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낯설고도 익숙한 남자 (15/65)


#15화 낯설고도 익숙한 남자
2023.06.15.



 
취기는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다리도 삐끗하지 않았다.

즉 춤을 추지 못할 이유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남자의 손을 선뜻 잡을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이 남자의 손을 잡으면 안 돼…… 라는 내면의 소리는 뭘까.

안 될 이유가 없잖아.

케인이라면 또 모를까. 이 남자는 단지 아버지의 제자일 뿐인데.

리즈는 제 나름대로의 논리로 이 기묘한 위화감을 납득했다.

‘너무 잘생겨서 그런가 보다. 너무 잘생기면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법이니까.’

리즈는 이참에 거부감을 극복해 보기로 했다.

“좋아요.”

남자의 손에 그녀의 손을 올려놓으니, 그가 부드럽게 무도회장 중앙으로 이끌었다.

베르트 소공작이 릴리아에게 그랬듯이.

사람들이 바닷물 갈라지듯이 갈라지며 그들에게 길을 터 주었다.

남자는 리즈의 날개뼈 아래에 한 손을, 나머지 손은 공중에서 부드럽게 깍지를 끼곤 춤을 리드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너무 자연스럽고 서로 호흡이 잘 맞아서 꼭 언젠가 함께 춤을 춰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마침 음악도 리즈가 케인과 함께 물속에서 연습하던 왈츠 3번이었다.

“잘하시는데요?”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웃을 때마다 눈빛이 그윽해지는 게 아주 요염했다. 입술로 그리는 호선도 멋졌고,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도 아름다웠다.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잘생긴 외모다. 그럼에도 감히 말로 표현해 보자면, 비현실적인 외모. 그래서 감히 사심이 들지 않는 미남자…… 밖에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 정도 춤이 궤도에 올랐을 무렵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죠.”

“……?”

“제 이름 안 물어봐요?”

아, 그렇군. 이름을 안 물어봤네. 근데 별로 궁금하진 않은데. 어차피 다시 볼 사이도 아니고…… 라곤 말할 수 없으니 예의상 물어봤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카스트리온이에요.”

“아…… 네.”

“제 이름이 뭐라고요?”

“……네?”

갑자기 남자가 테스트를 했다. 젠장. 흘려들었는데.

뭐였더라?

“카…… 지스?”

그러자 남자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카스트리온이요. 따라 해 봐요.”

“카스…… 트리온…… 님.”

왠지는 모르지만 ‘님’을 붙여야 할 것 같아서 붙였다. 따지고 보면 그럴 필요 없는데. 왕이나 왕자도 아니고.

그나저나 이런 걸 왜 해야 하는 거지? 또 볼 사이도 아닌데.

“다음에 만나면 물어볼 거예요. 잊어버리지 말아요.”

“……?”

다음? 다음이 있다고?

혹시 아버지에 대한 애도로 계속 찾아오겠다는 말인가?

의아해하는 사이 곡이 끝났다.

리즈는 손을 풀고 예를 갖추려 했다. 그런데 남자는 리즈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한 곡 더 춰야죠.”

“또요? 이젠 다른 상대하고 추시면…….”

“안 되는데요?”

“……?”

“제가 한 우물만 파는 경향이 있거든요.”

이상한 남자네. 원래 이런 무도회는 이 사람 저 사람하고 춤을 맞추며 은밀한 기류를 주고받는 장소가 아니던가? 한 사람 하고만 춤추면 재미없을 텐데.

그의 춤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영애들의 실망 섞인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로운 연주가 시작되었다.

빠르고 강렬한 도입부를 듣는 순간 리즈의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이 곡 알아.’

루젠시아의 춤곡 작곡가 페레스 아블리에의 신곡으로, 공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국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타 왕국에서 갓 넘어온 이 남자가 어떻게 아는 걸까?

하물며 이 곡은 음악의 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리듬과 선율이 빠르고 생소할 텐데도 남자는 스텝 한 번 꼬이지 않고 유려하게 춤을 이끌었다.

‘대체 어떻게……?’

리즈는 감탄했고, 또 신기했다.

최신 음악에 유달리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리즈는 이 음악이 발표되자마자 케인을 시켜서 악보를 구해 오게 했다. 그러곤 둘이서 남몰래 곡을 흥얼거리며 춤을 추었더랬다.

운동 신경이 좋은 케인과도 고생해서 겨우 합을 맞춘 곡인데.

그런데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과 이렇게 잘 맞을 수가 있지?

이제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나고 오직 리즈와 카…… 무슨 경만이 남아 춤을 추게 되었다. 그녀와 그가 이 무대의 주인공 같았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파트너처럼 손발이 딱딱 맞았다.

곡이 절정에 달하자 남자는 리즈의 한 손을 잡고 멀리 내던졌다가 손끝에 힘을 주어 당겼다. 리즈는 그 손을 따라 또르르 말려 남자의 품에 안겼고, 그의 무쇠처럼 단단한 팔에 체중을 실으며 허리를 뒤로 젖히는 순간.

음악이 끝났다.

일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가 녹인 순금처럼 일렁거리는 것을 리즈는 보았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미치도록 원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하지만 바람둥이가 아니고서야 이제 막 만난 여자를 상대로 그런 마음을 품을 리가.

리즈는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취했거나, 미쳤거나.

남자가 힘도 별로 들이지 않고 리즈의 몸을 가뿐하게 일으켜 세웠다. 곧이어 연회장 안에 박수가 쏟아졌다. 리즈는 어리둥절했다.

잊고 있었다. 이 회장 안에 자신과 이 남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걸.

