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무도회장의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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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무도회장의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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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무도회장의 그 남자
2023.06.21.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리즈는 슬그머니 손에서 얼굴을 뗐다. 혹시나 보게 될 끔찍한 광경을 대비해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해 두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로레인 귀족과 불한당 남자의 대치 구도가 조금 전과 똑같았다.
혹시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걸까?
그 순간에 불어닥친 바람이 회오리를 일으켜 바닥에 깔린 낙엽 더미를 휘감아 올리지만 않았다면 정말 그런 줄 알았을 것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대치 구도도 완전히 똑같지 않았다.
남자의 손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단검이 사라졌다……. 아니, 다시 돌아왔다.
로레인 귀족이 불한당의 가슴에서 단검을 뽑았다. 그러자…….
철퍼덕-.
황망한 눈을 하고 있던 불한당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가 들고 있던 커다란 낫처럼 생긴 장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찰캉-, 하고 맑은 금속음을 울렸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리즈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로레인 귀족은 그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지 않은 채 다음 상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이 몹시 즐거운 사람처럼.
“이제 한 마리 남은 건가? 버러지.”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눈동자엔 미치광이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광기가 스며 있었다.
대장은 두 부하가 맥없이 당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잠시 얼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두 조무래기들보다 실력이 뛰어나니 저렇게 허무하게 당하진 않을 거란 판단이 섰는지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렸다.
“어디서 잡기 좀 배웠나 본데?”
대장이 허리춤에서 역시 장검을 꺼내 남자에게 겨누며 말했다.
그 검은 조금 전 죽은 조무래기 것보다 더 길고 날도 더 벼려져 있었지만, 리즈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남자는 이겼다.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이기겠지.
리즈는 이번엔 어떤 상황에서도 눈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겠다 다짐했다.
그런데.
그러기 힘든 상황이 닥쳤다.
상대편의 서슬 퍼런 장검을 본 로레인 귀족이 가소롭다는 듯 실소를 짓더니 단검을 휘익 던져 버리고선 더 작고 짧은 접이식 칼을 꺼내 펼쳤다.
‘신이시여, 어찌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기가 막힌 리즈의 두 손이 얼굴 근처에서 배회했다.
싸움은 지체 없이 재개되었다. 리즈만큼이나 기가 막힌 대장이 남자의 목을 단번에 날려 버릴 듯이 검을 휘두르며 돌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고 보니 목을 날려 버리기에 자신의 키가 너무 작다 여겼는지 계획을 변경했다.
그는 한 손으로 검을 쥐고선 깊은 런지 자세를 취하며 동료가 당했던 것처럼 남자의 복부에 검의 첨단을 찔러 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 직전에 남자가 몸을 살짝 틀어 상대를 흘려보내고선, 재빠르게 검을 고쳐 잡아 손목 안쪽을 샤악-, 그어 버렸다.
“흐억!”
대장이 손목을 감싸 쥐고선 비틀댔다.
리즈가 보기에 가볍게 그은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는 꽤 고통을 느꼈다. 피가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주르르 흘러내리고, 신경도 함께 끊어졌는지 검도 제대로 쥐지 못했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사내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태세를 재정비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조금 전은 요행일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 주마.’
다행히 그는 양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자였다.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 대신 다른 손으로 검을 움켜잡고선 다시 한번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서 치켜든 검을 강하게 내리쳤는데.
그 찰나 로레인 귀족이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단검을 민첩하게 집어 들어 휘익-, 하고 공중에 은빛 사선을 새겨 넣었다.
“크하아악!”
사내의 검이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검만 날아간 것이 아니었다.
젠장.
눈 가릴 타이밍을 놓쳐 버린 탓에 리즈는 제 앞 땅바닥에 박혀 진동하는 검과, 여전히 검을 쥐고 있는…… 주인 잃은 손모가지를 고스란히 눈에 담아야 했다.
“으으윽…….”
대장이 아직 붙어 있는 다른 손으로 손목을 감싸고 주저앉아 신음하고 있었다.
로레인 귀족은 피 묻은 단검을 다시금 옷에 쓱쓱 닦더니 허리춤으로 돌려놓았다.
