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몬타네르 대공
(18/65)
18화 몬타네르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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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몬타네르 대공
2023.06.18.
몬타네르 대공 다미엥 일리제르.
그는 죽은 황제와 사라진 황태자를 대신해 십 년 동안 제국을 통치한 인물로, 말만 대공이지 실질적으로 황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제 한 절기가 더 지나면 실질적일 뿐만 아니라 명목상으로도 황제가 될 터였다.
실종된 지 만 십 년이 지난 후계자는 죽은 것으로 간주해, 그다음 계승권자에게 자동적으로 황위가 양도되는 것이 루젠시아 황실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중요한 인물이 베르트 공작가를 찾았다.
그와 베르트 공작은 정치적으로 긴밀한 교류를 맺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도 잘 맞았다. 그래서 가끔 머리도 식힐 겸 황궁을 빠져나와 공작과 술을 한잔하거나, 카드놀이를 하는 등 시간을 보내려 들르곤 했는데, 마침 오늘이 그날이었다.
그는 무심코 들른 집에서 옛 친구를 발견하곤 몹시 놀라며 기뻐했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클레르 페르낭트…… 아니, 클레르 베리움 후작부인 아니십니까.”
“그냥 클레르라 부르셔요, 전하.”
베리움 부인도 무척 기뻐했다. 두 사람은 가볍게 끌어안고 잠시 해후를 나누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부재에 죄송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베르트 공작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아직 채 해후를 끝마치지 못한 두 사람을 공작의 개인 응접실로 안내했다.
“공작께선 금방 돌아온다고 했으니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하.”
“염려 마십시오. 프란시스에겐 천천히 돌아와도 된다고 전해 주십시오. 여기 계신 베리움 후작부인, 아니…… 클레르가 제 말동무가 되어 주실 테니. 그렇지요?”
“당연한 말씀을요. 쫓아내시기 전까지 붙어 있을 생각이었답니다, 호호.”
베리움 부인이 애교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살갑게 말하고 대공은 껄껄 웃음으로 응답했다.
베르트 공작부인은 아무래도 제가 빨리 빠져 주는 것이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길이라 여겼던지 차를 올리겠다는 핑계로 다소곳이 물러났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베리움 부인이 방을 둘러보았다.
베르트 공작의 응접실은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만들어진 곳으로 채광이 우수했다.
단풍이 붉게 물든 늦가을 정취를 느끼기엔 참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냐.’
보다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베리움 부인은 테라스와 정원을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자신이 노출된다는 사실이 마뜩잖았다.
그 마음을 표정에서 읽은 몬타네르 대공이 픽 웃으며 안심시켰다.
“이래 봬도 저 유리, 그냥 유리가 아니랍니다.”
“그냥 유리가 아니라고요?”
“반사 유리에요.”
용어를 퍼뜩 알아듣지 못한 베리움 부인이 잠깐 멍하게 있었다. 그러자 몬타네르 대공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울처럼 유리를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만 비출 뿐이죠.”
그 말에 깜짝 놀라며 클레르 베리움이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정말이었다.
이제 막 다과회를 마치고 정원으로 나서는 귀부인들이 테라스를 지나치며 이쪽은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 가끔 돌아보는 부인이 있긴 했지만, 제 모습이 어떤지 비춰 보기 위한 목적일 뿐 둘 중 어느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그렇군요……!”
클레르 베리움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유리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가격이 꽤 비싼 터라 보통의 귀족가에선 설치하지 않았다.
유리 하나 값이 웬만한 소귀족 가문의 저택 한 채 값과 맞먹을 정도였으니까.
과연 부와 권력 모두를 거머쥔 대귀족답네.
릴리아를 빨리 베르트 공작가의 며느리로 들여보내야겠어. 소공작이 저 애 아니면 죽겠다고까지 했다니 아들의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공작부인은 따를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베리움 부인이 고무적인 기대를 품는 사이 시중인이 차를 내왔다.
