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불한당을 만나다 (20/65)


#20화 불한당을 만나다
2023.06.20.



 
“에이…… 설마 그러려고.”

리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불길한 생각을 떨쳐 내려 애썼다.

‘그나저나 책이라도 들고 나올걸.’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생각 말곤 할 게 없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불평과 한탄으로 이어졌다.

어째서 휴대폰도 없는 이런 책 속 세상에 태어나 가지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빨리 들어갈 줄 알고 돈도 많이 안 가지고 왔는데.

리즈는 주머니를 털어서 있는 돈이 모두 얼마인지 세어 보았다.

“금화가 다섯 냥. 은화가 열 냥. 동화가 스무 냥.”

자신의 전 재산이 파악되자 막연한 상상이 보다 뚜렷하게 다가왔다.

만약에 이대로 얼굴이 바뀌지 않으면. 영영 이 얼굴로 살아가야 한다면 리즈는 이 돈을 밑천 삼아서 뭔가를 해야 할 것이다.

장사를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니, 일단은 일을 해야 한다.

가만, 이 세계에서도 아르바이트의 개념이 있나? 전생에서 서빙 알바는 좀 해 봤으니 여기서도 그 경험을 살려 보면 되려나?

조금 전에 그 식당에 보니까 종업원이 곧 그만둘 거 같던데 그 자리에 자신이 대신 들어가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기가 막혔다.

기껏 귀족으로 태어났는데 웬 알바 생각?

“아이고, 내 신세야!”

리즈는 머리를 푹 숙이며 한탄했다.

그런데 흘러내린 머리 색깔이…… 적색이다. 눈은? 얼굴은?

리즈는 들고 있던 손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이…… 이럴 수가…….”

원래 그녀의 얼굴이다. 자신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 집에 갈 수 있다.

야호!

좀 전까지 손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만큼 녹초가 되어 있던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뿐해졌다.

리즈는 땅바닥이 트램펄린이라도 된 것처럼 방방 뛰어 댔다.

그 순간.

“뭐가 그렇게 좋아, 아가씨? 우리도 좀 같이 좋자고.”

소름 끼치도록 음흉한 목소리 하나와 대략 세 명 정도로 추정되는 남자들의 둔탁한 발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발랄하고 유연하던 리즈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리즈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아섰다.

***

하나, 둘, 셋.

셋이 하나같이 섬뜩하고 징그럽게 생긴 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한가운데 서 있는 자는 뺨에 기다란 칼자국까지 나 있어 가장 흉흉한 인상을 주었다.

그자가 욕망에 찌든 음흉한 눈빛으로 리즈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어이쿠, 예쁜 아가씨네?”

“…….”

“예쁜 아가씨가 밤늦게 이런 으슥한 곳에 있으면 안 되지. 왜? 갈 데 없어?”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리즈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다른 남자들도 느릿하게 걸음을 뗐다.

리즈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눈에 그들은 사냥감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는 하이에나 떼처럼 보였다. 그것도 굶주린 하이에나.

그 존재 자체가 몹시도 위협적이어서 무기를 꺼내 보이지 않았는데도 두려움이 엄습했다.

리즈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왜 그래? 우리가 뭘 했다고? 우린 그냥 아가씨가 쓸쓸해 보여서 말동무나 해 주려고 그런 것뿐이라고.”

가운데 선 남자의 능청스러운 말에 뒤에 서 있던 두 남자가 낄낄거리며 한마디씩 했다.

“에이 대장, 진짜 말동무만 하시게요? 아니죠?”

“그럼, 그럼, 우리 대장이 어디 그럴 위인이냐? 혼자 드시지 말고 저희한테도 좀 나눠 주실 거죠? 아님, 같이 먹을까요?”

리즈는 이들이 뭘 먹는다는 건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예정인지 알 것 같았다.

전생이었던 현대 사회에서도 비일비재했던 일이 이런 미디어도 발달되지 않은 사회에서, 신분증도 없는 이런 사회에서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다. 더하면 더했지. 저지르고 튀면 그만일 테니까.

