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수중 재활 훈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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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수중 재활 훈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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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수중 재활 훈련(1)
2023.06.09.
“이런 옷은 안 돼.”
“그럼 이건요?”
“날 익사시킬 참이야?”
미라벨이 가져온 옷을 속속들이 퇴짜 놓으며 리즈가 말했다.
하지만 그럴 만했다. 물에 뜨지 않고 몸에 착 붙는 옷을 들고 오랬더니 갑옷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미라벨은 거의 울상이 되어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이것 말곤 속옷밖에 없는데.”
“그럼 속옷이라도 줘.”
“켁, 켁!”
사레가 들린 미라벨이 연신 기침을 해 댔다.
아가씨가 속옷을 입고 윌렌 경과 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반면 리즈는 별생각이 없었다.
전생에서 그녀는 수영을 꽤 즐겼고 수영장에서 살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당연히 수영복과도 친했다. 비키니도 입어 봤다. 물론 잠깐이지만.
그러니 속옷 정도야 뭐.
게다가 여기 속옷이라 해 봤자 비키니처럼 가슴과 중요 부위만 가리는 것도 아니고. 가슴 위까지 완전히 덮는 코르셋에,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가는 거들이니까.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하지만 그걸 모르는 미라벨은 완강했다.
“안 될 게 뭐 있어?”
“아무튼 안 돼요.”
그러곤 옷장을 뒤져 그나마 제일 두껍고 속이 비치지 않을 만한 걸 꺼내어 가지고 왔다.
“이것만큼은 안 드리고 싶었는데.”
리즈는 미라벨의 손에서 건네받은 검은색 물체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것은 위아래가 일체화된 몸매 보정용 속옷으로 가슴 부위엔 방수 재질로 보이는 패드가 덧대어져 있었다.
“괜찮은데? 이런 게 있으면 진작에 내놓을 것이지.”
“나중에 중요한 연회가 있을 때 속에 입혀 드리고 싶어서 놔둔 건데. 흑흑. 이런 데 쓸 줄이야.”
슬퍼하는 미라벨과는 달리 리즈는 만족했다.
팔이 없다는 것 말곤 꽤 얌전한 속옷이다. 전생에서의 옷으로 비유하자면, 나시에 핫팬츠 정도랄까.
하긴, 그 정도만 해도 이 세계 상식으론 납득할 수 없는 노출이었지만.
리즈는 곧바로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곤 일체형 속옷을 입었다.
‘나쁘진 않은데?’
몸이 약해지고 나서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그렇게 거추장스러울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입으니 오히려 가뿐하고 좋았다.
“그럼 이제 가 볼까?”
미라벨이 리즈의 팔에 타월 재질의 가운을 끼워 주었다.
리즈는 허리끈을 질끈 묶고선 문을 나섰다.
***
욕장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었다.
“아직 안 온 건가?”
미라벨은 차마 낯 뜨거운 광경을 볼 수 없다며 끝날 때쯤에 모시러 오겠다고 말했다.
리즈는 그러라고 했다. 그편이 나을 테니까. 그녀에게나, 자신에게나.
그나저나 윌렌 경은 먼저 가서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다더니 왜 없는 걸까?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리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선 기다리는 동안 욕장 한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물속 훈련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함을 알기 때문에 미리부터 기운을 빼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
삐걱-.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윌렌 경이 온 모양이었다. 이제 시작이겠구나.
리즈는 의자 팔걸이를 지탱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뒤를 돌아보았다.
크헉!
리즈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윌렌 경은 어디 가고 왜…….
“케, 케인, 네가 왜 여기…….”
욕장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케인이었다.
리즈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케인은 리즈 자신과 비슷한 차림이었다. 비슷한…… 가운 차림.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리즈는 황당한 얼굴로 케인을 쳐다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훈련 시작하죠.”
아니, 설명해 달라니까. 잠깐…… 뭘 하자고?
“훈련이라니? 내가 왜 너랑?”
“그럼 혼자 하시겠어요? 물이 꽤 깊은데?”
“……?”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윌렌 경은 어딨는데?”
“급한 일이 있다고 돌아갔어요.”
“…….”
뭐지? 갑자기 드는 이 싸한 느낌은?
윌렌 경은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간 게 맞는 걸까?
“그리고.”
케인이 한 발짝 다가오며 가운 매듭을 풀었다.
그 모습이 느릿하면서도 관능적으로 보여 리즈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조사해 보니 그자 좀 문제가 있더군요.”
“문제가 있다고?”
“입이 좀 저렴하더라고요. 사석에서 자신이 담당했던 귀부인들에 대한 품평회 같은 걸 한다던데. 설마 그 품평회에 끼고 싶은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그런데 얘는 그걸 언제 또 다 조사했대?
“아무튼 앞으로 아가씨의 훈련은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마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어머니는 뭐라셔? 반대하진 않았니?”
“반대는요. 오히려 좋아하시던데요. 집안사람이 전담해 주면 밖으로 말이 새어 나갈 염려도 없다 하시면서요.”
어머니도 참.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 남자 쪽이 안전할 텐데.
이 위험하게 잘생긴 하인으로 위장한 황태자보단.
그러는 사이 매듭이 다 풀어졌다.
케인의 몸에서 가운이 스르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매끄러운 살결과 완만한 가슴 근육, 탄탄한 빨래판 복근이 드러났다. 골반에 슬쩍 걸쳐져 장골능을 드러내는 바지는 밑단이 허벅지 중간까지만 내려와 있었다.
뜨아-.
