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침대 좀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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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침대 좀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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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침대 좀 쓰자
2023.06.22.
이샤르는 최근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잠을 못 자 본 적이 여태껏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잠만은 잘 자던 그였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의 주군이 최고의 타이밍 운운하며 황궁에 돌아가는 것을 미루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고, 그도 그 생각엔 동의했다.
이왕이면 원로들을 비롯한 대귀족들이 모두 모인 장소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을 테니까. 그 시기가 몬타네르 대공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지기 직전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
한데, 갑자기 그 찬란한 앞날을 확신할 수 없어졌다.
‘셰비네 클로드에게 이것 좀 보내.’
‘바를뢰즈 백작에 대해 좀 알아봐. 가급적이면 흠이 될 만한 일로.’
그 알 수 없는 행태가 마음에 걸려 그자들과 전하의 연관성을 몸소 조사해 보았다.
결론은…… 그들이 리즈 베리움의 맞선 상대였다는 것.
“미쳤네.”
여인에게 관심도 없으시던 분이었고 제 주인집 장녀는 관심이 없다 못해 치를 떠시던 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오만하시던 분이 그런 치졸한 짓을?
이샤르는 제 머릿속에 불쑥 떠오른 생각이 저만의 망상이길 바랐다. 하지만…….
“제길.”
망상이 아니라는 쪽으로 계속해서 추가 기울자 더는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간 그는 테이블 위의 잔에 물과 얼음을 채워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자 뜨겁던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아 조금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지금 전하는 그냥 외로움에 살짝 미쳐 버린 것뿐이다.
주변에 여자가 별로 없어서 그 여자한테 잠시 혹한 것뿐이다.
황제가 되고 사교계에 발을 들이면 제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리즈 베리움이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여인이었는지 알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 정리를 끝마친 그가 일시적인 평온함에 젖어 있을 때.
똑똑-.
갑작스레 들려온 노크 소리에 이샤르는 의아해졌다.
“누구지? 이 시간에?”
문득 며칠 전 삯바느질 감을 구하러 다니는 여인에게 셔츠 수선을 맡긴 일이 생각났다.
아…… 그 여인이겠군.
그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매만지며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기절할 뻔했다.
“저…… 전…….”
하지만 상대가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더 말하진 못했다.
‘쉿, 조용히 해.’
상대가 험악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러곤 눈을 스르르 한옆으로 미끄러뜨렸다. 이샤르는 그 뜻을 알아보았다.
옆에 누가 있다는 말이구나. 전하가 전하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알았지?’
‘아……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눈짓으로 대화를 주고받았고, 안심한 남자는 이샤르의 입을 풀어 주었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 띤 얼굴로 문을 확 열어젖히며 말했다.
“들어와요. 영애.”
문이 확 열리니 여인의 얼굴이 이샤르의 눈에 들어왔다.
이샤르의 표정이 급격히 싸늘해졌다.
그를 불면증에 시달리게 만든 원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주군은 그의 반응 따윈 전혀 아랑곳 않고 마치 제집인 것처럼 리즈를 안내했다.
“제 친구 집인데 여기서 잠깐 쉬도록 하죠.”
“아…… 네. 실례하겠습니다.”
“좀 좁지만 그런대로 있을 만할 거예요.”
주군이 그런 만행을 저지르는 동안 이샤르는 그의 몰골을 위아래로 살펴보곤 경악했다.
‘웬 피를 저렇게 많이 묻히고. 어디서 사냥이라도 하고 오신 건가?’
“여기 앉도록 해요.”
안 그래도 탐탁지 않은 리즈를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안락의자에 제 맘대로 앉히자 이샤르의 표정은 더욱더 굳어졌다. 그러고 나서 주군은 그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카우치에 피 묻은 옷 그대로 기대어 앉아 다리를 꼬았다.
이샤르는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저기…… 친구야? 나 잠깐 좀 보자.”
남자의 눈이 일순 험악하게 빛났지만, 그래서 조금 움찔하긴 했지만 이샤르는 용기를 냈다. 용기를 내어 친구를, 아니 전하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둘만 있게 되자 이샤르는 비로소 편하게 존댓말을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설명은 좀 해 주셔야죠?”
“보이는 그대로야.”
“보이는 그대로가 뭔데요?”
“그냥 그렇게 됐어.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할게.”
“아뇨, 지금 하십시오.”
주군의 눈이 사납게 빛나는 걸 보고서도 이샤르는 물러서지 않았다. 주도권이 제게 있다는 걸 알았기에 가능했다.
“너도 참, 어지간하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혀를 쯧 찼지만, 쫓겨나지 않기 위해선 집주인의 뜻대로 해 줘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는 그간 있었던 일을 대강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 이샤르의 낯빛은 점점 굳어 갔다.
점점 막 나가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연회에 본래의 모습으로 참여했다고? 수도 한복판에서 칼부림까지 벌였다고?
마지막으로 저와 제 여인이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니 음식을 해 달라는 대목에 이르러선 체념 섞인 한숨마저 새어 나왔다.
전하…… 대체 어쩌시려고.
설마 황위를 포기하실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좀 빨리 말씀해 주시지. 지금이라도 몬타네르 대공을 섬기게.
