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난 널 놔줄 생각이 없거든 (11/65)


#11화 난 널 놔줄 생각이 없거든
2023.06.11.



 
뭐, 리즈도 이게 편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릴 일도 없을 테니까.

“잠깐 쉴까요?”

왈츠 한 곡을 온전히 그녀의 힘으로 다 추고 나자 케인이 말했다. 안 그래도 움직임이 막 둔해지려는 찰나였으므로 리즈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물 밖에선 꽤 빨라지셨더군요.”

그건 또 언제 봤대?

하긴, 훈련 담당자니 환자의 변화를 관찰하는 건 당연한 의무지.

거기에 무슨 큰 의미라도 있으려고.

“훈련은 두 번 정도만 더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케인의 말에 리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두 번이라고? 성인식은 이레나 남았는걸?”

“휴식기도 필요하니까요.”

아…… 그렇군. 무작정 몰아붙이기만 하는 게 아니었구나.

리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러고 나서 잠깐 욕조 밖으로 나와 욕실 가장자리에 있는 대리석 의자에 앉았다. 물속에 있다 나와서 그런지 한기가 들었다.

리즈가 양팔을 감싸 쥐며 파르르 몸을 떨자 케인이 가운을 가져와 몸에 둘러 주었다. 그러자 떨림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너도 앉아.”

리즈는 조금 떨어진 곳에 비석처럼 서 있는 케인에게 옆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케인은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전 서 있겠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두었겠지만 황태자라는 걸 알고 있는 지금, 그럴 수 있을 리가.

“그냥 좀 앉지? 나 올려다보기 목 아픈데.”

그 말에 케인이 잠시 주저하더니 곧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리즈는 티 나지 않게 곁눈질로 그를 흘끗 보았다.

크고 단단한 상체가 이미 가운으로 가려진 터라 똑바로 마주한들 거리낄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주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물기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자마자 드러나는 수려한 옆모습 때문에?

아니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손끝으로 매만지듯 턱선을 타고 흘러내려서?

그것도 아니면…….

“주스 한 잔 드려요?”

하고 말하는 순간 활처럼 휘어지는 눈매가 주는 요염함 때문에?

‘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리즈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렸다.

“괜찮아. 목 안 말라.”

“네. 알겠어요.”

케인이 싱긋 웃어 보이곤 고개를 돌렸다.

리즈는 자신의 뺨을 한 대 후려쳐 주고 싶었다.

빙의를 자각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허튼 생각이나 하다니.

혹시 운명을 활자로만 읽어서 그런 걸까?

빙의했다는 실감이 잘 안 나서 경각심이 떨어지는 건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쯤에서 결심을 다시 한번 견고하게 다질 필요가 있었다.

“……릴리아한테 잘해 줘. 외로운 아이니까.”

결심을 환기시키기에 원작 여주라는 존재만큼 확실한 것은 없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는 아이를 만드는 것만 좋아하시고, 키우는 건 조금도 관심이 없으셨잖아? 그렇다고 그 아이가 친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고 자란 것도 아니고. 낯선 집에서 어디 의지할 데도 없고 얼마나 외롭겠니? 그러니까 네가…….”

“제가 보기엔 아가씨야말로 외로워 보이시는데요?”

케인이 리즈의 말을 잘랐다.

“……내가?”

예상치 못한 쪽으로 대화의 방향이 틀어지자 리즈는 당황했다.

‘여기서 내가 왜 나오는 거야?’

어떻게든 다시 릴리아 쪽으로 그의 관심을 옮겨 놔야 했다.

“그, 그래, 맞아. 나 외로운 사람이야.”

비단 이번 생에만 그런 건 아니고, 전생부터 외로웠지.

“그래서 이젠 안 외로우려고. 그러려고 빨리 결혼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 얘긴 됐고, 릴리아는…….”

“결혼해도 외로우면요?”

케인이 또 한 번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 물음이 너무도 가슴을 훅 치고 들어왔던 터라 리즈는 저도 모르게 대화의 목적을 잃어버리곤 반박했다.

“말도 안 돼. 결혼했는데 어떻게 외로울 수가 있어?”

“마님 있으시잖아요.”

“아…….”

생각해 보니 그러네?

하지만 그거라면 해결책이 있지.

“외로우면 자식을 많이 낳으면 되지. 난 한 셋은 낳을 생각이야. 그럼 정신없어서 외로울 틈도 없겠지.”

그것 역시 전생부터 외로웠던 그녀의 꿈이었다.

일찍 결혼한 친구들이 가끔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넌 절대 결혼하지 마. 애도 낳지 말고. 인생의 무덤이야, 무덤.’

하지만 그때마다 리즈는 생각했다.

제발 좀 그 무덤에 들어가 봤으면 좋겠다고.

혈혈단신으로 화려하게 사는 인생보단 너희들이 말하는 그 무덤 속이 훨씬 탐난다고.

케인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눈이 허공에 붙박여 있었다.

리즈는 그 틈에 다시 한번 릴리아의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그러니까 케인, 릴…….”

“무도회에서 누구랑 파트너 하실 겁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그의 페이스에 말려든 리즈는 저도 모르게 술술 대답하고 말았다.

“아직 안 정했어. 그냥 당일에 봐서 나한테 처음으로 춤 신청해 오는 사람이랑 파트너 하려고.”

“……그렇군요.”

찰나 케인의 눈빛이 반짝였지만 리즈는 보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해야 할 말이 생각났다.

“릴리아도 아직 파트너 못 구한 것 같던데 네가 좀 해 주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쯤 되니 리즈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때가 아닌 거 같군.’

타이밍이 참 얄궂기도 하다. 마치 꼭 일부러 릴리아의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자르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그럴 리가 없는데도.

리즈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짧게 끝나네?”