“일단은 내가 맛 좀 보고.”

남자가 제 윗입술을 혀로 쓰윽 훑더니 리즈에게로 다가왔다.

리즈는 간신히 이성을 끌어올려 생각했다.

‘도망가야 해.’

하지만 생각과 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려움이란 올가미가 몸을 꽁꽁 얽어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즈는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 날, 거…… 건드리면 후회할 거야.”

“뭘 후회한다는 거지?”

“왜…… 왜냐면 난…….”

“혹시,”

남자가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귀족이니 뭐니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어…… 어떻게 알았지? 그 말 하려던 거 맞는데.’

리즈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린 그런 거 상관없는데. 귀족이면 어때? 귀족은 여자 아닌가? 큭.”

남자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자신의 수하 둘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들었냐? 이 아가씨 귀족이란다.”

“어이쿠, 무서워라. 오줌 지리겠네.”

“귀족 아가씨랑 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이려나, 후후.”

수하들이 히죽대며 더욱 입맛을 다시는 가운데 대장 남자가 리즈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곤 흉측한 얼굴을 리즈에게 들이대며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아가씨. 귀족이면 더 좋은 이유가 있어.”

“…….”

“함부로 입을 안 놀릴 거 아냐? 안 그러면 가문에 먹칠인데. 크하하하.”

남자가 허리를 젖히더니 다시 한번 깔깔 웃었고, 다른 남자들도 따라 웃었다.

“아무튼 여러모로 잘됐네. 착하게 굴면 나 한 번으로 끝내 줄게.”

남자가 인심 썼다는 듯이 말했다.

그 찰나, 리즈는 남자와 패거리들 사이에 틈이 조금 벌어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벌어진 틈으로 자신이 지나왔던 오솔길이 보였다.

잘하면 저곳으로 탈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번화가로 나가면 누구 한 명은 있겠지. 그럼 그 사람한테 도움을 청하자.

리즈는 남자가 웃옷 조끼를 벗느라 경계가 살짝 풀어진 틈을 타서 도약하다시피 뛰었다. 하지만…….

“이봐 이봐. 어딜 가시려고?”

“으윽!”

두 발짝도 제대로 떼기 전에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혀 버렸다.

남자는 그대로 머리채를 확 끌어당기더니 제 품에 가두며 말했다.

“이거, 봐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뒤에서 껴안은 남자의 소름 끼치는 입김이 고스란히 귓바퀴에 와 닿았다. 리즈는 체념했다.

‘이제 끝났구나.’

남자의 눈짓을 받은 패거리들이 탐욕스러운 눈빛을 하고서 바지 앞섶을 매만지며 다가왔다.

리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운명을 피하려고 별짓을 다 했더니 더욱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는구나. 제기랄.

“크헉!”

그 순간 들려온 갑작스러운 외마디 신음 소리에 리즈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오른편에 있던 남자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게 보였다.

등에 단검이 박힌 채.

리즈를 비롯한 모두가 단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랬더니, 그곳에 한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남자였다.

순간 리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저 몸, 저 실루엣은 분명…… 리즈가 아는 사람이었다.

‘케인?’

리즈는 확신했다. 십 년을 바라본 남자의 몸을 모를 리가 없었다.

“웨…… 웬 놈이냐!”

대장이 리즈를 감았던 손을 놓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반면 왼쪽에 있는 남자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듯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케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하반신부터 시작해서 그의 전신이 등불의 반경에 들어왔는데…….

케인이 아니었다.

연회장에서 함께 춤을 춘…… 그 비현실적으로 잘난 조각 미남이잖아?

저 남자가 왜 여기에……?

***

남자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계속해서 다가왔다.

