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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꿈 (13/65)


#13화 꿈
2023.06.13.



 
꿈을 꾸었다.

꿈에서 리즈는 릴리아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자신을 쳐다보는 릴리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걸까?

리즈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손에 칼이 한 자루 들려 있었고…… 그 상태로 릴리아를 몰아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절벽 끝으로.

릴리아는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곁눈으로 뒤에 땅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했다.

상기된 표정을 보아하니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그만둬, 제발 그만두라고.’

리즈는 자신의 내면에서 끝없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쉬이 멈출 수 없었다.

꿈속에서 제 몸은 제 의지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언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 언니를 위해서예요.”

“날 위해서라고? 지금 날 위해서라고 했니?”

리즈가 광기 어린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날 위한 길은 네가 죽어 주는 거야. 네가 죽어야 케인이 날 사랑하게 된다고.”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지. 너만 없어지면 모든 게 해결돼.”

리즈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릴리아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사라져 드릴게요.”

“…….”

“내가 죽어서 언니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겠어요.”

릴리아가 절벽 밑으로 몸을 내던지려던 그 순간, 리즈의 이성이 돌아왔다.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떨어지며 리즈의 발등에 상처를 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안 돼!”

리즈는 동생을 향해 다급히 손을 뻗었다.

다행히 절벽 끝에서 겨우 릴리아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잡고 보니 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묘한 의구심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태도 변화에도 동요하지 않는, 마치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한 릴리아의 평온한 태도가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단은 이 위험천만한 곳을 벗어나야 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자.”

리즈가 릴리아의 손을 잡고선 절벽 끝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릴리아가 손을 홱 뿌리치더니 뜬금없이 소리를 질렀다.

“으악! 살려 주세요!”

“……?”

“언니, 절 죽이지 말아 주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널 죽일 생각이 없…….”

동시에 리즈는 등을 가르는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 틈을 타 릴리아가 리즈의 뒤편으로 냅다 달렸고, 리즈는 황망한 표정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그랬더니 한 남자가, 태양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손에 피 묻은 검을 쥐고서.

그가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다.

검에 맺혀 있던 검붉은 피가 날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리즈는 검을 잡은 남자의 두 손에 힘줄이 불거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

“허억!”

리즈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세차게 고동쳤다.

‘꿈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꿈이 아니고서야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자신의 방으로 단숨에 이동할 리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등을 가르는 검의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조금만 늦게 일어났으면 목이 베어지는 느낌도 들었을 게 분명했다.

리즈는 확신했다.

‘원작 속 내 운명이구나.’

빙의를 자각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도달했을 자신의 운명.

그나저나 릴리아의 그 이중적인 모습은 뭐였을까?

자신을 위해 죽네 마네 할 땐 언제고, 구원자가 나타나자마자 돌변하는 그 모습, 그 태도는 대체 뭐였을까?

미라벨이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서 꿈에서도 그렇게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났던 걸까?

‘릴리아 아가씨, 겉으론 착한 척하지만 속으론 엄청 호박씨 깔 것 같아요.’

이따금씩 릴리아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습을 보일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릴리아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대하게 되면서 알게 된 의외의 면모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에잇! 별것 아니겠지. 꿈은 원래 괴상한 법이니까.”

그러고 보니 케인의 진짜 얼굴을 못 봤다. 궁금했는데.

책을 대충 읽은 탓에 남주 케인의 진짜 이름이나 외모 같은 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홀릴 정도로 잘생겼다는 건 본 것 같은데. 지금 모습보다도 잘생겼을까?

잘생긴 사람은 얼굴을 감추는 약을 먹어도 잘생길 수밖에 없는 걸까?

그러든지 말든지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의 본모습과 마주할 일 따윈 영원히 없을 테니까. 또 없어야 하고.

리즈는 살고 싶었다.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전생에 못 이뤘던 가정도 이루고 아이도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버림받는 삶, 형태는 다르지만 그로 인해 요절하는 삶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혹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게 이 영혼에 각인된 운명이라면 차라리 이번 삶을 끝으로 소멸해 버렸으면 좋겠다.

자기 파괴적인 생각까지 품으며 리즈는 침대에 털썩 몸을 뉘었다.

무거운 마음과 달리 반동 한 번 없이 몸을 푹신하게 떠받쳐 주는 매트리스의 감촉은 좋았다. 별달리 애쓰지 않아도 금방 잠이 들 것 같았다.

리즈는 이번엔 제발 아까와 같은 꿈을 꾸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끼익-.

금세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저택 정문의 경첩이 벌어지는 소리가 두 번 들려왔다.

누가 나갔다 들어왔나 보다. 아님 들어왔다 나갔거나.

어느 쪽인지 확실치가 않았다.

확인해 보면 될 일인데 이미 잠의 세계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리즈는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그리고 두 시간 뒤 다시 붙잡았다.

혼란스러운 새벽을 보낸 후, 일어나 아침을 먹고 얼마 뒤.

미라벨이 작업을 시작했다.

“아가씨 얼른 입욕하러 가요.”

