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외간 남자 앞에서 홀딱 벗게 생겼다 (8/65)


#8화 외간 남자 앞에서 홀딱 벗게 생겼다
2023.06.08.



 
“……꺼림칙하다고?”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 보네. 착하고 순수한,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 속 여주인공 타입인 릴리아를 두고 꺼림칙하다니.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앞에선 웃는데 뒤에선 호박씨 까는 타입. 릴리아 아가씨가 꼭 그럴 것 같단 말이에요.”

“미라벨, 혹시 과대망상증이라도 있는 거야?”

리즈의 말에 미라벨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뇨. 하지만 사람에겐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 느낌은 이래 봬도 꽤 정확하다고요.”

그 말에 리즈는 생각했다.

‘글쎄. 그 말은 못 믿겠는데. 나 같은 악녀를 원작 속에서 마지막까지 살뜰하게 챙겼던 걸 보면.’

“아무튼 릴리아 아가씨를 곁에 두지 마세요.”

미라벨이 당부했다.

“곁에 둘 생각 없어.”

“하지만 조금 전에 사과하셨잖아요.”

“그건…….”

‘남주한테 안 찍히려고.’

리즈는 조금 전 복도 초입에서 자신과 릴리아의 대면을 바라보고 있던 케인을 떠올렸다.

‘그 남자도 이만하면 알았겠지? 내가 더 이상 릴리아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하지만 그의 시선만을 의식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리즈는 이전까지의 자신과 깨끗이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되도록 주인공 두 사람과 엮이지 않는 방향으로.

아무튼 미련퉁이 같던 머리에서 나온 것치곤 꽤 괜찮은 기지였다.

자신에게도 이런 교활한 면이 있었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랍다는 듯 리즈는 픽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무튼 친하게 지내려고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안심이네요. 근데 마님도 참 너무해요. 성인식이라니. 게다가 아가씨랑 같은 데서 드레스를 맞춰 주려고 하시다니.”

“뭐 어때? 이왕 맞출 거 한 군데서 맞추면 편하고 좋지.”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적자와 서자를 차별 없이 대하는 너그러운 베리움 후작부인이라 하겠지.”

그리고 그건 어머니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자, 릴리아의 때늦은 성인식을 치르려는 궁극적인 이유였다.

미라벨은 리즈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아무튼 어머니 하시는 말씀 들었지? 드레스 숍에 얘기해 놔. 언제쯤 방문이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사흘 뒤요.”

미라벨이 주저 없이 말했고 리즈는 깜짝 놀랐다.

“뭐? 그렇게 빨리?”

“네. 예약이 취소된 자리가 하나 있어서 그 자리에 다행히 들어갈 수 있었어요. 제 고향 친구가 그 양재사 밑에서 보조 일을 하고 있거든요. 얘기가 잘되었어요.”

이야…… 미라벨. 인맥이 좋구나.

“잘됐네. 속전속결로 진행할 수 있어서. 성인식도 후딱 치르고 빨리 끝내 버리고 싶어.”

전부 다 미라벨의 일이 될 거고, 게다가 미라벨도 마지못해 하는 일일 텐데 조금이나마 일을 덜어 주고 싶은 리즈였다.

“참, 파트너는 정하셨어요?”

아…… 그러고 보니 파트너 문제가 있었군.

이제야 생각났다.

‘누굴 파트너로 하지?’

***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케인이 릴리아의 방 가구 몇 점의 위치를 바꿔 주고선 물었다.

동선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릴리아가 부탁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핑곗거리에 불과하단 것은 그녀 본인만 알고 있었다.

“응. 마음에 들어.”

릴리아가 예쁘게 미소 지으며 간단히 긍정하고선 본래의 용건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케인이 먼저 물어 왔다.

“또 뭐 시키실 일 없으세요?”

“…….”

그 말은 케인의 입에 늘 붙어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릴리아는 거의 뭘 시키지 않았다. 리즈 언니가 그에게 무리한 요구를 많이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케인이 많이 힘들어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자신은 언니처럼 케인을 부려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질구레한 일들은 제 손으로 하고, 힘을 써야 하는 일들만 조심스레 부탁했다.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그날 창밖으로 언니를 보자마자 개처럼 반사적으로 달려갔을까.’

케인이 자신의 제안은 듣지도 못하고 언니에게로 가 버린 일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시킬 일은 없고…….”

“……?”

릴리아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를 이 방으로 불러들인 진짜 용건을 말하기 위해서.

“케인, 이번 성인식 때 말이야. 내 춤 상대가 되어 주면 안 될까?”

어머니로부터 춤 상대를 미리 선점해 놓으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몇몇 귀족 영식들의 명부도 건네받았는데, 누가 누군지 모르기도 했지만 첫 춤이 어쩐지 첫 경험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명성만 보고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첫 춤은 자신이 추고 싶은 상대와 추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케인이었다.

“죄송하지만 안 될 말씀입니다.”

“……?”

“아가씨께서 하인과 춤이라뇨. 그것도 사교계 데뷔식에 저 같은 놈이랑. 사람들이 모두 웃을 겁니다.”

사람들 눈은 상관없는데.

하지만 릴리아는 왠지 그 말이 고백처럼 들릴까 싶어 쉽게 꺼내지 못했다.

언니와 케인이 지내는 걸 봐 와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게 거절의 우회적인 표현이라는 걸 눈치 빠른 릴리아는 알았다.

자존심도 없이 들이대는 건 언니나 할 법한 짓이다.

“알았어. 네 뜻이 그렇다면…….”

