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우리 잘 지내보자
(7/65)
7화 우리 잘 지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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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우리 잘 지내보자
2023.06.07.
저녁 식사 시간.
바삭하게 잘 익은 비프커틀릿 속살이 베리움 부인의 칼끝에서 뽀얀 김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려는 찰나.
“저 맞선 안 보겠습니다.”
리즈의 돌발 선언에 부인의 칼질이 딱 멈춰 버렸다.
“맞선을 안 보겠다고? 그럼 결혼을 안 할 거라는 말이냐?”
어머니가 눈을 크게 뜨고서 물었다. 그러자 리즈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결혼을 안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맞선을 안 보겠다고요. 당분간.”
“왜? 이제 진짜 알짜배기들만 남았는데.”
어머니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미라벨은 더 아쉬워했다.
그래도 리즈는 결심을 돌리지 않았다.
“좀 쉬었다 만나 볼게요. 지금은 누굴 만나고 싶지 않네요.”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리즈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참 이상하지?”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 둘 다 연속으로 파투를 놓냔 말이지. 마치 누가 계략이라도 짠 것처럼.”
그 말에 리즈가 실소를 터뜨리며 대꾸했다.
“누가 그런 짓을 하겠어요? 황태자비 간택도 아니고 일개 귀족 영애의 혼사에. 있다면 정말 할 일 없는 사람이네요.”
쨍그랑-.
불현듯 들려온 요란한 금속음에 돌아보니 케인이 은쟁반을 바닥에 떨어트린 참이었다.
‘쟤는 왜 안 하던 실수를 하고…….’
‘조심 좀 하지’라는 눈길을 보내곤 다시 어머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가 잠시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황태자비 간택은 무슨. 황태자도 없는데. 대공비 간택이라면 또 모를까.”
“대공비요? 아…….”
묻는 순간 생각났다.
황제가 죽고 실종된 후계자를 대신해 섭정을 맡은 선황제의 이복동생 몬타네르 대공. 그러고 보니 그가 미혼이군.
“그분은 왜 그 나이 되도록 결혼을 안 하셨대요?”
“그 나이라니? 마흔밖에 안 됐는데?”
“마흔이면 두 번은 갔어야 할 나이 아닌가요?”
적어도 이 세계관에선.
“뭐, 마음에 드는 처자가 없었겠지. 하긴, 그 남자 눈이 꽤 높았어. 사교계에서 좀 인기가 많았어야지. 다들 그 남자와 춤 파트너를 못 해서 얼마나 안달이었던지…….”
“어머니도요?”
그냥 툭 던져 본 말이었는데 답이 없었다.
그런 걸 보니, 맞는 것 같군.
그나저나 마흔이라. 평생 자식이 없던 황제가 쉰 넘은 나이에 낳은 자식이 현 황태자인 걸로 안다. 황제께서 살아 있었다면 일흔 가까이 되셨을 텐데 그 동생이 이제 마흔이라니. 젊긴 젊네.
“그래도 그 남자, 서출로 태어난 것치곤 꽤 사랑받으며 자랐지. 형님이신 선황제가 제 오른팔로 삼을 정도로 총애해 마지않았다니까. 누구랑은 다르게.”
“어쩐지 말에 뼈가 있는데요?”
리즈가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하자 어머니는 굳이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곧바로 인정했다.
“너도 앞으론 동생한테 좀 잘해 주렴. 하나뿐인 혈육인데 너무 매정하게 대하진 말고.”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당사자가 등장했다.
“언니는 지금도 잘해 주고 계시는걸요. 너무 걱정 마세요, 어머니.”
릴리아가 상냥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리즈는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분위기가 밝고 화사해지는 걸 느꼈다.
여주인공이어서일까?
아니면 그녀 자체가 가진 것이 많아서일까?
큰 키에 날씬한 몸매, 춤을 추듯이 가벼운 걸음걸이와 우아하게 하늘거리는 길고 가녀린 팔. 그리고 무엇보다.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미소.
‘저것엔 당해 낼 수 없지.’
리즈는 쓴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전처럼 격렬한 질투심은 일지 않았다.
오히려 어쩔 수 없는 격차를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나 할까?
이젠 그녀를 좋아할 수 있을…….
“어머!”
“……?”
“죄송해요. 언니. 언니 맞은편에 앉으면 안 되는데. 그럼 언니 싫어하시는데…….”
“…….”
역시 아직은 시기상조일까?
이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묘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안 되는 게 어딨니? 그냥 앉으렴.”
어머니가 릴리아에게 다정하게 웃어 보이고선 리즈에게 질책하듯 말했다.
“앞으론 릴리아도 같이 식사할 거다. 우리 집 식구가 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독상을 받다니. 너무 하잖니? 이의 없지?”
“없어요.”
리즈는 짧고 간단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언니.”
릴리아가 조심스레 자리에 앉으며 리즈에게 말했다. 목소리에 떨림이 옅게 배어 있었다.
“네가 올해 열여덟이던가?”
어머니가 비프커틀릿을 잘게 썰며 물었다.
“열아홉이에요, 어머니.”
“아, 그렇구나. 리즈랑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 미안하구나, 엄마가 되어서 나이도 모르고.”
“아니에요. 엇비슷하게 맞추신 것만도 어디예요?”