마음을 접었는데도 눈이 돌아갈 만큼 남자다운 몸매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몸매를 감상하고 있는데 케인이 말했다.
“그럼 아가씨도 옷 벗으셔야죠.”
“나…… 나도?”
리즈가 놀란 토끼 눈을 하자 케인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입고 하실 생각이셨어요?”
“그건…… 아니고…….”
“제가 벗겨 드려요?”
그렇게 말하면서 케인이 한 걸음 다가서자 리즈는 저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벗기긴 뭘 벗겨? 저리 가지 못해?”
리즈가 앞섶을 더욱 여미며 말하자 케인이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늘 제가 하던 일이었잖아요.”
아…… 그렇지. 리즈는 이제야 생각났다.
그래, 케인이 늘 하던 일이 맞다. 아니, 리즈 그녀가 늘 시키던 일이었다.
‘케인, 등 뒤에 단추 좀 열어 줄래?’
‘케인, 팔이 불편해서 그런데 옷 좀 벗겨 줄래?’
그를 유혹하기 위해 별짓을 다 했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욕조 속에 얼굴을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삽질한 과거는 대체 언제까지 자신을 따라다닐까?
언제까지 따라다니면서 수치사를 거듭하게 할까?
왠지 까마득해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내, 내가 벗을게.”
한 발 다가오려는 케인을 향해 다급히 손을 내뻗으며 리즈가 말했다.
“그러세요, 그럼.”
“그런데 저기…….”
리즈가 매듭을 풀려다 말고 말했다.
“좀 뒤로 돌아 있어 줄래?”
“안에 뭐 안 입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그냥 벗으세요. 어차피 다 보게 될 거.”
그 말이 맞긴 한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걸까.
리즈는 어색한 몸짓으로 가운을 벗었다.
맨살에 닿는 습기 품은 공기의 감촉이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입으니 가뿐하고 좋다던 생각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케인이 가운을 받아 들어 벽에 걸어 놓았다.
그러곤 팔 안쪽으로 욕장의 물 온도를 체크한 뒤, 망설임 없이 리즈를 안아 들려 했다.
“내, 내가 들어갈게. 내가.”
리즈가 재빨리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바닥이 미끄럽습니다.”
케인은 리즈를 번쩍 안아 들고 난간을 넘어 욕장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팔에 닿는 그의 탄탄한 가슴이 무척 자극적이었다.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하지만 그럴수록 수증기가 촉촉이 내려앉은 살결의 미끌미끌한 감촉은 더없이 생생하고 야릇하게 느껴졌다.
빙의 자각 전이었다면 저 품에 안겨 보려 갖은 수를 다 썼을지도 모른다. 아니, 생각해 보니 이미 썼구나. 두어 번 정도?
물론 전부 실패했지만.
미쳤지.
왜 좀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상대가 그냥 노예가 아니란 것을. 소설의 남주고, 제국의 차기 황제라는 것을. 이 세계 자체가 그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그 생각을 하니 리즈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케인의 눈부신 육체가 주는 열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그만 떨어져.”
리즈는 물속에 두 다리를 딛고 서선 케인을 밀어냈다.
그나저나…….
“너, 이런 거 해 보긴 했어?”
문득 리즈는 궁금해졌다. 얘 뭘 알긴 알고 훈련시키겠다는 건가?
“그럼요. 오래전에 검술 수련할 때 해 봤어요. 검사들에게 수중 훈련은 자주 있는 일이죠.”
“그래……?”
순간 리즈는 케인을 놀려 주고 싶었다.
“시골에서 도끼질만 하고 살았다더니 검술 훈련은 또 언제 받았대?”
“…….”
케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은근 재밌었다.
‘뭐라고 둘러대실 거죠? 황태자 전하?’
“그냥…… 잠깐 받았어요. 숙부한테서.”
“아…… 숙부?”
‘당신을 죽이겠다고 세상을 이 잡듯 뒤지고 있는 몬타네르 대공 말인가요?’
뒷말은 속으로만 했다. 재미로라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니까.
“아무튼 뭘 하면 되지? 이제?”
리즈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한 바퀴 걸어요.”
케인은 리즈에게 한 손을 내밀었고 리즈는 그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았다. 두 사람은 넓은 욕장 모서리를 따라 산책하듯이 한 바퀴 걸었다.
그리고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이젠 뭘 할 거지?”
두 번째로 물으니 케인이 되물었다.
“이 훈련의 목적이 뭐죠?”
“춤을 추기 위함이지.”
“그럼 춤을 춰야죠.”
“그게 가능할까?”
걷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이렇게 드는데, 이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가볍게 돌아야 하는 춤을 물속에서 할 수 있을까?
“하도록 해야죠. 마님의 체면을 세워 드리려면.”
“쿡!”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콕 집어 해 주니 리즈는 웃음이 났다. 얘도 알 건 다 아는구나 싶었다.
그 순간 갑자기 케인이 성큼 다가오며 둘 사이가 확 가까워졌다.
순식간에 그녀의 시야가 그의 탄탄한 가슴으로 가득 채워졌다.
리즈는 저도 모르게 숨을 흐읍-, 들이켜며 케인을 올려다보았다.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케인이 굵고 단단한 팔로 리즈의 허리를 휘감아 당기며 말했다.
“힘 빼요. 힘주면 잘 안 되니까.”
부옇게 흐려진 수증기 사이로 보이는 케인의 눈빛이 어쩐지 오묘했다.
이 남자, 원래 눈빛이 이랬던가?
원래 이렇게 촉촉하고 끈적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