“오늘 드레스 맞추러도 가셔야 하잖아요.”

“아…… 그렇지.”

잊고 있었다.

“처소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

하지만 케인은 리즈의 말을 듣지도 않고 앉은 그대로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참 얘도 책임감 하난 어지간하네. 이전 습관이 남아 있어서 그런가?’

리즈는 그 팔에 달랑 들려서 욕장을 나가고 계단을 오르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 오며 케인에게 넌 내 노예다, 넌 나한테 당연히 이래야 한다를 얼마나 주입했으면, 이젠 됐다고 하는데도 반사적으로 하는 걸까?

갑자기 그에게 사과하고 싶어졌다.

“미안, 케인.”

“뭐가요?”

케인이 눈매를 동그랗게 만들며 물었다.

“내가 너한테 못 할 짓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서.”

“…….”

“이젠 그러지 않아도 돼. 넌 자유니까.”

순간 케인의 아콰마린 색 눈이 날카롭게 빛났지만, 이미 시선을 돌려 버린 리즈는 알지 못했다.

‘자유? 자유라고?’

케인은 자신을 보지 않는 리즈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제 와서 자유를 주겠다고? 그러고 넌 내게서 빠져나가려고?’

그의 눈에 순간 음험하고도 집요한 빛이 떠올랐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군. 난 널 놔줄 생각이 없거든.’

***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더니 이미 마차가 입구에 대어져 있었다.

마차 앞엔 마부 조너선이 리즈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옆에 릴리아도 함께 대기해 있었다.

릴리아는 양산도 쓰지 않고 뙤약볕 아래 서 있었다. 사람 미안하게.

“안에 들어가 있지 그랬니?”

“언니가 안 타셨는데 제가 먼저 그럴 순 없죠.”

릴리아가 허리를 굽혀 상전한테나 하듯 인사를 꾸벅 올렸다.

‘얘는 이 습관 안 버릴 건가?’

이젠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한 거 같은데, 습관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뭐, 알아서 적응하겠지. 그때까진 강요하지 말아야겠다.

마부가 리즈의 손을 잡아 주고, 리즈는 마차에 무사히 올라탔다. 그 뒤를 이어 릴리아도 올라탔다.

릴리아는 타자마자 구석 자리에 바싹 몸을 붙여 앉았다.

“넓은 데 놔두고 왜 그러고 있니? 이쪽으로 와서 제대로 앉으렴.”

리즈가 맞은편 자리를 권하자 릴리아가 강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전 이게 편해요.”

굳이 저렇게까지 거부할 필요가…… 적응하는 데 시간 좀 많이 걸리겠는데?

몇 번 더 권했지만 릴리아가 한사코 구석 자리를 고집해서 리즈는 그냥 그대로 뒀다. 그러곤 창밖으로 보이는 저잣거리의 풍경을 감상했다.

가는 길에 사고가 난 곳을 지나갔다. 그러자 마차 사고에 대한 기억이 불현듯 생생히 떠올랐다.

엄청난 일을 겪으면 그 일을 겪기 전의 삶은 마치 타인의 인생처럼 흐릿하게 느껴진 댔는데 그 말이 맞았다. 리즈는 더 이상 빙의를 자각하기 이전의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흉터를 만지작거리니, 릴리아가 이를 기민하게 알아채곤 조심스레 말했다.

“그날 많이 아프셨죠?”

“응?”

갑작스레 걸어온 말에 리즈는 조금 놀랐다. 그래서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아무 생각이 없어. 아픈 것보단 놀라서 말이지.”

“그래도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리즈는 릴리아가 생각보단 당돌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눈도 못 맞출 것처럼 굴면서도 곧잘 이야기를 이어 나가니까.

“흉터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잘 보이지도 않아요.”

“나도 알아. 그래서 신경 안 써.”

“하지만 앞머리를 내리고 계시잖아요.”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미라벨 때문에. 자신의 흉터를 볼 때마다 미라벨이 자책하는 게 싫어서였다.

하지만 릴리아는 그 말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케인한테 흉한 모습 보여 주기 싫어서?’

“언니는 앞머리 올리는 게 예쁜데.”

“……?”

“처음에 베리움 후작저에 왔을 때 언니보고 정말 놀랐어요. 여신인 줄 알고.”

“……여신?”

“네. 언니가 둥근 이마를 드러내고 귀에는 백장미 한 송이를 꽂고 있는데 정말 눈이 부셨으니까요.”

“그…… 렇구나.”

미안하게 됐군. 그 여신이 질투의 화신인 줄은 몰랐을 테니.

“전 언니가 다시 예쁜 이마를 드러냈으면 좋겠어요. 보이지도 않는 흉터 따윈 신경 쓰지 마시고요.”

“생각해 볼게.”

미라벨한테 괜찮은지 좀 물어보고.

전에 잠깐 이마 올렸을 때도 표정이 몹시 안 좋아졌으니까.

릴리아는 한차례 예쁘게 웃어 보인 뒤 다시 본래의 소심한 릴리아로 돌아가 몸을 움츠렸다. 리즈는 곧바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둘 사이엔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리즈는 할 말이 없었고, 릴리아는 해야 할 말을 다 했으니까.

***

드레스가 순조롭게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마지막 수중 훈련이 끝났다.

휴우-.

리즈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이로써 케인과의 묘한 회동도 끝이 났다. 더 이상 마주할 일은 없겠지.

한집에 살고 있으니 아예 안 마주칠 순 없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얼굴을 한 시간이나 마주하고, 눈을 맞춰야 하고, 대화가 끊어져 어색한 일이 없도록 시시한 말이라도 내뱉어야 할 일은 없을 테다.

리즈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요.”

물 밖으로 나오며 케인이 말했다.

‘티가 났습니까?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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