릴리아의 살가운 말에 어머니는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자신에겐 한 번도 지어 주지 않던 웃음이 활짝 피어난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리즈는 진짜 딸은 자긴데 어째서 저 두 사람이 더 모녀 같을까 생각했다.
책 속 리즈도 아마 이런 면 때문에 여주에게 더욱더 가혹하게 대한 건 아닐까 싶었다.
“성인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지? 플로라…… 아니, 네 어머니의 상중이었을 테니.”
어머니는 남편에게 애정이 많지 않았던 만큼 바람기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아니, 오히려 숨겨 놓은 자식이 릴리아 하나뿐인 데 대해 꽤 감사하셨다. 생각했던 것보다 지조 있으시다고.
이게 감사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성인식 못 치렀으면 어때요?”
“아니, 그래도 안 되지. 우리 집안은 대대로 여인들의 성인식은 근사하게 치러 왔단다. 리즈도 그랬지.”
어머니가 신경 쓴 것도 아니고, 대부분 미라벨이 다 했잖아요?
근데 본인이 한 것처럼 생색내시긴.
“생일이 지나 버려서 근사하겐 아니더라도 구색은 맞춰서 치러 줄게.”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래도 그게 도리가 아니지.”
어머니의 배려에 릴리아가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친모가 몸이 약한 탓에 자라는 내내 제대로 보살핌을 못 받았다고 들었다. 듣기론 거의 방치 수준이었다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릴리아는 어머니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동한 얼굴이었다.
안개처럼 눈을 흐릿하게 만들었던 질투를 걷어 내고 나니 뭔가에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릴리아는 정말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케인도 사랑에 빠진 걸까?
리즈는 슬며시 케인을 돌아보았다. 그가 릴리아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그런데…….
허업!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 날 보고 있는 거야?
혹시 벌써 릴리아한테 마음이 생겼나? 그래서 내가 릴리아를 어떻게 할까 봐 경계하는 건가?
“조만간 초대장을 돌릴 테니 그렇게 알렴.”
“네, 어머니. 감사해요.”
“양재사한테 연락도 해 놔야겠다. 미라벨!”
어머니가 부르자 미라벨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어머니는 미라벨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난번에 리즈의 맞선 드레스를 의뢰했던 양재사 있지? 그 양재사에게 릴리아의 것도 의뢰하도록.”
“…….”
미라벨이 대답을 미루고 리즈를 바라보았다. 리즈는 눈을 깊게 깜빡여 보였다.
‘시키는 대로 해.’
그러자 미라벨이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리즈는 미라벨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올라가려 했다. 이 층을 지나 삼 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초입부에 막 다다랐을 때,
“언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리즈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는 표정으로 릴리아를 쳐다보았다.
“혹시…….”
릴리아가 잔뜩 움츠러든 어깨와 작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언짢으신 거 아니죠? 저 같은 게 감히 언니랑 같은 드레스 숍에서…….”
“아냐.”
주저 없는 대답에 릴리아가 상당히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리즈를 보았다.
하긴, 이런 순간에 리즈는 항상 독설을 내뱉거나, 하다못해 눈이라도 잔뜩 부라려 보였으니 릴리아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리즈는 이참에 확실히 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저럴 테니까.
“앞으론 그런 생각하지 않아도 돼.”
“……네?”
릴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난 일 모두 사과할게. 미안했다.”
이번엔 릴리아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떠졌다. 사과도 사과지만, 리즈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방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너한테 못되게 군 거 모두 사과해. 이런 말로 사과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했다. 우리 잘 지내 보자.”
아직은 본격적인 괴롭힘이 시작되기도 전이지만, 원작 속 괴롭힘에 대한 묘사가 강렬하게 남아 있었던 탓인지 무릎이라도 꿇고 사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이 심장 약한 애가 기절할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약간만 태세를 전환하는 것에도 졸도할 것처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으니까. 이건 뭐, 신종 고문법이 아닐까…… 하는 표정으로.
“아가씨, 이제 그만 올라가요.”
미라벨이 재촉했다.
“그래. 알았어.”
리즈는 미라벨의 팔을 지지대 삼아 계단을 힘겹게 올라갔다.
릴리아는 그런 언니의 뒷모습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바라보았다.
보통 이렇게 극적인 화해를 이루는 대목에선 훈훈한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릴리아는 그렇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다.
‘왜 갑자기 언니는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는 거지? 왜 갑자기 착해지느냐는 말이야. 그럼 나랑 겹치잖아. 짜증 나.’
짜증 나?
릴리아는 순간적으로 든 자신의 생각에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내,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이런 건 언니나 할 법한 생각이잖아. 안 돼, 이럼 안 돼.’
릴리아는 머리를 흔들어 그 사악한 생각을 떨쳐 내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릴리아는 걸음을 내딛지 못한 채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십여 보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케인의 무심한 시선 때문에.
‘설마, 내 이런 속내를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그의 시선엔 금세 온기가 돌았지만, 그럼에도 릴리아는 괜스레 뜨끔했다.
***
“미라벨, 조금 전에 왜 그랬어?”
“네? 제가 뭘요?”
“층계참에서 왜 날 재촉했냐고?”
“…….”
미라벨이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기에 리즈는 의아했다.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실은…… 전 릴리아 아가씨가 꺼림칙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