 훈련이죠. 후계가 탄탄해지기 전엔 절대 죽으면 안 되니까. 황태자의 목숨은 자신 하나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릴리아는 경청할수록 온몸이 스산해지는 것을 느꼈다.

케인의 표정은 분명 평소와 다름없는데 그가 자아내는 기운은 더없이 냉랭하게 느껴졌다.

릴리아가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으니 케인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냥, 언뜻 책에서 봤어요. 아가씨께서 황족에 대해 편견을 갖고 계신 것 같아서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응, 고, 고마워.”

하지만 이미 그 냉기에 잠식된 릴리아는 좀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둘 곳을 몰라 허둥대는 사이 케인은 정중하게 묵례하고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 릴리아는 멍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제가 들은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 매력이 통하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릴리아의 사슴 같은 눈매를 가늘고 날카롭게 만들었다.

***

“지금쯤 한창 사랑이 싹트고 있으려나?”

리즈는 욕조 등받이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어 생각했다.

전생에 보았던 소설 속 여주, 남주와 한집에 산다니. 꼭 영화 촬영장에 와 있는 기분이잖아?

내가 배역을 따르지 않은 건 유감이지만 그래도 될 커플은 되겠지. 그들의 사랑엔 비단 나만이 장애물인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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