남자가 사람들의 환호에 우아하게 답례하고, 리즈도 얼떨결에 치맛단을 살포시 감싸 쥐며 예를 갖췄다. 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 번도 이런 박수갈채를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서 있는 탓에 인사는 동서남북 각기 네 방향을 골고루 돌아가며 해야 했다. 마지막 북쪽 방향을 바라보며 치마폭을 펼치고 사뿐히 앉았다 일어서는데.

리즈는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정면에 이 무대의 주인공, 릴리아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묘했다.

‘왜일까?’

입은 웃고 있는데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남자와의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깔끔한 작별이었다. 딱 하나만 빼곤.

‘로레인 남자들은 의미 있는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여인에게서 징표 하나를 받곤 하죠.’

그렇게 말할 때, 리즈의 토파즈 귀걸이 한 짝은 이미 남자의 손안에 있었다.

이젠 별로 소중하지도 않은 물건이었으므로 얼마든지 가지시라고 했다.

남자가 떠나고 얼마 뒤 연회도 끝이 났다.

귀부인들을 배웅하던 베리움 부인은 그녀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제가 원하던 방식의 찬사가 아니었다.

‘큰따님이 춤을 참 잘 추시더군요. 감탄했어요. 언제 한번 저희 집 무도회에 초대해야겠네요.’

나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뜻이니 만족 못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막 제 방으로 돌아가려는 리즈를 보자 도저히 한소리 하지 않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잠깐 나 좀 보자.”

부인이 리즈를 불러 세웠다.

“동생이 주인공인 무대에 네가 더 돋보이면 어쩌자는 거니? 나불거리기 좋아하는 귀부인들은 분명 뒷담화로 한마디씩 할 거다. 내가 친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수양딸을 들러리 삼았다고.”

“아니면 된 거 아닌가요? 뭘 그렇게 의식하세요.”

이런 때 그냥 ‘네, 죄송합니다.’ 하고 넘어가는 건 리즈 스타일이 아니었다.

“넌 아주 머리가 꽃밭이구나?”

“…….”

“사교계는 사람 진심을 알아주는 동화 속 세계가 아니야. 남자들은 전쟁터에서 칼 들고 싸우지만, 여자들은 사교계에서 혀와 눈빛으로 싸운다는 말 못 들었니? 사교계는 여자들의 전쟁터야. 그것도 교묘한 전쟁터라고. 맞아도 아닌 척해야 하고 아닐 땐 더 아닌 척해야 하는 곳이 이곳이라는 말, 내가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어머니, 전 괜찮아요.”

한편에서 얌전히 듣고 있던 릴리아가 나섰다.

“사실 오늘 언니가 그렇게 시선을 끌어 줘서 전 오히려 고마웠어요. 제가 지식이 많이 얕아서 상식이나 대화 소재가 좀 떨어진 상태였거든요. 괜히 무식이 탄로 나서 어머니께 누가 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했는데, 언니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어요. 전 언니한테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언니 감사합니다.”

릴리아가 허리를 깊게 숙이며 리즈에게 예를 표했다.

“어쩜 이렇게 이쁜 말만 하는지.”

부인이 이뻐 죽겠다는 얼굴로 릴리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말거라. 오늘 보니까 네가 아는 선에선 말을 곧잘 하더구나. 지식이야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쌓으면 된다. 몰라서 말을 못 하는 건 괜찮아. 알아도 말을 못 하는 게 문제지. 내가 집사에게 말해서 최고로 유명한 가정교사를 붙여 주도록 하마. 너라면 석 달만 배워도 웬만한 영애들과의 대화에서 지진 않을 게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열심히 배울게요.”

리즈는 이 순간 생각했다. 어머니의 딸은 핏줄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고.

예쁜 짓을 하고 못 하고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리즈는 이제 어머니의 딸이 아니다.

“……올라가 보겠습니다.”

리즈는 두 모녀의 훈훈한 장면을 뒤로 하고 연회장을 나왔다.

그렇게 막 거실로 나왔을 참에 저택 입구에서 들어오는 케인을 발견했다. 외출복 차림의 그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며 리즈가 물었다.

“어디 갔다 와?”

“여기저기 쏘다녔습니다. 휴가라서요.”

“그렇구나.”

없는 줄도 몰랐네.

있었다면 좋았을걸. 베르트 소공작과 릴리아의 눈꼴신 광경을 보여 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그럼 들어가서 쉬어.”

리즈는 그렇게 말하고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케인이 대형견처럼 리즈를 졸졸 따르며 물었다.

“오늘 연회 잘 치르셨어요?”

“뭐, 그럭저럭.”

“춤은 누구랑 추셨는데요?”

“웬 남자랑.”

“그래요? 춤춰 보니 어땠어요? 마음에 드셨어요?”

“나쁘진 않았…… 근데 그런 건 왜 묻지?”

케인답지 않게 꼬치꼬치 캐묻는 게 이상하다 여긴 리즈가 홱 돌아서서 물었다.

“……그냥요. 그냥, 제가 없는 동안에 어떠셨나 궁금해서요.”

케인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 웃음이 묘하게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네 주인한테나 신경 써.”

리즈는 퉁명스럽게 말하고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잘 올라가네?’

케인은 리즈가 층계를 무사히 올라 복도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제 처소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온 케인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놓고 실내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셔츠 단추를 끌렀다.

다섯 번째 단추가 끌러지고, 탄탄한 가슴 근육이 공기 중에 막 능선을 드러내기 직전.

“아!”

그가 갑자기 생각난 듯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냈다.

토파즈 귀걸이 한 짝이었다.

케인은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것에 즐거운 추억이라도 스며 있는 듯,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이내 눈빛이 맹수처럼 집요한 빛을 발하더니…….

갑자기 귀걸이를 움켜쥐었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