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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23/65)


#23화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202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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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여자라뇨? 저희 셋과 그 남자 외엔 아……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내의 말에 대공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그래요? 참 이상하군. 목격자의 말로는 여자도 있었다고 하던데.”

“…….”

사내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는 자신과 동료들이 공터에서 모임을 갖고 있을 때 웬 미치광이 살귀가 갑자기 나타나서 시비를 걸더니 칼부림을 일으켰다고 헌병대에 진술할 생각이었다.

여자를 건드리려다 참교육 당했다고 말할 순 없으니까.

그래서 끝까지 시치미를 뚝 떼려는데 대공이 서늘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숨길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인자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서린 목소리에 남자는 사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그 여자가 누군지는 모릅니다.”

“…….”

사내가 믿지 않는 듯하여 남자는 다시 결백을 호소해야 했다.

“저……정말입니다. 정말 모릅니다. 그래요. 귀, 귀족이라는 것만 압니다.”

“귀족이라고요?”

“예에……”

“어떻게 생겼지요?”

남자가 말해 주기를 주저하자 대공이 그를 달랬다.

“문제 삼지 않을 테니 편하게 말해 보시오.”

“야, 약속하신 겁니다?”

“맹세하지.”

그 말에 남자가 안심하고 말했다.

“빨간 머리…… 그리고, 보라색 눈동자.”

“그게 전부인가요?”

“예…….”

“…….”

“약조는 지키시는 거죠?”

“…….”

대공이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해서 남자는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내 그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인자한 미소를 짓자 불안감은 금세 가셨다.

“그럼, 물론이죠.”

그러더니 갑자기 대공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걸 본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아니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전하. 문제 삼지 않겠다 맹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대공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데 나는 문제 삼지 않겠다 했지, 살려 주겠다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고 나서 대공이 단검을 손가락 사이로 휙휙 돌렸다.

그 모습에서 남자는 제 손목을 날려 버린 살귀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왜지? 왜 두 사람이 닮아 보이는 거지?

하지만 미처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대공의 단검이 남자의 급소를 꿰뚫었다.

남자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죽은 자의 황망한 눈을 바라보며 대공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게 날 알아보지 말지 그랬나?”

그는 잔인하리만치 무심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병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에 그의 그림자 같은 수행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대공이 고개를 살짝 틀어 침대를 가리키며 명했다.

“처리해.”

“예, 전하.”

고개 숙여 복종하던 수행원은 대공의 갈색 로브 앞자락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수행원에게 대공의 명령이 또 하나 내려졌다.

“귀족 영애들의 명부 정리해서 가져와. 이름, 나이부터 신체 특징까지 전부 다.”

***

눈을 뜨니 새카만 어둠 속이었다.

잠에서 깨어날 때면 늘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의식이 돌아오는 게 더뎠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 공기가 낯설었다. 몸을 떠받친 매트리스 감촉도 낯설었고, 방도 조금 좁아진 느낌이었다. 천장도 낮아진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리즈는 분명히 느꼈다.

‘여긴 어디지? 나는 왜 여기 있는 거고?’

오래지 않아 기억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맞아. 저잣거리 공터에서 불량배들에게 당할 뻔하다 구해졌지. 그리고 누구의 집으로 들어왔던 것 같은데.’

그 역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천천히 기억났다.

‘그렇지. 그 로레인 귀족의 친구 집이었어. 그리고 저녁밥을 기다리다 살짝 피곤해져서 눈을 감고 안락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것뿐인데…….’

의식은 이제 완전히 깨어났다. 모든 것이 생각났다.

‘거기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구나.’

한데 기억을 되찾은 순간 리즈는 어리둥절해졌다.

자신이 잠든 곳은 푹신한 안락의자 속이었는데, 여긴…….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어 리즈는 옆을 보았다.

허업!

‘이 사람이 왜 여깄어?’

리즈는 제 옆에 누운 인물을 알아보곤 소리 없이 경악했다.

그 남자였다. 로레인 귀족. 자신에게 춤을 청하고, 불량배들로부터 구해 준 남자.

이 남자와 자신이 왜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까?

혹시 저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리즈는 슬그머니 가슴을 덮고 있는 이불을 들어 보았다.

치마가 조금 말려 올라간 것 말곤 옷은 멀쩡했다. 벗겨졌다 다시 입은 흔적도 없다.

다행이다. 아무 일 없었구나.

리즈는 이불을 도로 내려놓고선 다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남자를 보았다.

호흡이 고른 걸 보니 깊은 수면에 빠져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된 일인진 모르겠지만 이 남자가 깨기 전에 일어나야겠다.

그래야 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게 되었다.

두 번 봐도 조각 같은 얼굴이다.

두 번 봐도 사심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얼굴이다.

마치 미술품을 감상하는 기분이랄까?

그러고 보니 로레인 왕국이 미남 미녀가 많기로 유명하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아버지도 거기 가셔선 몇 년간 돌아오시지도 않으셨지. 물이 좋은 걸까?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잘생긴 이마부터 시작해서, 오뚝하게 솟아오른 콧날을 지나 곧은 인중과 적당한 두께의 입술에 이어 유려한 턱에 이르기까지의 곡선은 너무 매끄럽고 섬세해서 두려움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리고 턱 아래를 지나 목울대를 살짝 뛰어넘어 점차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벌어진 셔츠 앞섶 사이로 가슴이…….

