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아가씨가 집을 나가신 거 같아 (19/65)


#19화 아가씨가 집을 나가신 거 같아
2023.06.19.



 
“뭐야? 쟤들 왜 저기 있어?”

식당에 도착해 주문을 마친 리즈는 어느 한곳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엔 커플 한 쌍이 앉아 있었는데 손 한번 잡아 보지 못한 숙맥들처럼 음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몸을 배배 꼬고 난리가 났다.

그 커플은 리즈가 잘, 아주 잘 아는 두 사람이었다.

“아니, 쉬다 오라고 여관에 보내 놨더니 왜 식당에 와 있어?”

리즈는 미라벨과 조너선을 발로 차서라도 숙소로 올려 보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녀의 정체를 들킬 수도 있기 때문에 관뒀다.

‘다음엔 아예 객실 열쇠를 쥐여 줘야겠군.’

리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드세요.”

종업원이 퉁명스럽게 말하고서 그릇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놓았는데, 그 바람에 치마에 국물 몇 방울이 튀었다.

그런데 하필, 국물이 빨간색이다. 아이보리 색 치마에 빨간 국물 자국이라니.

젠장. 매운 음식이 당겨서 시켰더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종업원은 잘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한마디 사과도 없이 휙 돌아서서 가 버렸다. 얼룩진 치마를 내려다보는 리즈의 얼굴은 곤혹으로 물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짙은 색의 옷을 입고 나오는 건데. 물로 씻으면 지워지려나?

리즈는 얼른 화장실로 갔다. 그러곤 물을 묻혀 옷자락을 비벼 빠는데, 몇 번을 해도 지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거 그렇게 해선 안 빠져요.”

“……?”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언제 왔는지 미라벨이 옆에 있었다.

오지랖 넓은 미라벨은 손을 씻다가 리즈가 낑낑대는 걸 보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손수건 끝을 부욱 찢어 내어 거기에 비누를 묻히곤 벌겋게 물들어 있는 부분 위에 올려놓고선 말했다.

“이대로 조금 불려 놔요. 그래야 색소가 섬유에서 떨어지니까.”

“아, 고마워.”

“……?”

초면에 웬 반말……? 하는 눈빛으로 미라벨이 쳐다보았다.

그제야 생각났다.

‘참, 이 얼굴이 그 얼굴이 아니지?’

“아, 제가 아는 사람하고 닮아서 그만. 고마워요. 미라…… 아니, 언니.”

처음 본 여자한테 ‘언니’ 소리를 듣고서 살짝 미간을 구기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없었다.

미라벨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해 보이곤 제 연인에게로 돌아갔다.

리즈는 그 몸에 밴 친절이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진짜 얼굴이 달라지긴 했구나 실감했다.

주인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 미라벨이 못 알아볼 정도면 세상에 리즈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순간 갑자기 전생의 서글픈 기억이 떠올랐다.

친척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으며 삼켜 온 유년 시절의 설움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야 했던 고독한 삶이.

갑자기 자유가 싫어졌다.

세상에 피붙이가 있고 없고는 차이가 크다. 리즈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 얼굴로는 돌아갈 수 없다.

“지금이 몇 시지?”

리즈는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약을 먹은 지 세 시간째. 조금밖에 안 먹었으니 앞으로 세 시간만 정도만 더 견디면 원래 얼굴로 돌아올 것이다. 리즈는 그 세 시간이 후딱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이제는 생각했다.

***

집에 돌아온 후작부인은 묘하게 집 안이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건들은 모두 제자리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사람이 문제였다.

시중인들이 죄다 허둥대는 게, 나사 한두 개쯤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부인은 그중 가장 허둥대는 미라벨을 불러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저…….”

미라벨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리즈 아가씨가 아직 안 돌아오셨습니다.”

후작부인이 괘종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녁 여덟 시. 여덟 시밖에 안 됐네.

“좀 더 기다려 봐. 친구 집에서 놀다 오겠지.”

부인이 외투를 벗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릴리아가 얼른 가까이 다가가 외투를 좀 더 쉽게 벗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후작부인은 이 일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케인만이 미묘하게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미라벨이 초조한 듯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해서 아가씨께서 친하게 지내시는 영애분들께 연락을 드려 봤는데요.”

“그런데?”

“안 오셨답니다. 어디에도.”

“얘는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부인이 걱정은커녕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언제 나갔지?”

“그게……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고? 전담 시중인이 주인의 행방을 모르는 게 말이 돼?”

미라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가씨께서 갑자기 놀다 오라고 하셔서 그랬는데.

하지만 미라벨은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가 사라진 게 전부 다 제 잘못인 것만 같았다. 조너선과 오랜만에 데이트한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선.

미라벨은 자신의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이제 보니 미라벨 안 되겠네. 하녀장 자격이 없어.”

“…….”

“모니카!”

“네, 마님.”

부인의 부름에 릴리아의 뒤에 서 있던 모니카가 얼른 대답했다.