향이 짙은 커피 한 잔과 카모마일 티 한 잔이었다.
조금 전 귀부인들과 커피를 한차례 마신 터라 카모마일 티는 부인의 몫이었다.
찻잔을 들자 콧속 가득 밀려오는 허브 향에 부인의 눈이 절로 감겼다.
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대공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인은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이십 년 가까이 지켜봐 왔지만 조금도 나이가 드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베리움 부인은 얼른 찻잔을 내려놓고선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얼굴에 열기가 화끈 도는 것 같았다.
인사치레인 것을 잘 알면서도 여자를 설레게 만드는 힘이 그에겐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오히려 대공 전하야말로 불혹을 넘기신 나이에도 이렇게 청년 같으시니. 비결이 궁금할 따름입니다.”
“비결은 무슨요. 그저 할 일이 많다 보니 나이 먹는 것도 잊고 살 뿐인데요.”
그 말에 베리움 부인이 눈을 요염하게 흘기며 질책했다.
“이젠 일 그만하시고 결혼도 좀 하셔야죠. 그러다가 금방 오십 되세요.”
“좋은 자리가 있으면요.”
좋은 자리가 있으면요…….
그것이 이런 유의 대화에서 그가 주로 내놓는 멘트 중 하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대공은 독신주의자였다.
원하는 여인은 누구나 취할 수 있었으니 굳이 하나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황제 즉위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그 생각은 점점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후는 있는 게 좋겠지? 그편이 훨씬 모양새가 좋을 테니.
게다가 후계자 생각도 해야 했다.
정부 소생을 황태자로 앉힐 수는 없으니까.
선선대 황제의 사생아인 그는 오히려 사생아의 존재에 부정적이었다.
정부에게서 욕구는 채우되 자식은 절대로 볼 생각이 없었고, 설사 보더라도 그 자식을 황위에 올려 조롱받게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므로 황후가 필수 불가결이라는 원로들과 여타 대귀족들의 말에 이견은 없었다.
‘좋은 자리가 있으면요…… 라.’
베리움 부인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말이 단순히 지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님을.
그녀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누가 괜찮을까? 이 남자의 짝으로 누굴 붙여 주면 자신에게 이득이 될까?
그렇게 머릿속에서 몇몇 여인들을 대공의 옆에 놓아 보던 베리움 부인의 눈이 순간 커다랗게 뜨였다.
왜, 그 아일 생각 못했지?
“아…….”
스스로가 생각해도 기발해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자, 거울 창 너머로 귀부인들을 감상하던 대공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시죠? 클레르?”
대공의 물음에 클레르 베리움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언제 한번 저희 집에 오시지 않으실래요? 좋은 자리, 마련해 드릴게요.”
“…….”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대공이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허허 웃었다.
“그렇군요. 옛 친구에게 중매를 다 받다니.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닌데요?”
“누가 중매 서면 어떤가요? 잘 성사되면 그뿐이죠.”
대공이 대답 대신 미소만 지어 보였다.
‘본인 짝은 본인이 고르겠다는 거군.’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베리움 부인은 서둘러 덧붙였다.
“한번 만나만 보셔요. 젊고 예쁜데다 할 줄 아는 것도 많은 아이랍니다. 살짝 자기주장이 강한 게 유일한 단점이랄까, 그 외의 것들은 나무랄 것이 없답니다.”
그 유일한 단점이 대공의 관심을 끌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당신이 소개시켜 주는 여인이라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데요?”
대공이 웃음 띤 얼굴로 승낙을 표하고선 찻잔에 손을 뻗었다. 막 찻잔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서 제 쪽으로 가져오려던 그때,
관자놀이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 한 줌이 그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는 고개를 홱 돌려 통유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화단을 거닐던 귀부인들은 이번엔 분수대 쪽으로 이동했고, 막 튀어 오른 물줄기를 맞으며 소녀들처럼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들은 여기에 그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안다 한들 그런…… 선뜩한 시선으론 쳐다보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역시 신경과민인 걸까?
