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헤르시스 카스트리온 로스카를랭 (24/65)


#24화 헤르시스 카스트리온 로스카를랭
202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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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남자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한 빛을 발했다.

마치 이 말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왠지 모르게 이 남자에겐 타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어설픈 거짓말엔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 남자를 믿게 만들 방법은 그녀가 저 자신마저도 속이는 것뿐이었다.

리즈는 케인을 떠올렸다. 아니, 케인을 짝사랑하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러자 집요하고, 절박하면서도 애틋한 감정이 절로 스며 나왔다.

“오래도록 좋아해 온 사람이 있어요.”

“혼담이 오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요.”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벌써 뒷조사까지 마친 걸까.

리즈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당연히…… 그러실 테죠. 비밀리에 만나고 있으니까. 신분 차이…… 때문에요.”

“…….”

“하지만 신분이 무슨 대수인가요. 저는 그 남자를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그 남자는 제 모든 것을 알고 있거든요. 습관, 식성, 잠버릇, 그리고…….”

가족의 무관심 속에 홀로 외로움을 삼켜야 했던 순간들까지. 모조리 다.

하지만 이런 궁상맞은 과거까지 이 남자에게 말하고 싶진 않았다.

“제가 꽤 못살게 굴었지만, 그럼에도 한결같이 저를 떠나지 않고 곁에 있어 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아니고선 저를 감당하지 못할 거예요. 제가 실은…….”

“…….”

“성격이 좀 집요하고 까탈스럽거든요.”

리즈는 제 연기에 만족했다.

꽤 그럴듯한 말과 표정이었다. 제 얼굴을 제가 보진 못했지만 애틋하고 고집스러운 사랑에 깊이 빠져 있는 여인으로 보였을 게 분명했다.

고백을 하는 순간에 그녀조차도 잠시 헷갈릴 정도였으니.

케인을 향한 감정이 아직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예리한 빛이 거둬진 남자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리깔렸다.

고백을 거절당해 상심한 걸까?

하지만 리즈의 눈에 언뜻 비친 남자의 눈빛과 표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해 보였다.

언뜻 방향성을 잃어버린 듯 보이기도 했다.

항상 자신만만하고 여유롭던 모습만 보아 와서인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남자의 모습이 리즈는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뭐가 어떻든 저에 대한 마음만 단념하면 더 바랄 게 없다.

리즈는 이런 범상치 않은 인물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다른 질문 더 없으시면 저 이만 나가 보고 싶은데요.”

리즈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손바닥으로 매트리스를 짚었다.

“내 이름, 기억해요?”

“…….”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갑작스런 질문에 리즈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이름요?”

“네. 전에 가르쳐 줬잖아요.”

“아…….”

낭패다.

리즈는 사람의 이름을 썩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여자들은 사교계에서 자주 보니 이름이 외워질 수밖에 없었지만, 남자는 달랐다.

가족, 연인이 아니고서야 작위로만 부르면 되니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없었고, 그러니 자연스레 남자 이름에 대한 기억 저장 능력은 도태되고 말았다.

리즈가 이름을 기억하는 남자는 딱 세 명뿐이었다.

아버지, 케인, 조너선.

그 정도로도 여태껏 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데…….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이름…… 이요…….”

리즈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이름을 기억하려 애썼다.

하지만,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카…… 뭐였던 거 같은데.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곤 주의 깊게 듣지도 않은 데다, 뭔가 글자 수가 많은 어려운 이름이었다.

차라리 케인처럼 쉽든지.

그렇게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서 무의식의 바다를 잠수하고 있는데.

“헤르시스.”

남자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말했다.

“헤르시스 카스트리온 로스카를랭.”

“아…….”

헤르시스…… 였구나.

그럼 전에 말해 주었던 카 뭐시기는 미들 네임이었던 건가?

하긴, 그게 뭐 중요할까. 어차피 기억 못 했을 텐데. 근데, 잠깐.

헤르시스?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어디서 들어봤지?

불현듯 엄습한 기시감에 의아해하고 있을 때, 남자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다음에 물어봤을 때도 기억하지 못하시면 오늘처럼 얌전히는 못 보내 드릴 겁니다.”

동굴 속에 울려 퍼지는 맹수의 그르렁거림처럼 위험한 목소리였다.

***

“일어나셨습니까?”

방에서 나온 리즈가 흠칫 놀라 굳어졌다.

먼저 나갈 테니 천천히 따라 나오라고 해서 삼십 분 뒤에 나갔더니, 남자는 보이지 않고 그의 친구가 맞이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것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 기세에 움츠러든 리즈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불현듯 통성명을 하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다.

이제라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하는 편이 예의인 것 같았다. 어쨌거나 하룻밤 신세 진 불청객이었으니까.

“저는 베리움 후작가의 아리스테라고 합니다. 보통은 리즈라고 불리지요. 어젯밤 신세 많았습니다.”

은발의 남자가 고개를 까딱하는 걸로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하더니 말했다.

“어차피 서로 이름 부를 일은 없겠지만, 그쪽에서 밝히셨으니 제 이름도 말씀드리지요.”