천천히 다가설게. 언니처럼 마구잡이로 들이대지 않고.

“아가씨는 충분히 아름다우시니까 좋은 영식들이 곧 줄을 설 겁니다.”

“…….”

할 말을 마친 케인은 그렇게 꾸벅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가려 했다. 그 순간, 릴리아는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을 꺼냈다.

“그래도 언니보다 못하겠지……? 분명 나보다 언니한테 많은 시선이 쏠릴 거야. 당연하지. 언니는 같은 여자가 봐도 아름다우니까.”

“아가씨도 아름다우십니다.”

“…….”

케인은 다시 한번 인사를 올리고 처소를 나갔다.

아름답다…….

그 말을 되뇌는 릴리아의 얼굴에 순간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가씨‘도’ 아름다우십니다라.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꺼낸 말이 아닌데.”

‘아가씨가 더 아름다우십니다’라는 말이 듣고 싶었는데.

***

재활 치료를 맡은 윌렌 경이 오늘도 어김없이 리즈를 찾아왔다.

“이제 많이 좋아지셨네요.”

그는 두어 바퀴 걷도록 시켜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저도 그런 거 같아요.”

리즈도 요즘 들어 부쩍 몸이 가벼워졌음을 느꼈기에 동의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가 말했다.

“잘되었네요. 며칠 뒤면 얘 동생 데뷔탕트라서요. 춤추는 덴 무리 없겠군요.”

“아…… 죄송하지만 그건 좀 곤란할 거 같습니다.”

윌렌 경이 말했다. 많이 좋아졌긴 하지만 근력이 약해져서 아직 춤을 추기엔 무리가 있다고.

리즈는 내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마땅히 춤추고 싶은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동생의 데뷔탕트에 언니가 춤을 안 추다니.”

갑자기 어머니가 발끈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때까지 근력 길러 놔요.”

아니…… 그게 뭐 마음대로 되는 줄 아나. 애먼 재활 치료사만 문책당했다.

‘이상한데 고집이 있으시네. 하여간 보이는 건 엄청 신경 쓰셔선.’

“그럼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윌렌 경의 말에 어머니의 귀가 솔깃해졌다.

“뭔가요? 그게?”

“물속에서 훈련을 하는 겁니다.”

“물속에서라고요?”

물속에선 저항력을 이겨야 하기 때문에 평지에서 움직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이 든다고. 따라서 물속에서 훈련을 하면 얼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윌렌 경이 말했다.

어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럼 당장 시작해요.”

어머니가 입욕을 좋아하는 탓에 베리움 후작저엔 전생의 수영장만 한 욕조가 있었다.

방 하나를 전부 욕조로 개조한 곳인데, 어머니는 이곳에 들어가면 한나절은 계셨다. 깊이도 꽤 깊었지. 내 가슴 정도 왔으니.

“그게…….”

한데 윌렌 경이 살짝 주저했다.

“뭘 망설이는 거죠? 당장 시작하자니까.”

어머니의 독촉에 윌렌 경이 말했다.

“수중 훈련을 하려면 지금처럼 이런 복장으론 곤란합니다.”

“그럼 어떤 복장을 해야 하는데요?”

“최대한 얇고 가벼운, 신체를 최소한만 감싸는 그런 옷을 입어야 합니다.”

“…….”

주위에 정적이 흘렀다.

윌렌 경은 본인이 말하고서도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였고, 어머니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었다. 그리고 시중인들은 숨을 쉬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건 리즈뿐이었다.

리즈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지금 윌렌 경이 말하는 신체를 최소한으로만 감싸는 그런 옷은 아마 수영복일 것이다.

한데 이 세계는 수영복이란 개념도 없고, 그런 재질의 천도 발명되지 않았으니 거의 속옷 같은 옷을 입고 훈련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냥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필요하다면 해야지.”

“……?”

아이고 어머니. 딸자식을 그렇게 홀딱 벗겨서라도 훈련을 시키고 싶으세요? 그렇게까지 해서 어머니의 면을 세우고 싶으세요?

“미라벨.”

“……네.”

미라벨의 목소리가 참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훈련복으로 입을 만한 옷 좀 추려 놔 봐.”

“그런 옷은 없는데요.”

“그럼 벗고 해야겠네.”

어머니의 강경함에 미라벨이 항복했다.

“차, 찾아보겠습니다.”

윌렌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치료사와 환자의 개념으로 리즈를 대하고 있다지만, 그로서도 귀족 영애의 맨몸에 가까운 모습을 본다는 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미라벨이 옷을 찾으러 서둘러 뛰어가는데…….

그녀는 모퉁이를 막 돌다 어느 기둥에 부딪혀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다행히 기둥이 붙잡아 주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세요?”

기둥이 물었다.

“응, 케인……. 그게 말이야.”

미라벨이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선 말했다.

“참, 내가 방금 뭘 들었는지.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네.”

“뭘 들으셨는데요?”

케인이 한 번 더 물었다.

“마님께서 글쎄 아가씨를 홀딱 벗기셔선 윌렌 경과 물속에 처넣으려고 하시지 뭐니?”

“…….”

“그렇게까지 해서 릴리아 아가씨의 데뷔탕트에 세우시겠다나 뭐라나. 뻔하지 뭐. 양옆에 딸자식 끼우고 ‘나는 이렇게 두 딸을 차별 없이 사랑합니다’ 과시하고 싶으신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이제 갓 스무 살 되신 아가씨를 외간 남정네와…….”

미라벨은 거기까지밖에 말하지 못했다.

케인의 눈빛이, 전에 없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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