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무도회 (14/65)


#14화 무도회
2023.06.14.



 
성인식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절반은 어머니의 부탁으로, 나머지 절반은 릴리아가 궁금해서 온 것이었다.

그들은 베리움 부인의 의도대로 부인의 관대함을 칭송했다.

“사교계에 이렇게 사생아를 당당히 드러내 놓다니. 역시 베리움 후작부인은 배포가 크단 말이야.”

하지만 황갈색 드레스를 입은 릴리아가 수줍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단순히 베리움 후작부인이 배포가 커서만은 아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릴리아는 단숨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사실 객관적으로는 리즈 쪽이 조금 더 미인상이었지만, 다소 고집 세 보이는 인상의 리즈보다 선한 인상의 릴리아가 사람들 눈엔 더 아름다워 보였다.

게다가 릴리아는 성격도 사근사근했고, 말솜씨도 좋았다.

자신의 의견은 거의 내세우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말엔 기분 좋게 동조했고, 상대가 원하는 것,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려 대화를 유쾌하게 잘 이끌었다.

분위기가 무르익기도 전에 연회장은 릴리아에게 구애하려는 사람들로 들끓게 되었다.

그녀의 파트너인 베르트 소공작은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그들로부터 릴리아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 모든 광경을 리즈는 한구석에 가만히 서서 관조하고 있었다. 와인 잔을 입에 문 채로.

‘그래, 저게 바로 주인공 버프인 거지.’

원작에서도 릴리아는 저렇게 주목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리즈는 더욱 분노했다. 자신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했던 릴리아가 자신을 제치고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더라?

“사생아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렇지 않니?”

에먼트 공녀 루나와 라르킨 백작 영애 셀리아가 리즈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제야 생각났다.

‘맞아. 얘들하고 합심해서 릴리아 괴롭히기 작전에 돌입했지. 그러고 아마…… 실수인 척 옷에 술을 쏟았던가?’

원작 속에선 대강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리즈는 그 원작대로 갈 생각이 이미 한참 전부터 없었다.

“좀 떨어져 줄래?”

리즈가 매몰차게 대꾸했다. 그러자 루나와 셀리아가 놀라서 리즈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레 변화한 리즈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 너 왜 그래? 너 네 동생 싫어했잖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잖아.”

“이젠 아냐.”

“이젠 아니라고?”

“그래.”

두 영애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내 짙은 실망감이 서서히 그들 눈동자에 차올랐다.

릴리아 저 여우 같은 계집애가 자신들의 파트너의 관심까지 몽땅 가지고 가 버려 열이 좀 받아 있었다. 그래서 혼자선 감히 나서지 못하고 행동력이 과감한 리즈를 부추겼는데, 그녀가 웬일로 나서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갑자기?”

“유치해서.”

“…….”

유치하다는 말에 루나는 조금 화가 났다. 그래서 이젠 그 분노를 리즈에게로 돌렸다.

‘이런 말 해도 네가 열 안 받는지 보자.’

“조금 전에 내가 네 동생 가까이 가서 봤는데.”

“……?”

“에르네스 경의 최신 루비 세트를 하고 있더라? 어디서 났을까?”

“…….”

리즈의 미간이 살짝 주름 지어져 가는 것을 보며 루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리즈와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끼리 왕래하고 지낸 터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어머니의 소원한 사이를.

그 시도는 적중했다. 리즈는 깨달았다. 미라벨이 했던 말이 이것이었구나.

‘무도회에서 무엇을 보든 실망하지 마세요. 아셨죠?’

리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릴리아의 목걸이와 귀걸이, 그리고 두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았다.

그들 말대로 보석 장인 에르네스 경의 한정판 최고급 루비 세트였다.

친딸에겐 떨이로 파는 철 지난 것을 주더니, 수양딸에겐 저렇게 고귀한 것을 주셨단 말이지?

어머니에 대해 별 기대 없는데도 화가 났다. 원작을 알지 못했으면 이성을 잃고 루나와 셀리아와 함께 계략을 꾸몄을 것이다.

리즈는 가까스로 분노를 삼키곤 들고 있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것 봐, 열 받지?’

루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보단 덜 짓궂은 셀리아는 걱정스러운 투로 리즈에게 말했다.

“너 술 잘 못 하잖아, 리즈. 그렇게 마셔 버리면 취해.”

“괜찮아. 취하기 전에 들어갈 거야.”

취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까.

곧이어 음악이 연주되고, 베르트 소공작이 릴리아를 무도회장 한복판으로 이끌었다.

릴리아는 수줍은 듯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파트너가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랐다.

그림 같은 커플이었다. 케인과 함께였다면 더 그림 같았을 테지만…….

주인공이 춤을 추니 사람들도 하나둘씩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었다. 파트너를 구하지 못한 이들은 즉석에서 파트너를 찾아 춤을 추었다. 하지만 리즈에겐 아무도 춤을 신청하지 않았다.

몇몇 공자들과 대화는 오고 갔지만 춤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대화 중에 그들이 은근히 이마 쪽을 힐끔거리긴 했다.

혹시 흉터 때문일까?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인 걸까? 미라벨이 예민한 게 아니었던 걸까?

