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뜻밖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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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뜻밖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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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뜻밖의 자유
2023.06.16.
방으로 올라온 리즈는 미라벨이 질릴 때까지 하품을 참아 가며 연회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해 줘야 했다. 이 세계에 녹음기가 없는 게 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요? 그 남자분은 누구시라고요?”
“그것도 조금 전에 이야기했잖아. 아버지의 제자라고.”
“하지만 이름은 말씀 안 해 주셨잖아요.”
“이름은…….”
뭐더라? 카…… 뭐였던 거 같은데. 큰일이군. 남자가 다음에 또 물어본다고 했는데.
그런데 잠깐. 다음에 안 만나면 그만 아닌가?
리즈는 그렇게 생각하고서 이름을 기억해 내는 일을 관두었다. 그러고선 계속해서 히죽거리는 미라벨을 향해 물었다.
“내가 잘생긴 남자와 춤춘 게 그렇게나 좋아?”
“그게 아니고요.”
“……?”
“릴리아 아가씨 말이에요. 그 아가씨가 뒷전으로 밀려났을 걸 생각하니 고소해서요.”
“너도 참…….”
빙의 자각하고 기껏 내가 변했더니 이젠 얘가 흑화했네?
“그렇게 밀려나지도 않았어. 연회 끝나면서 남자들한테 애프터 신청을 얼마나 받았는데.”
“아가씨는요? 아가씨도 받으셨죠? 그 남자한테?”
“……아니.”
미라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니라고요? 아니, 그분은 그렇게 사람을 띄워 놓고서 다음을 기약하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띄워 준 것만도 고맙다 해야지. 너무 많은 걸 바라선 안 돼.”
그리고 사실, 그런 걸 바라기에 남자는 지나치게 잘나 보였다. 리즈와 헤어지고 나서 그를 따라 줄줄이 나서던 여인들을 생각하면, 한때나마 춤 상대해 준 게 어딘가.
미라벨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곤 리즈가 벗어 놓은 옷과 장신구를 정돈하는데, 뭔가가 없어졌다는 걸 알아차리곤 물었다.
“아가씨, 토파즈 귀걸이 한 짝 어디 갔어요?”
‘그거, 그 남자가 만남의 징표로 들고 갔어.’
리즈는 사실을 말해 줄 수 없었다. 미라벨이 또 설레발칠까 봐.
“이…… 잃어버렸어. 춤추다가 어디 떨어트렸나 봐.”
“제가 얼른 가서 찾아볼게요.”
“아냐, 그러지 마!”
리즈의 다급한 반응이 부자연스러웠는지 미라벨이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리즈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둘러댔다.
“그…… 그러니까…… 일부러 찾지는 말라고. 청소하다 보면 어딘가 굴러다니고 있겠지.”
미라벨은 그래도 찾아보겠다고 말하려다, 그 장신구가 할인해서 파는 세트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그리 수고할 필요가 없겠다 싶었는지 리즈 곁으로 돌아왔다.
리즈는 그 틈에 미라벨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넌 알고 있었지? 어머니가 릴리아한테 최고급 장신구 세트를 사다 줬다는 걸.”
“아…… 네. 어쩌다 보니…….”
“뭘 그런 걸 숨기고. 앞으론 그러지 마. 어머니 저렇게 나오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래도…… 네, 그럴게요.”
미라벨은 조금 더 욕해 줄까 하다가 관뒀다.
“그럼 쉬세요, 아가씨.”
“너도.”
미라벨은 리즈의 잠자리를 봐 주고서 방을 나왔다.
처소로 돌아가는 미라벨의 입꼬리가 계속해서 씰룩거렸다.
‘애프터 신청이 없었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내 아가씨가 오늘 연회에서 가장 빛났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지.’
미라벨은 그것이 제 일처럼 뿌듯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며칠 뒤 식사 시간에 베리움 후작부인이 소식을 전했다.