“또?”

“또라뇨?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요. 얼른 가요. 꽃잎도 한가득 띄워 놨단 말이에요.”

미라벨의 호들갑에 리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이 오늘 있을 성인식의 주인공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제게서 향기가 나건 안 나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텐데. 악녀의 존재란 무릇 그런 건데.

그럼에도 리즈는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미라벨이 상당히 저기압인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

“어머, 미라벨 님. 오늘 신경 좀 쓰셔야겠어요.”

“신경을 쓰다니 왜?”

후배 모니카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미라벨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 저희 아가씨 컨디션이 최상이거든요. 마님께서 어찌나 신경을 많이 쓰시는지. 장신구도 무려 에르네스 경이 만든 최신 루비 세트를 하사하셨답니다.”

뭐…… 뭐라고? 그 구하기 힘들다는 보석 장인 에르네스 경의 루비 세트?

아니. 그런 건 친딸 먼저 줘야 하는 거 아냐?

미라벨은 기가 찼다.

리즈 아가씨한텐 마리크 보석상의 철 지난 세트를 줘 놓고 가짜 딸한텐 그리 신경을 썼단 말이지?

하지만 미라벨은 대범해지기로 했다.

“어머, 마님께서 그렇게라도 릴리아 아가씨의 결점을 가리고 싶으셨나 보다. 우리 아가씬 그런 거 없어도 충분히 아름다우시니까 괜찮아. 네 아가씨 예쁘게 치장해 드려.”

모니카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뒤로 돌아서는데.

이번엔 미라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릴리아가 그녀의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라벨은 살짝 당황했지만 얼른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췄다.

그러곤 리즈에게 가기 위해 스쳐 지나가려는데.

“네 말이 맞아.”

릴리아의 말에 그녀는 멈춰 섰다.

“언니하고 나는 태생부터 비교가 안 되지.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지?”

“그건…….”

물론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게 맞는데 저렇게 직접적으로 언급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또 말해서도 안 되고. 어쨌거나 릴리아는 주인어른의 피를 이어받은 아가씨니까.

“하지만 시작이 미천했다고 끝까지 미천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언젠간 네가 내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게 될지 어떻게 알겠니?”

“…….”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미라벨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자 모니카가 얼른 릴리아 옆으로 다가와서 미라벨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얼른 사과드리세요. 미라벨 님.”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미라벨은 맞는 말만 했는걸.”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릴리아가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말했다.

“입조심하라고. 미라벨 네가 고귀하신 언니의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되잖아?”

그러고서 릴리아는 돌아서 제 처소로 향했고, 모니카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씨익 지어 보이며 그녀 뒤를 따랐다.

미라벨은 기분이 싸했다.

릴리아 아가씨가 저렇게 말을 잘했던가? 눈빛은 또 어떻고?

그러면서도 해선 안 되는 말, 천박한 말, 도리에 어긋나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잖아?

미라벨은 불안해졌다.

어쩐지 리즈 아가씨의 입지가 점점 위협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

“예쁜데? 웬일로 어머니께서 내게 장신구 세트를 하사하셨을까?”

리즈가 보석 상자를 들여다보며 좋아하자 미라벨이 짠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봤자 최신 유행인 세트도 아닌데요.”

“최신 아니면 어때? 어머니가 주셨다는 게 중요하지. 이제 좀 어머니답네. 맨날 본인 것만 챙기시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리즈는 토파즈 귀걸이 한 짝을 귀에 갖다 대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미라벨은 아가씨가 의붓동생의 최신 루비 세트를 보고 실망할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했다. 마음이 아파 왔다.

“저기…… 아가씨.”

“응?”

“무도회장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셔야 해요. 아셨죠?”

“어떤 일?”

“그냥 뭐든요."

리즈는 뭔진 모르겠지만 알겠다고 했다.

“머리 손질해 드릴게요. 원하시는 스타일 있으세요?”

“앞머리 올려 줘.”

미라벨의 표정이 또다시 굳었다. 예상한 일이었다.

“죄송하지만 아가씨. 오늘은 제가 하자는 대로 하시면 안 될까요?”

“미안하지만 미라벨.”

오늘은 리즈도 양보할 수 없었다.

“나 이제 흉터 그만 가리려고. 별로 많이 표시 나지도 않고. 무엇보다 내가 이렇게 가리는 게 답답해.”

“…….”

릴리아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리즈 자신이 그 머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대관절 사람들의 시선이 뭐 그리 중요할까?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데.

바로 그런 생각으로 케인에게도 들이댔었고 그러다 대차게 까였지만. 뭐, 연애 문제에서만 안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좋아요. 그렇게 해 드릴게요. 저 아가씨 상처받으셔도 몰라요.”

“상처받는 일 없어.”

미라벨은 자신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래, 아가씨는 아가씨고 나는 나다. 내가 불안해하고 신경을 쓰면 아가씨도 위축된다. 내가 당당해져야지.

“와…… 정말 그러고 보니 아가씨 흉터 많이 옅어지셨어요.”

미라벨은 말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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