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변신에는 고통이 따른다
(17/65)
17화 변신에는 고통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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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변신에는 고통이 따른다
2023.06.17.
릴리아의 방이 있는 2층은 현재 텅 비어 있었다.
간혹 시중인이 주인의 방을 청소하러 왔다 갔다 하긴 했지만, 워낙 깔끔하게 정리하기로 이름난 릴리아의 방답게 청소할 건 별로 없었다.
리즈는 누가 없는지 주위를 잠시 살피며 릴리아의 방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하지만 릴리아의 방이 목표는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같은 층에 있는 케인의 방이었다.
복도 끝에 붙은 조그만 방문 앞에 도착한 리즈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리곤 안으로 밀었다. 살짝 삐걱하는 소리가 들려서 흠칫 놀랐지만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리즈는 무사히 방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와아, 황태자 전하 이런 방에 살고 있었단 말이야?’
방은 글로만 보던 것보다 더 형편없었다.
누르스름한 벽지에, 가구라곤 침대와 옷장이 전부였다. 전생의 고시원도 이보단 근사할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고귀한 신분으로 이런 누추한 방에 십 년 가까이 살 수 있는 걸까?
문득 리즈는 자신이 여태 그의 방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그를 진짜 좋아한 게 아니라 정말 단순한 소유욕이었던 걸까? 이런 실태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지금도 케인의 생활 환경이 궁금해서 온 건 아니었다. 리즈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리즈는 기억 속 원작 내용을 더듬었다.
「그는 마룻바닥의 세 번째 나무판자 밑에 숨겨 둔 약을 꺼내어 삼켰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모습이 변했다.」
리즈는 그 내용대로 침대 머리맡에서 왼쪽으로 세 칸 간 데 있는 마룻바닥의 판자를 접이식 칼을 이용해서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와아, 정말이잖아?”
정말 원작대로 그 안에 약병이 있었고, 그 약병 안에 환약 몇십 개가 들어 있었다. 제조법이 적힌 듯한 양피지 두루마리도 하나 있었다.
리즈는 약병을 들고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이걸 먹으면 정말 모습이 바뀐단 거지?’
약은 꽤 많이 들어 있어 한 알 사라진다고 금방 눈치챌 것 같진 않았다. 리즈는 뚜껑을 열고 병을 기울여 약을 한 알 꺼냈다.
그러곤 아무 생각 없이 삼키려다 멈칫했다.
‘얼마나 먹어야 하지? 원작 속에서 케인이 열흘마다 세 알을 먹는다고 했어. 그럼 한 알에 사흘 조금 더 간다는 거잖아?’
리즈에게 필요한 건 단 몇 시간만의 바뀜이었다. 잠시 신비한 경험을 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리즈는 들고 있던 접이식 칼로 약을 네 등분했다. 그리고 그중 한 조각을 꿀꺽 삼키곤 나머지 세 조각은 냅킨에 싸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잠시 뒤…….
“으아아악-!”
***
뭐지?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저기 케인…….”
“…….”
“케인?”
잠깐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던 케인이 퍼뜩 정신을 차려 자신을 부른 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릴리아였다. 릴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케인에게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닙니다.”
케인이 표정을 얼른 바꾸며 말했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런 일 없어. 그냥 좀 앉아 쉬라고.”
릴리아가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녀는 노골적인 베르트 소공작의 구애에 넌더리가 나 있던 찰나였다.
그는 온갖 꽃이며 보석들로 자신의 환심을 사려 했는데, 고마운 척하느라 혼났다.
하지만 그렇게 애쓴 보람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베르트 소공작에게 상냥하게 웃어 주고, 선물들에 감격해할 때마다 케인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져 갔으니까.
‘신경 쓰이긴 쓰이나 보네.’
릴리아는 속으로 흡족해했다. 그래서 소공작에게 더 다정하게 대했다. 은근슬쩍 손도 잡고, 어깨의 먼지도 가볍게 털어 주었다.
하지만 케인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억지로 이 자리에 떠밀려 나온 그는 심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였다. 리즈와 간만에 함께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이렇게 쫓아 버리다니.
‘두고 보자, 리즈 베리움.’
그렇게 속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던 중에 언뜻 잡목림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리즈의 목소리를 들었다.
리즈가 이곳에 있을 리도 없고, 후작저는 여기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상한 일이다.
역시 잘못 들은 거겠지.
“쉬어도 되는데.”
릴리아가 자신의 곁을 지키려는 케인에게 속내와는 다른 말을 했다.
“괜찮습니다. 제 일인데요.”
사실 케인도 쉬고 싶었지만, 가만히 있다간 환청이 계속 들릴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다.
환청이라니.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불과 한 절기 전만 해도 끔찍해 마지않던 여인이 이렇게까지 자신의 정신을 흐려 놓는 사람이 될 줄이야.
“조금 있으면 환영도 보이겠군.”
그는 자조 섞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릴리아와 베르트 소공작의 꽁냥꽁냥 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리즈의 환영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처럼 지루하진 않을 테니까.
***
“으윽…… 사…… 살려 줘.”
리즈는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애써 소리를 삼켰다.
맘 같아선 마구 소리를 질러 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그럼 이 사태를, 하인의 방에 멋대로 들어온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리즈는 떼굴떼굴 구르며 고통을 참아 내려 했다.
하지만 참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누군가 내장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잘근잘근 짓뭉개는 기분이었다.
피가 역류하고, 눈알은 빠질 것 같았다. 뇌는 두개골을 박살 낼 듯이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으며, 살갗은 마취하지 않고 박피되는 기분이었다.
이런 말로도 감히 표현이 다 안 될 정도로 지독한 고통이었다.