“베르트 공작 댁에서 다과회 초대장이 왔단다. 릴리아 네 이름도 있어. 소공작이 네가 아주 마음에 든 모양이야. 이렇게 제 어머니를 부추겨서 초대하게 만든 걸 보면.”
“…….”
“그래서 오늘 리즈 대신에 널 데리고 갔으면 하는데, 어떠니?”
“어머니 뜻에 따를게요.”
릴리아는 다소곳이 순종했다.
하지만 리즈는 찰나의 순간 릴리아의 얼굴에 서려 있던 망설임을 간파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길이 식당 한편에서 대기 중인 케인에게 일순 향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하긴, 고민되기도 하겠지.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딸이 되는 것과 마음에 품은 남자 사이에서.’
릴리아는 리즈가 무서워서라도 부인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부인의 눈 밖에 난다는 건 그야말로 그녀가 이 집에서 내쳐진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래서 원작에서도 남주인 케인을 향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어머니 마음에 드는 남자와 혼인까지 하려했다.
원작대로라면 이쯤에서 케인이 딱 나서서 릴리아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용기를 북돋아 줘야 하는데. 어째서 도통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까?
지난 며칠간 베르트 소공작이 정문이 닳도록 후작저를 들락거렸음에도 케인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혹시 질투를 속으로만 삭이는 걸까?
리즈가 미적지근한 두 주인공 사이를 의아해하고 있을 때, 베리움 부인이 말했다.
“안 그래도 영지에서 품질 좋은 특산품이 올라왔는데 가는 길에 좀 가져다 드려야겠어. 짐이 많은데 누굴 데려가면 좋을까?”
그 순간 리즈의 사고 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리즈는 어머니가 모니카를 고르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당연히 케인을 데려가야죠. 릴리아의 시중인이잖아요.”
“……?”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순 리즈를 향해 모아졌다.
반절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관대함이었다.
하긴, 케인과 인사 몇 마디 나눴다는 이유로 시중인을 잘라 버리던 십 년 묵은 리즈의 집착 어린 이미지를 탈피하기에 반절기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무려 베르트 공작가를 방문하는데 케인 정도는 데려가셔야죠.”
“듣고 보니 그렇구나.”
부인이 케인을 스윽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베르트 공작부인이 미남 미녀를 선호해서 부리는 사람도 죄다 연극배우 출신들을 고용한다는 것은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부인은 예비 사돈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릴리아도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다.
리즈는 제 뜻대로 되었다는 생각에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 주인공을 붙여 놓았다. 이번 기회에 케인이 확실히 감정을 자각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전개가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손해는 아니다.
리즈 그녀에게 자유 시간이 생기니까.
불편하고 찜찜한 세 사람을 쫓아 버리고 마음껏 집을 활보할 수 있는 자유 시간.
‘아, 나 진짜 머리 너무 좋은 거 아냐?’
리즈는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속으로 자화자찬했다. 그러느라 아까부터 제 등 뒤에 날카롭게 꽂히는 시선은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다.
***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으세요?”
모니카가 릴리아한테 물었다. 머리를 빗겨 주는 내내 릴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릴리아는 움찔했다.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 티가 났구나.
“어머니가 날 인정해 주시는 것 같아서.”
모니카에겐 단지 그렇게만 말해 두었다. 케인 이야기를 꺼내서 좋을 게 없으니까.
“어머, 마님은 전부터 아가씨를 인정하셨어요. 리즈 아가씨보다 아가씨를 더 총애하는걸요. 누가 보면 아가씨가 친딸인 줄 알 정도로.”
“그런 말 하면 못써, 모니카. 언니가 들으면 슬퍼할 거야.”
“에휴.”
모니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아가씬 너무 착하세요. 그렇게 착하셔서 리즈 아가씰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
릴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요즘 들어 그게 점점 사실이 아니게 되어 간다.