하긴, 그럴지도 모른다.
점점 다가오는 황제 즉위식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으니.
그는 다시 찻잔을 입에 댔다. 그리고 더는 살기 어린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
“아가씨. 여기 있습니다.”
“미안, 케인. 괜히 이런 거나 가져오라고 시켜서.”
케인이 내민 손가방을 받아 들며 릴리아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말했다.
이게 다 저 베르트 소공작 때문이었다.
그가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바람에 손가방을 정원에 두고 왔다. 정원에 있는 귀부인들에게 베르트 소공작의 약혼녀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서 머뭇거렸더니, 케인이 대신 움직여 주었다.
“아닙니다. 시중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걸요.”
케인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릴리아는 그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보았다. 평소보다 유난히 따사로운 가을볕에 오래 서 있더니 기어이 땀이 났나 보다.
그녀는 손수건을 찾으려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때,
“릴리아!”
방해꾼이 나타났다.
잠깐 구겨졌던 릴리아의 미간은 베르트 소공작에게로 돌아서자마자 활짝 폈다. 제 감정을 숨기고 남의 기분을 먼저 살피는 태도는 싫은 상대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그녀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당신에게 나만의 장소를 가르쳐 줄까 해요.”
“그…… 아까도 본 것 같은데…….”
“거기보다 훨씬 의미 있는 곳이랍니다.”
“그곳이…… 어딘데요?”
“후원 끄트머리에 있는 창곤데, 어린 시절 어머니 몰래 잡동사니를 모아 둔 곳이에요. 가요. 신기한 물건들이 많아요.”
베르트 소공작이 릴리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릴리아는 힘없이 딸려 가며 케인을 돌아보곤 구해 달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케인은 담담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배웅했다. 여기 있을 테니 마음껏 둘러보시고 오라는 표정으로.
릴리아와 베르트 소공작이 관목 덤불 너머로 사라지고 난 뒤,
케인은 자신이 방금 다녀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유서 깊은 건물 특유의 담쟁이덩굴 외벽 너머에…… 그의 숙부 몬타네르 대공이 있었다.
그는 분명히 느꼈다.
인생의 삼분의 이를 그를 존경하는 데 썼다. 나머지 삼분의 일을 그를 증오하는 데 썼다.
유년 시절 제 유일한 혈육이자 스승인 숙부를 본받고 싶은 마음에 그의 것이라면 숨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나중엔 십 리 밖에서도 숙부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감을 발달시켰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었다.
숙부가 거울 창 너머에 있었다.
“하아…….”
절로 웃음이 났다. 이렇게 한 공간에 있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그는 자신을 보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만약 봤다면? 그러면 자신을 알아봤을까?
그럴지도.
숙부는 예리한 사람이니까.
케인은 어린 시절 가장무도회에서 가면 쓴 사람들의 이름과 신분을 척척 맞춰 내던 숙부를 떠올렸다. 그러니 숙부는 이 가면 속의 진짜 그, 케인이기 이전의 그도 알아차릴지 모른다.
그걸 피하고자 여태껏 단 한 번도 숙부 앞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막상 그와 가까워지자 묘한 충동이 샘솟았다.
거울을 깨트려 볼까?
안 될 건 없었다.
바닥엔 돌멩이가 굴러다니고, 범인이 누군지 모르게 할 기술이 그에겐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열매가 영글기 전에 따면 떫은맛밖에 나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열매는 완전히 무르익을 테고, 그 속의 과육은 최고의 단맛을 자신의 혀끝에 선사하리라.
바로, 제 형과 형수까지 죽이며 오른 자리에서 조카에게 내쳐지는 숙부의 절망이란 형태로.
“그러니 그전까지 마음껏 즐겨. 황제가 되는 단꿈에 흠뻑 젖어 있으라고. 숙부.”
케인은 나지막이 중얼거린 뒤 즐거운 얼굴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