눈빛만큼이나 냉랭한 어조로 남자가 이름을 밝혔다.

“이샤르 로뎀.”

이샤르, 로뎀.

둘 다 이름이었다. 제 신분을 밝힐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뭐야? 비밀 수행원이라도 되는 건가?

“아, 네. 이샤르 경…… 이시군요.”

리즈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곤 시선을 돌려 주위를 훑었다.

적어도 이 남자보다는 편한 제 일행, 로레인 귀족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어디 가셨어요?”

둘러봐도 그가 보이지 않자 리즈가 이샤르에게 물었다.

“나가셨습니다.”

“안 돌아오시나요?”

“네. 일을 해야 해서요.”

‘네 집 하인 일을.’

이샤르 발데미온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는 주군을 당분간 안 보고 싶었다. 진심으로.

대대로 직계 황족을 섬겨 오던 발데미온 공작가는 황태자가 궁을 나가고 몬타네르 대공이 1인자에 올라서게 되면서, 수도의 저택을 비워 둔 채 영지에 내려가 쥐 죽은 듯 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대공과 그들의 정파는 회유가 실패하니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 제 가문을 멸문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었고, 멸문을 피하는 길은 되도록 그들의 눈에서 멀어지는 길뿐이었다.

오로지 다음 대 공작위 계승자인 이샤르만이 수도에 남아 발 빠르게 알아낸 세간의 사정을 주군에게 전했다.

그래. 그러기 위해 여기, 유서 깊은 대귀족 가문의 후계자가 거주하는 곳이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낡고 좁은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이었다.

고작 주군이 마음에 둔 여인의 맞선을 방해하는 일이나, 그 여인의 아침 식사를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럼 저도 이만…….”

“아침 드십시오.”

리즈가 문가로 향하다 말고 멈춰 섰다.

“……네?”

제가 들은 걸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돌아보자 이샤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리즈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덕분에 고개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드십시오.”

그가 식탁 앞에 멈춰 서선 말했다. 식탁 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과 스푼 하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리즈가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가서 보니 빨간 국물에 소고기와 채소가 알차게 들어 있는 스튜였다. 매콤한 향이 비강과 침샘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우연의 일치인 걸까.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가장 허기진 순간에 차려진 건?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리즈가 어색하게 인사하고선 식탁에 앉았다. 저를 위해 차린 게 분명한 데다 배도 고프니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샤르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무심한 얼굴로 제 소파로 돌아갔고, 거기서 정체 모를 서류들을 검토했다.

리즈는 식탁에 앉아 스튜를 크게 한 입 떠서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세상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정말 맛있네요. 저희 집 요리사보다 훨씬 나은데요?”

리즈의 진심 어린 찬사에도 서류를 검토하는 이샤르의 냉랭한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요리는 그의 비상한 머리와 정세를 읽는 특출 난 감각만큼이나 장기로 자리매김한 분야였다.

만약 책략으로 주군을 보필하지 못한다면 입맛을 돋우는 것으로 도움이 되어 드릴 생각이었다.

그러니 고작 저 여인의 어쭙잖은 말 몇 마디로 이샤르의 기분이 변하는 일 따윈 없을 것이었다.

“헤르시스…… 뭐더라? 아, 그렇지. 헤르시스 카스트리온 로스카를랭, 헤르시스 카스트리온 로스카를랭…….”

“…….”

서류가 이샤르의 손끝에서 작게 구겨졌다.

리즈가 음식을 먹으며 흥얼거리는 소리에 이샤르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그녀의 말 몇 마디에 기분이 변하는 일 따위 없을 거라던 호언장담은 취소해야 마땅했다.

‘진짜 이름을 가르쳐 주다니. 어떻게 된 게 아니고서야 전하께서 어떻게 그러실 수가. 여인의 입이 얼마나 가벼운지 모르시는 건가.’

한편 이샤르의 분노한 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리즈는 계속해서 이름을 외우는데, 스튜를 한 스푼 먹고 다시 외울 때마다 이름이 묘하게 꼬였다.

하아-.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아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까지 말했는데 왜 이런 걸 시키고 난리인 걸까?

역시 거짓인 걸 알아차린 걸까.

설마 그럴 리가. 그때의 내 연기는 스스로도 깜박 속아 넘어갈 것처럼 절절했는데.

모르겠다. 그러면 그러라지.

확실히 외워 주면 될 거 아냐. 그런 다음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쫓아 보내자.

“저기, 죄송하지만…… 종이와 펜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리즈는 조심스레 이샤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메모해 두고 틈날 때마다 보면서 외울 생각이었다. 마침 그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왜인지 아까보다 날카로워진 시선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 무리 없이 들어주리라 확신했다.

“그런 거 없는데요.”

하지만 이샤르는 단칼에 거절했다.

수북이 쌓인 메모지와 여러 자루의 펜이 꽂힌 펜대를 앞에 두고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로선 어쩔 수 없었다.

주군의 이름이 종이에 쓰여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샤르는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금 서류로 눈을 돌렸다.

관자놀이에 꽂히는 달갑지 않은 시선은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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