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제 주인은 제가 결정합니다
(12/65)
12화 제 주인은 제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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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제 주인은 제가 결정합니다
2023.06.12.
“좋아 보이긴. 그런 거 아냐.”
리즈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둘러댔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가 리즈의 몸에 가운을 둘러 주고, 제 가운도 입고선 또다시 리즈를 안으려 다가왔다.
그 순간 리즈가 퍼뜩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이젠 안 그래도 돼.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어.”
이번엔 꽤 단호하게 말했다. 무르게 말하면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아서였다.
몇 번 거절당한 터라 적응이 됐는지 케인도 이번엔 고집부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대신 부축해 드릴게요.”
“아니, 부축도 필요 없어.”
부축까지 마다하자 케인의 눈빛이 살짝 서늘해졌다. 리즈는 그 눈빛에 조금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부축이 필요한 상태라면 모레 있을 무도회는 어림도 없지. 이젠 나 혼자 할게. 그러니까 너도 그만 릴리아한테 가 봐.”
“…….”
“네 주인이잖아. 주인을 챙겨야지.”
이쯤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주인은 이제 자신이 아니라 릴리아라는 것도 확실히 알았겠지. 명분이 없어서라도 명에 따를 거다.
그렇게 확신하고 있을 때.
갑자기 케인이 자신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리즈는 그 몸짓과 표정에서 나오는 위압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황족의 위엄인가 싶다가도, 다르게 보면 수컷 맹수의 위압감인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인지 확실하진 않았다.
어느 쪽인들 그녀를 뒷걸음질 치게 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리즈는 등에 닿는 차가운 대리석 타일의 감촉을 느꼈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었다. 케인은 계속해서 다가오는데.
‘내, 내가 뭘 잘못 말했기에 얘가 이러지?’
잠깐 자신을 되돌아보았지만 딱히 짚이는 게 없다.
그러는 동안 케인이 거의 가슴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거리를 좁혀 왔다.
리즈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눈도 감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참았다.
다행히 그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멈췄다. 그러곤 그 상태에서 잠시간 뜻 모를 눈빛으로 리즈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가씨는 참…….”
참? 참 뭐?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군요.”
“……?”
“제 주인은 제가 결정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케인은 몸을 홱 돌려 욕장을 나가 버렸다.
리즈는 그 상태로 잠시 멍하게 서선 케인의 말을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제 주인은 제가 결정합니다? 혹시 자존심 상했나? 내가 이래라저래라 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리즈는 생각했다.
왜냐면 그는 황태자니까. 예부터 루젠시아의 황족은 자존심이 무척 세다고 들었다.
앞으론 함부로 말도 못 하겠구나.
그래도 원작을 알아서 다행이다. 몰랐다면 착각할 뻔했잖아? 말도 안 되는 착각.
케인이 자신을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착각.
***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케인은 가운을 벗어 던지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닿자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오늘따라 몸에 열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리즈와 몸을 맞대고 있는 동안 계속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다.
그는 그것이 단순히 육체적인 자극 이상의 요인 때문임을 알았다.
부축까지 마다하다니.
괜히 관심을 얻고자 밀어내는 게 아니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심한 거부 반응을 보일 줄이야.
이전과 달라진 리즈의 태도를 차례로 상기하자 그의 불쾌감은 한층 더해 갔다.
마치 자신을 가까이 두면 신변에 큰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구는 한결같은 태도.
꿈이라도 꾼 걸까? 자신이 저를 끔찍하게 죽이는 꿈이라도?
저답지 않은 뜬구름 잡는 생각에 케인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 헛웃음과는 달리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불안과 초조로 일렁이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리즈는 두 번 다시 그를 돌아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맞선을 좌절시키고, 이전보다 살갑게 구는 걸론 떠나 버린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리즈가 예전에 그랬듯이 시도 때도 없이 옆에 붙어 있으면 될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험상 그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았다. 자칫 사람을 질리게 해서 더욱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으므로.
그럼 뭐가 좋을까.
다시금 가슴 한구석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이번엔 선선한 바람조차도 답답함을 해소시켜 주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케인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 듯 왼편 벽면에 걸린 거울을 쳐다보았다.
눈 한쪽이…… 다른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약을 먹어야 했다.
“휴우…….”
또다시 끔찍한 고통과 사투를 벌일 생각에 케인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거울로부터 돌아섰다. 그런데 그 순간 불현듯 머릿속에 섬광처럼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케인이 다시 몸을 돌려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젠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된 자신이 마치 타인처럼 거울 속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머리를 기울이면 거울 속 남자도 머리를 기울였다. 입술 끝에 미소를 그리면 거울 속 남자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훨씬 더 요염하고, 나른하며 유혹적인 미소였다.
그는 생각했다.
어쩌면 저놈이 리즈의 떠나간 마음을 붙잡아 줄지도 모르겠다고.
***
완성된 드레스는 하루 전날에 저택으로 배달되었다.
릴리아의 것은 황갈색 새틴 원단으로 만든 자수 드레스로, 치맛단을 넓게 부풀리는 대신 레이스와 리본 장식을 최소화하여 자칫 가녀린 릴리아가 옷 속에 파묻히는 일이 없게 만들었다.
반면 리즈의 것은 공단 소재의 연노랑 드레스였는데, 릴리아의 것처럼 넓게 퍼지는 우아한 형태는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라인이 그녀처럼 키가 작고 볼륨감 있는 몸매에는 제격이었다.
아무튼 둘 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어머니는 딸들의 드레스 입은 모습이 보고 싶다며 자신의 드레스 룸으로 두 딸을 불러들였다. 거기서 리즈와 릴리아는 갓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신상 드레스를 입고서 어머니 앞에 차례로 돌아보았다.