언니가 변하고 있다.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점점 변했다. 변하면 안 되는데. 그럼 자신의 정체성이 약해지는데.
릴리아는 차라리 언니가 예전처럼 자신을 괴롭혀 줬음 좋겠다고까지 생각했다. 자신은 얼마든지 견뎌 낼 힘이 있는데. 언니는 왜 갑자기 괴롭힘을 멈춘 걸까?
그리고 연회장에서 언니와 춤춘 그 남자는 누굴까? 마치 언니를 돋보이게 해 주기 위해 나타났다는 듯이 임무가 끝나자마자 홀연히 사라지고 만 그 남자.
릴리아는 그 남자에 집중하느라 베르트 소공작의 구애도 대충 흘려들었다.
어째서 그 남자에게 눈이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마음에 둔 사람은 케인뿐인데.
혹시 아버지의 기질이라도 물려받은 걸까? 그래서 바람둥이 기질이라도 갖춘 걸까?
“아가씨, 마님께서 준비 다 되셨냐고 물어보시는데요.”
마침 케인이 후작부인의 전언을 알려 왔다.
릴리아는 케인을 돌아보았다. 분명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다. 하지만 연회장의 그 남자를 보는 순간에도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기라도 한 걸까?
릴리아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일단은 눈앞의 케인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다 되어 가. 십 분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 주겠어?”
“네, 그럴게요. 천천히 나오세요.”
돌아서 나가는 케인을 보고 있으니 다시 그 남자 생각은 나지 않았다. 역시 잠깐의 설렘이었을 뿐이구나. 그날 그 사람이 너무 잘생겨서.
릴리아는 안도했다.
***
세 사람이 집을 떠났다.
홀가분해진 리즈는 내친김에 미라벨에게도 간만의 휴식을 선사하기로 했다.
“네? 나갔다 오라고요?”
“그래, 오늘 세팔르 광장에서 튤립 축제하는 날이잖아? 가서 보고 오라고.”
“하지만 아가씨 식사는…….”
“이 집에 시중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그리고…….”
리즈가 낮고 음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잣거리에 새로 생긴 여행객 전용 여관이 하나 있는데 꽤 시설이 좋대.”
“그래서요?”
미라벨이 리즈의 의도를 미처 간파하지 못하곤 물었다. 그래서 리즈는 끝까지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너선하고 느긋하게 쉬다가 천천히 들어오라고. 회포도 좀…… 풀고.”
“네에?”
리즈가 조용하게 말한 것이 무색하게 미라벨이 크게 소리쳤다.
곧이어 미라벨이 새빨개진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더듬거렸다.
“그……그게 무슨……! 어머, 아…… 아가씨도 참…… 이, 이상한 소리를…….”
리즈는 그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서랍장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미라벨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두둑해 보였다.
“늦기 전에 빨리 갔다 오는 게 좋을걸? 이렇게 실랑이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요.”
“그래도 그럴 순…….”
하지만 말과는 달리 미라벨은 시계를 흘끗 쳐다보며 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했다. 리즈는 그녀를 억지로 방 밖으로 떠밀고 문을 잠갔다.
“감…… 사해요. 아가씨.”
문 너머로 미라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즈는 그 수줍은 목소리와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좋을 때다.”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도 저런 것이었는데.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닌데.
어째서 자신한텐 그 소박한 꿈이 이뤄지지 않는 걸까. 혼사도 이뤄지지 않고. 연회 이후엔 남자들의 관심이 온통 릴리아에게 집중되는 바람에 자신에겐 이제 구혼장 하나 날아오지 않는 상태였다.
이젠 너무 당연한 듯 느껴져서 실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다 잊고 마음 편안하게 즐겨야지.
“뭘 해 볼까?”
의자에 앉아 협탁에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문득 리즈의 머릿속에 줄곧 상상으로만 남아 있던 무언가가 불쑥 떠올랐다.
“그래, 그걸 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