하지만 이샤르는 지금 막 머릿속에 든 생각을 얼른 지워 버렸다.
절개 높은 충신 가문의 후계자로서 직계 황족 외의 다른 이를 섬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뭘 해 드릴까요?”
겨우 감정을 추스른 이샤르가 물었다. 그러자 그의 주군이 주저 없이 답했다.
“매운 스튜 요리.”
주군은 매운 걸 잘 못 먹었다. 그러니 그 음식은 리즈 베리움의 취향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해 드리죠. 대신 이것 하나만 확실히 해 주십시오.”
이샤르가 수락하는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황궁에 복귀하실 거죠?”
“…….”
“하실…… 거죠? 그렇죠, 전하?”
대답은 두 번째 물음에서 나왔다.
“그래.”
그래…….
그거면 됐다.
친구처럼 함께 자라온 주군은 어린 시절부터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그랬다. 그러니, 이 약속도 지킬 것이다. 반드시.
일단 그것만 생각하자. 그게 가장 중요하니까.
이샤르는 안심하고서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방 안에 혼자 남겨진 남자가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어쩌면 이 약속이 생애 처음으로 지키지 못하는 약속이 될지도 모르겠군.”
눈과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기분을 밝게 전환시킨 뒤 밖으로 나온 그는, 요리할 생각은 안 하고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샤르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왜 그래?”
남자는 저보다 약간 작은 이샤르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샤르는 대답 대신 턱 끝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음식 할 필요가 없겠는데요?”
그쪽으로 시선을 향한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리즈가…… 잠들어 있었다. 안락의자 깊숙이 기대어서.
그가 매끄럽게 올라간 붉은 입술로 말했다.
“그렇군. 그럼 대신에…….”
“……?”
“침대 좀 쓰자.”
***
촛불 하나에 의지한 어두운 공간.
침대에 누워 연신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는 환자와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다.
환자의 앞머리는 식은땀으로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옷은 피투성이였다.
손은 붕대로 감겨 있었는데, 절굿공이처럼 끝이 뭉툭했다. 손가락은 없어 보였다.
남자를 치료한 의원이 말했다.
“출혈이 워낙 심해서 살아나기 힘들 줄 알았는데 간신히 살렸습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의원의 보고를 받는 중년의 사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옆에 있던,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다른 자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즉사?”
“예에, 상대가 어찌나 정교하게 급소를 노렸는지. 살아날 가망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보고받는 이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이 일을 저질렀을 것으로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의원은 뭔가 더 조치를 하려 했지만,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만 마무리 지으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출혈이 더 심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겁니다. 위독한 고비를 넘겼지만 안심할 순 없으니까요.”
“알았으니 이만 가 보게.”
의원은 쫓겨나듯이 나가고, 수행원이 주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나가 봐.”
“예.”
수행원이 꾸벅 인사를 올리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방 안에는 중년의 사내와 환자만이 남게 되었다.
“으으…….”
남자는 계속해서 신음을 흘렸다. 그래도 진통제를 투여받은 탓에 고통이 조금 사그라들었는지 눈을 뜨고 주위를 살필 정신은 있는 듯 보였다. 그의 눈에 로브를 쓴 중년의 사내가 들어왔다.
아직까지 시야가 흐릿한 탓에 사내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상대를 빤히 쳐다보며 시야가 밝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사내가 눈을 크게 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대…… 대공 전하!”
섭정 대공 다미엥 몬타네르.
로브를 쓰고 있었지만 분명히 그 남자였다.
적색과 자색이 묘한 비율로 혼합된 눈동자는 그 말고는 없었다.
남자는 불한당이지만 눈썰미가 꽤 좋은 편이었다.
“허허, 나를 알아보시는군요.”
“그…… 그럼요. 전하께서 일전에 마차 순회하실 때 가장 앞에서 보았는걸요.”
“그렇군, 알아봐 줘서 고맙소.”
“그……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남자는 대공을 눈앞에서 알현한 것에 대한 감격과는 별개로 적지 않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겁먹은 얼굴로 어깨를 움츠리자 대공이 그를 지그시 눌러 침대에 눕혔다. 그러곤 안심하라는 듯 가슴을 토닥이며 말했다.
“밤중에 헌병대를 통해서 들어온 신고가 마음에 걸려서 와 봤다오.”
“그…… 그렇군요.”
“몇 가지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뭐……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아는 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댈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군지 얼굴을 보셨소?”
대공이 눈동자를 붉게 빛내며 물었다.
“보…… 보았습니다. 당연히.”
“어떤 이였소?”
남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면 어떡하나 내심 고민했는데,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검은 머리에 호박색…… 아니, 금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들짐승처럼 몸이 날랬습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 그렇지. 검을 손가락 사이로 휙휙 돌려 잡는데 꼭 묘기를 부리는 것 같았습니다요.”
사내는 남자가 제 부하의 혼신의 공격을 연극 관람하듯이 태연하게 바라보며 검 돌리기를 행하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역시.’
대공은 짐작이 맞았다는 듯 눈을 꾸욱 감았다 뜨며 다른 걸 물었다.
“여자는 누구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