“정말 예쁘구나. 근데 왜 리즈의 옷이 더 화사한 거지? 주인공은 릴리안데. 릴리아의 옷이 언니보다 우중충한 걸 보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니?”
어머니가 리즈를 향해 질책했다. 마치 그녀의 잘못인 것처럼. 그러자 릴리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언니를 감쌌다.
“아니에요. 제가 그러자고 했어요. 연노랑 천이 드레스 하나 만들 분량밖에 없다고 해서요. 전 어느 색이든 다 상관없으니까요.”
“착한 릴리아, 어째 우리 집은 동생이 언니 같고 언니가 동생 같은지 모르겠구나. 리즈 넌 그래서 가만히 있었니? 동생이 양보한다고 가만히 있었어?”
“어머니, 전…….”
리즈가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아뇨, 언니도 몇 번이나 괜찮다고 했어요.”
이번에도 리즈 대신 릴리아가 나섰다.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호소했다.
“그런데 제가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요. 사실, 언니가 사고 이후로 몸이 많이 약해져 있는 게 안쓰럽기도 하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화사한 옷 입으시고 밝아지시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제가 억지로 언니한테 떠안겼어요. 전부 다 제 잘못이에요, 어머니.”
릴리아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다른 시중인들도 눈가를 훔쳤다.
눈물이 나지 않은 건 리즈, 그리고 미라벨 단둘뿐이었다.
“그렇구나. 내가 네 깊은 속을 모르고, 생각이 짧았구나. 용서하렴. 우리 큰딸도 엄마가 오해해서 미안해.”
리즈는 한마디 말도 안 했는데 용서받았다. 이걸 효율적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머니…… 흑.”
릴리아는 어머니가 벌린 두 팔 사이에 뛰어 들어가 안겼다. 어머니는 리즈 몫까지 넉넉하게 팔을 벌렸지만 안타깝게도 릴리아만 품어야 했다.
리즈는 그 팔에 안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
“마님 너무하세요. 어떻게 아가씨 말은 조금도 들어 보시지 않고.”
미라벨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푸념을 쏟아 냈다. 입장이 바뀌어 리즈가 미라벨을 위로해야 할 판이었다.
“뭐 어때. 오해가 풀렸으면 된 거지.”
“네, 오해는 풀렸죠. 하지만 릴리아 아가씨에 대한 애정은 더 높아져만 갔죠. 이게 말이 돼요? 예로부터 이런 일은 없었다고요. 친딸보다 데려온 딸에게 더 애정을 쏟다뇨?”
“데려온 딸이 워낙 사랑스럽잖아? 솔직히 말해서 나 같아도 나 같은 딸보단 릴리아 같은 딸을 더 챙기겠어.”
“아가씨!”
미라벨은 리즈의 이런 습관적인 자기 비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아끼는 아가씬데. 내 아가씨가 최고여야 하는데.
예전엔 찍소리도 못하던 릴리아의 시중인 모니카가 최근 기가 산 것을 보면서, 미라벨은 속이 문드러지다 못해 가루가 되었다.
“그러니까 아가씨도 마님께 좀…….”
“살갑게 굴라고? 이십 년을 내외하며 지냈는데 이제 와서? 어머니 놀라서 안 돼요. 기절할지도 몰라.”
“…….”
“그나저나 릴리아는 파트너 아직인가?”
“아뇨. 구했어요.”
“정말? 누군데? 어떻게 구했는데?”
리즈가 의외의 소식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사실 미라벨은 그 때문에 한층 더 기분이 나빠져 있는 상태였다.
“마님께서 요전 날 아가씨한테 소개시켜 주려 봐 놓은 구혼자들 중 하나한테 부탁했어요. 베르트 가문의 장남이요.”
“베르트 가문의 장남? 설마 베르트 소공작을 말하는 거야? 와아, 어머니 힘 좀 쓰셨네.”
“제 말이요.”
미라벨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아가씨한테 소개시켜 주려던 구혼자들 중 단연 최고였는데. 지위도 인물도 성격도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분이었는데, 왜 그런 분을 릴리아 아가씨의 파트너로 쥐여 주시냔 말이에요.”
“그거야 뭐…….”
어머니 체면 때문이겠지. 우리 집은 사생아라고 아무 남자나 붙여 주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아무튼 아가씨랑 그 베르트 소공작님과의 혼사는 물 건너갔어요.”
“하나도 안 아쉬우니까 걱정 마.”
전 아쉬워 미치겠다고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미라벨은 가까스로 참았다.
리즈는 그런 미라벨의 아쉬움을 모른 척하며 생각했다.
‘베르트 소공작이라……. 얼추 원작대로 가고 있는데?’
리즈의 기억대로라면 베르트 소공작은 지금이 아니라 조금 더 시일이 지난 뒤 리즈의 구혼자 명목으로 후작저를 방문했다가 릴리아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 설정이지만.
뭐, 빨라지면 나야 좋지.
착한 릴리아는 속마음이야 어떻든 베르트 소공작을 상냥한 태도로 대할 테고, 베르트 소공작은 착한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릴리아에게 빠져 매일같이 후작저를 드나들 거다. 그리고 케인은…….
다정한 두 사람 사이를 거슬려 하는 자신을 보며 릴리아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겠지.
모쪼록 질투는 사랑을 깨닫게 하는 최고의 도구니까.
리즈는 기대했다. 두 사람이 한시라도 빨리 사랑에 빠져 주길.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도 빠져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