“네가 이제부터 하녀장이다.”

“네에? 제…… 제가요?”

모니카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하곤 고개를 숙이며 복종했다.

“가……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머리 숙인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후작부인은 미라벨에게 똑바로 하라는 의미로 날카로운 눈빛을 해 보이곤 방으로 들어갔다.

리즈를 찾기 위해 마땅히 취해야 할 조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려 봐, 미라벨. 언니는 현명한 사람이잖아? 무턱대고 늦게 돌아다니는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난 언니를 믿어.”

릴리아가 처소로 올라가려다 멈추고 미라벨을 위로했다. 하지만 미라벨은 그 말이 온전히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릴리아는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처소로 올라갔고, 그 뒤를 이제 막 하녀장이 된 모니카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따랐다.

후우-.

미라벨은 너무 기가 막히고 리즈 아가씨가 가여워서 한숨이 다 났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아가씨를 챙겨 주는 사람이 있기나 했을까.

그러고선 자기라도 아가씨를 찾아봐야겠다 싶어서 몸을 돌려 입구로 향하려는데.

“대략 언제 나간 것 같습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물음에 다시 돌아섰다.

미라벨의 눈에 굳은 얼굴을 한 케인이 들어왔다.

늘 생글거리던 녀석의 몇 안 되는 심각한 모습이었다.

미라벨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케인은 자신이 책임지고 아가씨의 곁에서 치워 버리기로 결심한 인물이니까.

하지만 한 사람의 손이라도 아쉬운 지금, 그딴 결심은 아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아가씨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나도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없어져서 잘 모르겠어.”

“다른 시중인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그게…….”

“……?”

“아무도 모른다고…….”

“모른다고요?”

“응. 나가는 걸 누구도 본 적이 없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케인은 이해가 잘 되질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작가의 장녀가 나가는데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이 후작저에 일하는 사람이 몇인데. 못해도 한두 명쯤은 도중에 마주치기 마련인데.

불안감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내 생각엔 말이야.”

미라벨이 차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본인의 생각을 케인에게만 조심스레 말했다.

“아가씨가 집을 나가신 거 같아. 변장까지 하고 작정해서.”

“…….”

미라벨의 말이 케인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케인이 꺼져 가는 눈빛으로 말했다.

“저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

시계를 보는 리즈는 애가 타들어 갔다.

“아니, 왜 아직도 얼굴이 안 돌아오는 건데?”

벌써 열한 시.

최고로 집에 늦게 들어갔던 게 아홉 시였던가? 그때도 미라벨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줄 알았다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 그걸 달래 주느라 얼마나 생고생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달래 줄 사람이 미라벨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관심도 없을 테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케인도…… 그렇겠지.

휴우-.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약 안 먹는 건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는데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 걸까? 혹시 몸무게에 따라 용량이 다른 걸까?

“아! 그거였네.”

별안간 떠오른 정답에 리즈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 쳤다.

키는 그녀보다 삼십 센티 이상 크고, 몸무게는 못해도 1.5배는 더 나가는 남자와 자신을 동일 선상에 두고 복용량을 계산하다니.

어리석었다. 그럼 얼마나 더 뒤에 돌아오려나?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약병과 같이 있던 양피지를 좀 봐 둘 걸 그랬다. 거기에 약 기운을 빨리 몰아내는 방법이 적혀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겨울이 오려는지 밤공기가 차가웠다. 리즈는 옷 속으로 파고드는 으슬으슬한 한기를 느끼곤 양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 상태로 저잣거리를 어슬렁댔다.

상점은 불이 꺼져 있었고, 낮 동안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가판대는 진작에 치워졌다.

몇몇 사람들만이 간간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대부분 상태가 좋지 못했다.

간혹 술 취한 남자가 비틀대며 다가올 때면 리즈는 화들짝 놀라 벽으로 바싹 붙어 섰다.

“그래도 새벽까진 안 가겠지.”

리즈는 좋게 생각하려 했다.

한데 그 새벽까지 어디에 가 있지?

리즈는 지난 기억을 되짚으며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났다.

근방에 공터 하나가 있었다.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도 있었고, 주위에 나무가 많아서 외풍도 막아 줄 수 있는 곳이었다.

이따금씩 미라벨과 샌드위치 바구니 하나 들고 나와서 함께 자리 펴고 먹었던 곳이니만큼 정확히 기억했다.

조금 외진 곳이긴 하지만, 사람이 많은 이곳이라고 딱히 안전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리즈는 거리에서 음험하게 눈을 번뜩이는 부랑자들을 흘끔 쳐다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몇 골목을 도니 금세 공터가 나타났다. 역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리즈는 안심하고서 공터 한편에 있는 등받이 벤치에 앉았다. 나무가 바람을 잘 막아 주는 탓에 조금 전만큼 한기가 들지도 않았다. 여기라면 새벽까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새벽이 지나고 그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불길한 생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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