그러고선 그의 부하가 들고 있던 대낫처럼 생긴 장검을 주워 들고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한바탕 놀이를 끝낸 그의 얼굴엔 악동 같은 웃음기가 완전히 걷혀 있었고, 대신 섬뜩할 정도의 무표정이 자리했다.
그는 사내의 등을 발로 차서 바닥에 납작 엎드리게 한 다음 등을 발로 꾸욱 밟았다.
사내는 압박에서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썼지만 상대의 누르는 힘이 어찌나 센지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사…… 살려 주십…… 시오.”
사내가 버러지처럼 버둥거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로레인 귀족은 사형 집행자처럼 일말의 인간적인 감정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걸 어떻게 찢어발길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손을 날려 버린 것만으론 부족했다.
‘뭘 더 날려 버릴까?’
내 것을 담은 눈? 역겨운 말을 나불거린 혀? 음탕한 생각을 한 머리? 아니면 가장 중요한…….
“쯧.”
그가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잘라야 할 게 너무 많은데, 그동안 비명으로 썩어 들어가는 귀는 어째야 하나? 그리고, 리즈의 정신 건강은? 무엇보다 그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봐줬다.”
남자가 검 끝을 목덜미에 겨눴다. 단번에 숨을 끊어 주겠다는 의미였다. 저지른 죄에 비해 너무 가볍고 자비로운 처사였다.
하지만 그건 그의 생각이었고, 리즈의 눈엔 전혀 자비로워 보이지 않았다.
리즈는 혼미해진 정신을 가까스로 다잡고선 생각했다.
저 남자가 여기서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저 남자의 몸에 더러운 피가 그만 묻었으면 좋겠다고.
물론 저 불한당이 저지르려던 짓, 혹은 저질러 왔음이 틀림없는 짓을 생각하면 백번 죽여도 모자라지만, 그 최종 심판은 다른 자에게 넘기고 싶었다.
리즈는 저도 모르게 달려가서 남자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러곤 애원했다.
“제발 그만해요.”
이제 막 검을 내리꽂으려던 남자는 갑작스러운 리즈의 난입에 멈칫했다.
“할 만큼 했어요. 그러니까 그만하고 저랑 같이 가요.”
단호했던 남자에게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리즈는 됐다 싶어 남자의 허리에 감았던 손을 풀고 대신 팔을 잡아당겼다.
“빨리요. 어서요.”
남자는 통증과 과다 출혈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내를 잠시 내려다보곤 리즈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던졌다.
리즈는 혹여나 그가 마음이 바뀔까 봐 그의 팔에 매달리듯 팔짱을 끼고선 서둘러 공터 밖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
“감사합니다. 구해 주셔서.”
공터에서 한참 멀어지자 비로소 안심이 된 리즈는 팔짱을 풀고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
하지만 남자로부턴 아무 말이 없었다. 언뜻 화가 난 듯 보였다.
왜지? 혹시 내가 자신에게 버러지 같은 자들의 피를 묻히게 했다고 그러는 건가?
“다친 덴 없습니까?”
마침내 그가 입을 열어 리즈의 안위를 물었다.
왠지 그것 말고 다른 것을 묻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없어요. 덕분에.”
“다행이네요. 늦지 않게 나타나서.”
남자의 진지한 표정이 조금 전과 사뭇 달라 보였다.
그 광기 어린 살귀는 누구였을까. 이 사람과 그자가 같은 사람이긴 한 걸까.
꼬르륵-.
갑자기 리즈의 배에서 들린 적나라한 아우성이 의문을 싹 지워 주었다.
리즈가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배를 감싸 쥐고 있으려니 남자가 물었다.
“아직 식사도 안 했습니까?”
“네…….”
그러고 보니 밥도 안 먹었구나.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얼굴이 돌아오지 않아 너무 당황한 탓에 배고픈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남자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갑시다.”
“어딜요?”
“뭐 좀 먹으러요.”
“이 시간에 문 연 데 없을 텐데요.”
“따라오기나 해요.”
리즈는 멍하니 남자의 손에 이끌려 갔다.