갑자기 리즈는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무대 정중앙의 릴리아는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데,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 초라해 보였다. 릴리아보다 훨씬 아름답고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서도 그랬다.

이런 게 여주인공과 악역 조연의 차이인 걸까.

리즈는 그 자리에 더는 있을 수가 없었다. 방으로 올라가든지 나가서 바람이나 쐬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떼는데, 순간 취기가 올라 자신도 모르게 휘청하며 발이 꺾이고 말았다.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낭패다…… 라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단단한 손길로 붙들어 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넘어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리즈는 상대에게 예를 표하려 했다.

“감사합니다. 전 괜찮…….”

하지만 말을 끝까지 잇지는 못했다. 상대가 너무…… 눈이 부셨다!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칠흑같이 새까만 머리칼에 신비스러운 금색 눈동자를 지닌 섬세한 미남자가 눈매를 부드럽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루젠시아에 이렇게 생긴 남자가 있었단 말이야?

저기 있는 베르트 소공작도 이 남자한텐 비교가 안 되겠는데?

그 생각을 리즈뿐만이 아닌 다른 영애들도 했는지, 순식간에 이쪽으로 시선이 몰려들었다. 그 덕분에 덩달아 리즈도 이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다지 기쁘진 않았지만.

훤칠한 키에 옷으로도 결코 가릴 수 없는 힘 있고 균형 잡힌 체격. 신이 작정하고 빚어 낸 것만 같은 수려한 외모.

훈훈한 케인을 늘 봐 와서 웬만한 미남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그저 놀랍고 그저 감탄스러웠다.

그래서일까? 다른 여인들이 얼굴을 붉히며 곁눈질로만 남자를 힐끔거릴 때에도 리즈는 아무 사심 없이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마치 조각상을 감상하듯이.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데 여인들 몇이 용기를 내어 다가와선 눈앞의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저어, 처음 뵙는 분 같은데 혹시 어느 가문의 자제분이신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다들 같은 걸 묻고 싶었는지 이쪽을 주목했다.

그러자 남자가 예의 바른 태도로 대답했다.

“저는 로레인 왕국의 아르젠트 백작입니다. 베리움 후작께서 저희 왕국에 기거하셨을 때 그분 밑에서 음악을 공부했었죠. 루젠시아에 여행 온 김에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그분 댁에서 연회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급히 준비해서 들렀습니다.”

그 말에 어머니가 달려와 남자에게 예를 갖춘 뒤 말했다.

“제 남편의 제자셨군요. 맞아요. 한때 제 남편이 로레인 왕국의 왕립 음악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이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답니다.”

어머니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하지만 손수건에 눈물이 묻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러자 흑발의 남자가 몹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금세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유감을 표했다.

“저런, 제가 진작에 찾아뵈어야 했는데. 전혀 부고를 듣지 못해서…….”

“남편이 생전에 장례를 소박하게 치르길 원해서 가까운 지인 외엔 알리지 않았답니다.”

“그러셨군요.”

거짓말. 아버진 화려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머니가 안 알린 거잖아? 사람들한테 사인을 말해 주기 싫어서.

복상사라는 사인을.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기뻐요. 오늘 제 딸의 성인식이랍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인 제 딸을 소개시켜 드릴게요.”

어머니는 혹시나 남자가 아버지의 사인을 물을까 봐서 얼른 말을 돌렸다. 그러곤 큰딸은 마치 딸이 아니라는 듯이 곧장 릴리아에게로 남자를 데려가려 했다.

“전 여기 계신 영애분과 잠시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요.”

남자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서 리즈는 깜짝 놀랐다.

‘나? 나랑 무슨 말을…….’

영애들의 시선도 남자에게서 리즈에게로 옮겨 갔다.

그러자 어머니가 이제야 리즈의 존재를 발견했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네가 여깄었구나. 얘는 제 큰딸이에요. 오늘 성인식 치르는 아이의 언니죠.”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돌아가신 스승님을 꼭 빼닮으셨네요.”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고선 리즈에게 낮은 목소리로 귀엣말했다.

“책잡히지 않게 잘 모셔. 릴리아처럼 좀 웃으란 말이야.”

어머니는 다시 웃는 얼굴이 되어 남자에게 말했다.

“호호,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말씀 끝나시면 나중에 제 쪽으로 오세요. 다른 딸도 소개시켜 드릴게요.”

어머니가 사라지고도 사람들의 시선은 계속해서 주위에 남아 있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리즈는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남자에게 물었다.

“저……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다리 삐끗하진 않았어요?”

“아, 네. 괜찮아요.”

남자와의 대화가 몇 마디 오가자 리즈는 저를 향하는 시선이 한층 사나워진 걸 느꼈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 건 그것대로 자존심 상하더니, 지금은 또 지금대로 신경이 쓰인다. 중간 지점은 없는 걸까?

적당히 평범한 사람과 얽히고 싶다는 게 그렇게나 큰 바람이었던 걸까?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남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라니 뭐가?

마침 음악이 흘러나오고, 여인들이 이 남자에게서 춤 신청을 받을 수 있을까 기대하는 눈길로 이쪽을 흘끔거리는 가운데. 남자가 리즈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베리움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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