케인은 열흘마다 이런 고통을 매번 느껴 왔던 걸까. 열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런 것도 모르고 마음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어 좋겠다고 생각했다니. 리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씩 리즈가 불시에 찾을 때마다 케인이 조금 늦게 왔던 기억이 났다.
아마도 그 순간 이런 탈피 과정을 겪고 있었겠지.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화를 냈던가?
이젠 나를 네 주인으로 생각지도 않는 거냐며. 내가 널 총애하니까 우습게 보는 거냐며 얼마나 몰아세웠던가?
아…… 나란 여잔 정말 최악이구나. 케인이 끔찍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뉘우침의 시간을 갖다 보니 고통이 점점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에 힘이 풀어지고, 튀어나올 것처럼 날뛰어 대던 심장 박동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끝난 건가?”
리즈는 한숨과 함께 나지막이 중얼대다 깜짝 놀랐다.
이게 내 목소리?
여자로선 살짝 저음에 속하는 리즈의 목소리가 릴리아처럼 청량한 고음이 되었다.
목소리만도 이렇게 달라졌는데 얼굴은 어떨까? 리즈는 얼른 일어나서 거울을 보았다.
“세상에…….”
놀라움을 넘어 경악했다. 이게 내 얼굴?
적색 머리에 보랏빛 눈동자의 자신이 다갈색 머리칼에 검정 눈동자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몹시 평범한 얼굴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아니고선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아니, 작중 최고 미남이라는 황태자는 바뀐 얼굴도 미남인데 왜 자신은 이렇게 변했지?
그래도 어디 가서 미인 소리는 꼬박 들어 왔는데.
혹시…….
리즈는 생각했다.
‘약을 먹으면 내면 따라 변하는 건가?’
그렇게 따지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적어도 자신의 내면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축에는 속한다는 말이니까. 추하지 않아 다행이다.
‘아무튼 이제 진정도 되었겠다, 슬슬 나가 볼까.’
리즈는 케인의 방이 자신이 들어오기 전과 똑같은지 확인한 후 슬며시 방문을 열었다.
밖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2층은 그랬다. 하지만 1층으로 내려가려니 시중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론 곤란했다. 이곳 베리움 후작가는 낯선 여인이 주인 아가씨의 옷을 입고 있는 걸 용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리즈는 발소리를 죽여 복도 반대편 끝 방으로 걸어갔다.
같은 층에 시중인들의 세탁물 보관실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리즈는 바구니 속에서 제일 멀쩡해 보이는 하녀복을 들고 얼른 삼 층 방으로 뛰어 올라왔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질끈 올려 묶으니 나름 시중인처럼 보였다.
옷도 나름 잘 맞았다. 가슴이 좀 끼는 것 외엔.
그러고 보니 얼굴은 바뀌어도 몸은 바뀌지 않나 보다.
리즈는 원래 자신의 몸에 있던 자그만 점들이 바뀐 몸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가슴도 그녀의 가슴 그대로였다. 어릴 적부터 유달리 가슴이 발달된 그녀였으니까.
아무튼 이젠 진짜로 나가 봐야 했다.
리즈는 밖에 나가서 갈아입을 활동복 한 벌과 손가방을 보자기에 쌌다.
그러곤 중요한 소포를 집사실에 전달하려는 것처럼 들고 나갔다.
다행히 집사실이 있는 일 층 로비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도 그녀를 몰라봤다. 이대로 맘 편히 나가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러던 그때.
“야, 너!”
리즈는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걸려도 하필이면…….’
모니카의 앙칼진 목소리에 돌아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이거 좀 주방에 갖다 놔.”
뭔가 선반에 탁 내려놓는 소리가 나더니 모니카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휴우-.
리즈가 가슴을 쓸어내리곤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콘솔 위에 모니카가 먹은 것으로 보이는 주스 컵과 간식을 포장했었던 듯한 유산지가 굴러다니는 쟁반이 놓여 있었다.
‘아니, 자기가 먹은 걸 왜 남한테 갖다 놓으라 시키는 거야?’
리즈는 혀를 끌끌 차며 그대로 돌아 나가려다 마음을 돌렸다.
저대로 놔두었다가 깔끔한 걸 좋아하는 어머니가 보기라도 하면 그 질책은 온전히 미라벨에게로 향하기 때문이다. 미라벨이 하녀장이니까.
리즈는 쟁반을 얼른 주방에 가져다 놓고, 누가 볼세라 잽싸게 뛰어나왔다.
그러고 나서 입술을 짓씹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 저거 가만두나 봐라.”
***
집 밖으로 나와 가까운 공원 공중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하녀복은 다시 보자기에 싸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잘 놓아두는 걸로 준비는 끝났다.
“이제 뭘 하든 자유다!”
리즈는 팔을 넓게 벌려 상쾌한 바깥 공기를 한가득 들이마시며 잠시간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고 나서 생각했다.
후작가의 장녀로서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이 자유를, 귀족치레를 하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어디에 제일 먼저 쓰면 좋을까.
아! 갑자기 생각난 곳이 있었다. 낮에 미라벨과 마부 조너선을 데이트 보낸 장소.
튤립 축제…… 말고 여관.
거기 1층 식당이 꽤 괜찮다 들었던 기억이 났다. 마침 배도 고프던 찰나였다.
“옳지, 거기로 가자.”
리즈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합승 마차 한 대가 마차 정거장에 서 있었다. 출발 시간을 준수하기 위해 역무원이 회중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시간이 다 되었는지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신호를 막 보내려고 했다.
“잠깐만요!”
리즈는 전력으로 달려 가까스로 마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마차 안은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리즈는 그 틈바구니에 끼어 앉으며 간만에 전생의 시내버스 나들이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