그녀의 손가락을 얽어매고 있는 기다랗고 섬세한 손가락에서 묘한 집착이 느껴졌다.
***
물어볼 말이 많았다.
늦은 시간에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정말 집에서 도망칠 생각이었는지.
하지만 지금 이렇게 손을 잡고 밤거리를 걷고 있자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중요한 건 리즈를 되찾았다는 사실뿐이었다.
정신없이 찾아다닌 끝에 그녀를 발견했을 때 느낀 안도감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무뢰배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금세 모습을 바꾸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단검이 자신의 손을 떠난 뒤였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어느 정도 이성이 박혀 있는 상태에서 행해지긴 했다. 리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문득 맞은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일교차가 큰 늦가을의 냉기를 머금은 밤바람이었다.
달랑 셔츠 한 장 입은 그가 추워 보였는지 리즈가 힐끔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춥지 않냐고 물으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춥다고 한들 제 옷을 벗어 줄 것도 아니었으므로 도로 입을 닫는 듯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엽게 보여 그는 픽 웃어 버렸다.
게다가 그는 춥지도 않았다.
얇은 셔츠 한 장에, 그마저도 피로 군데군데 젖어 있는 탓에 꽤 체온을 빼앗긴 했지만, 손안에 쥔 조그만 손난로에서 비롯된 온기는 그의 전신을 따스하게 데워 주기에 충분했다.
벽에 붙어 앉아 몸을 웅크린 부랑자들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그는 그들 가운데 안면이 있는 자를 발견했다.
정신없이 배회하던 그에게 ‘웬 여인이 공터 쪽으로 가더라’ 하고 알려 준 자였다.
여유를 되찾은 그는 보답으로 남자에게 금화 한 냥을 던져 주었다.
“아이고, 나으리. 복 받으소서.”
남자가 절까지 하며 망극해 어쩔 줄 모르니 다른 부랑자들이 눈을 번뜩이며 다가와 그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기분이 좋은 상태인데다 주머니도 넉넉하니 못 줄 이유가 없었다.
그는 모두에게 금화를 한 냥씩 적선했다.
“돈이 많으신가 봐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빈정대는 리즈에게 그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많죠. 앞으론 더 많아질 예정이고요.”
“그러시군요.”
리즈는 예상대로 관심 없는 얼굴이었다.
돈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는 참 한결같군. 그러니 얼굴 말곤 볼 게 없는 케인에게 매달렸겠지만.
그렇게 비아냥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속으로 내뱉던 그는 문득 자신의 말을 되돌아보았다.
앞으로 더 많아질 예정이고요……
제국의 주인이 되면야 당연히 부자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딱히 그러지 않아도 한평생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비축된 돈이 있는데.
꼭 부자로, 권력자로 살아야 할까.
숙부는 교묘한 방식으로 부모님을 죽였다.
그 아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죽이려 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가지고 싶었던 황제 자리. 이제 반절기만 지나면 완전히 제 것이 되리라 믿는 황좌를 보란 듯이 탈환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통쾌한 복수이자 부모님이 제게 남긴 사명이었다.
한데, 꼭 그래야 할까?
루벤트 영식, 바를뢰즈 백작 같은 평범한 작자와 결혼을 꿈꿀 정도로 소박한 결혼 생활을 꿈꾸는 리즈.
그런 그녀의 소망대로 평범한 부부로 살아가는 삶도 꽤 괜찮지 않나.
두 사람을 반반씩 닮은 아이들이 온 집안을 뛰어다니고,
아내는 그런 아이들을 따라다니면서 입에 음식을 넣어 주고.
일터에서 돌아온 아빠를 반기는 아이들을 공평하게 양팔에 들쳐 안고선 가장 먼저 아내의 볼에 쪽 입 맞추는 삶.
누군가를 무너뜨리며 통쾌해하는 삶보단 그편이 더 가치 있지 않을까.
다시 찾은 리즈에 대한 안도감은 그의 지난 십 년간의 다짐을, 삶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만큼 강력했다.
그는 조그만 리즈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리즈가 깜짝 놀라며 손을 비틀어 빼내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