칠흑 같은 머리칼과 사납게 번뜩이는 금색 눈, 커다란 체구와 늘씬한 팔다리가 흑표범을 연상케 했다. 게다가 그 전신에서 발산되는 위압감이란. 하이에나 따위에게서 느껴지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리즈는 저를 구해 주기 위해 나타났음을 알면서도 어쩐지 움츠러드는 기분을 느꼈다.

그나저나,

‘이름이 뭐였더라?’

아버지의 제자, 로레인 왕국의 귀족이라는 것만 알고 이름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카…… 뭐였던 거 같은데.

하긴, 그게 뭐 중요할까. 이름을 안다 한들 이 상황에서 응원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리즈는 그를 그냥 ‘로레인 귀족’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로레인 귀족이 저가 쓰러뜨린 남자 곁에 멈춰 서더니 말했다.

“연약한 여자 하나를 여럿이서 겁박하다니, 추하기 짝이 없군.”

“그…… 그러는 너는? 비겁하게 예고도 없이 사람 등에 칼이나 꽂는 건 퍽이나 아름다운 짓이다.”

대장이 떨림을 애써 감춘 채 호기롭게 말했다.

“사람?”

로레인 귀족이 고개를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여기 사람이 어디 있지? 내 눈엔 버러지 셋밖에 안 보이는데? 아…… 이제 둘이군.”

그가 코웃음을 치더니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등에서 단검을 스윽 뽑아 들었다.

그러자 쓰러진 남자가 잠시간 몸을 부르르 떨어대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벌어진 틈새에서 나온 끈적한 액체가 흙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로레인 귀족이 칼에 묻은 피를 하얀 셔츠에 슥슥 닦았는데, 그 기괴한 행동이 의외로 곱고 섬세한 얼굴에 잘 어울렸다.

그가 여유 넘치는 목소리로 나머지 둘을 도발했다.

“빨리 끝내고 싶지만 비겁하다고 하니 떳떳하게 상대해 주지. 거기!”

그가 검지손가락으로 왼쪽 남자를 가리켰다. 그러곤 약 올리듯 싱긋 웃으며 손마디를 까딱해 보였다.

그러자 뒷걸음질 치던 왼쪽 남자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남자에게 다가서며 검을 빼 들었다.

‘괜찮을까?’

리즈는 우려스러웠다. 이쪽은 날이 완만하게 휘어진 장검인 데 반해, 저쪽은 길이가 한 뼘 조금 넘는 단검이었기 때문이다.

이쪽 남자도 그것이 못내 위안이 되었는지 얼굴이 마냥 어둡진 않았다. 분위기만 봐선 상당히 고수일 것처럼 느껴지는 상대와의 실력 차를 검의 길이 차이가 상쇄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리라.

자신감이 생긴 불한당이 제법 현란하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우락부락한 인상에 흉물스러운 무기, 거기에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요란한 검술까지 더 해지자 리즈는 온몸이 스산해지는 것을 느꼈다.

검에 스치기만 해도 목이 달아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로레인 귀족이 어떻게든 하겠지.

조금 전에 저들 무리 중 한 사람의 등짝에 정확히 다트를 꽂아 넣었잖아.

그러면서 여유 가득한 얼굴로 덤비라고 도발까지 했으니.

그러니 다 생각이 있겠지.

하지만 불한당이 지척까지 다가올 동안 그는 아무것도 안 했다.

그저 묘기를 부리듯 단검을 손가락 사이로 휙휙 돌리며 상대를 지그시 쳐다보기만 했다.

눈빛이 지나치게 고요한 것이 별생각이 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빨리 안 움직이고 뭐 하는 거야……!’

리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조바심을 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우락부락한 불한당은 어느새 로레인 귀족의 코앞까지 진출했고, 검을 치켜들며 힘을 모았다.

훤히 드러난 양 팔뚝이 알이 차오르듯 둥그렇게 부풀었다.

저대로 내리치면 저 잘생긴, 세상에 유일무이할 것 같은 미남자가 두 사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점에 다다른 검이 하강을 시작했다.

“젠장.”

리즈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두 사람이 된 로레인 귀족은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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