‘내,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리즈는 저도 모르게 든 요망한 생각을 떨치려 도리질을 쳤다.

그러고선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다리를 막 내리려는데…….

털썩-.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도로 침대에 눕혀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로레인 귀족을 마주 보고 있었다. 붙잡힌 손목에 부드럽고도 강한 힘이 느껴졌다.

“어딜 가려고?”

제 위를 장악한 남자가 금색 안구를 빛내며 말했다.

“뭐, 뭐예요? 잔 거 아니었어요?”

리즈가 당혹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안 잤는데요.”

“……왜요?”

남자가 눈매를 가늘게 만들며 말했다.

“잠이 올 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아…….

하긴, 남녀가 한방에서 같은 침대를 쓰며 아무 일 없기란 꽤 힘든 일이지. 특히 남자한텐…… 잠깐, 이게 아니잖아?

“아니 그럼 밖에 있으면 되잖아요? 왜 여기 계세요?”

하마터면 납득할 뻔했다는 것에 불쾌해진 리즈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리즈를 가둔 두 팔을 풀어 주곤 그 옆에 털썩 누우며 말했다.

“혹시나 그사이에 또 탈출할까 봐.”

탈출하다니. 누가? 아니, 그전에 ‘또’라고?

“아무튼 도무지 안심이 안 돼서.”

뭐가 안심이 안 된다는 걸까? 만난 지 이제 겨우 2회차에.

리즈는 의아했지만 묻기엔 너무 집요하고 사소한 것 같아서 관뒀다. 중요한 것도 아닌 것 같았고. 그나저나.

지금 몇 시나 됐을까?

“지금 몇 시예요?”

리즈가 조심스레 물었다.

“새벽 다섯 시요.”

“며…… 몇 시라고요?”

리즈가 소리치자 남자가 쉿-, 하며 목소리를 낮추라고 했다.

그러자 리즈가 절박함이 묻어나는 말투로 속삭였다.

“저 죽어요. 외박하면……!”

미라벨한테 시달려서.

“걱정 말아요. 댁엔 연통 넣어 놨습니다.”

“네? 누가요? 그쪽이요?”

“네, 제가요.”

“뭐라고 넣으셨는데요?”

“저랑 오늘 밤 같이 있겠다고.”

“뭐라고…… 흐읍!”

남자가 손으로 입을 막는 바람에 언성이 더 높아지는 건 막았다.

“뭐 다른 걸 생각하시나 본데, 그런 거 아니고 그냥 귀족들의 밤샘 연회에 왔다고 말해 놨습니다. 그런 거 흔하잖아요? 밤새워서 노는 게 재밌는진 모르겠지만.”

리즈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고 남자의 커다란 손은 얼굴에서 떨어졌다.

손이 얼마나 큰지 얼굴을 다 덮을 지경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게 말해야 해요?”

문득 궁금해진 리즈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 집 주인이 좀 예민하거든요.”

“아…… 네.”

리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잠깐 보았지만 예민해 보이긴 했다.

은발 머리에 새하얀 피부, 치켜 올라간 눈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발견하던 순간 날카롭게 굳어지는 눈초리를 리즈는 좋게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대체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걸까?’

그렇게 집주인의 인상과 자신을 향한 묘한 적대감을 곱씹고 있는 도중, 남자가 불쑥 물어왔다.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됩니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터라 리즈는 대수롭지 않게 승낙했다.

“그러세요.”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

집주인에 대한 불쾌감이 리즈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리즈는 할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 로레인 귀족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없으면 제가 당신께 정식으로 교제를 청할까 하는데.”

리즈의 눈이 둥그렇게 바뀌었다.

이 무슨 뜬금없는 상황일까.

이 밤에. 그것도 한 침대에 누워서.

하긴 요전 날 연회에서 자신만을 고집했을 땐 리즈도 ‘혹시 이 남자가 나를?’ 하는 생각을 잠시나마 품긴 했었다.

하지만 애프터 신청도 없었고, 따로 찾아오거나 서한을 보내지도 않았으므로, 원래 성격이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 남자는 많았다. 마음도 없으면서 상대에게 일회성의 작업을 거는 남자는.

‘그런데 그게 진심이었단 말이지?’

불과 몇 시간 전,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저를 구해 준 남자를 떠올리니 더는 그의 진심을 부정할 수 없었다.

뜻하지 않게 프러포즈를 받은 리즈는 못내 당혹스러웠다.

물론 나무랄 데 없는 남자긴 하다.

빼어난 미남에 부유한 왕국의 부유한 귀족.

게다가 이 여자 저 여자 기웃거리지 않는 지조 있는 태도에 내 여자는 확실히 지켜 내는 듬직함까지.

이 남자를 거절한다면 리즈 자신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이 남자를 거절하는 건 미친 짓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미친 걸까?’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느껴졌다.

너무 완벽해서라고 말하기엔 조금 애매한, 하지만 분명한 거부감이 들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그러므로.

“저는…….”

리즈는 결심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거짓말을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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