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원작 여주 릴리아 (6/65)


#6화 원작 여주 릴리아
2023.06.06.



 
그렇게 평범한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두 남녀의 좋은 점만을 물려받아 해가 거듭될수록 아름답게 성장해 갔지만.

그 성장 과정을 아버지는 평생에 한두 번 지켜볼까 말까였다.

금세 또 다른 신선한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으니까.

바람둥이 아버지의 얼굴 한번 제대로 본 적 없는 릴리아가 이 집에 들어온 건 순전히 베리움 후작부인의 배려 덕분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배려로 포장한 그녀의 욕심 때문이었다.

남편이 바깥에서 낳은 사생아까지 품는 너그러운 아내라는 타이틀이 갖고 싶어서. 그리하여 귀부인의 모범적인 표본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보여 주기용으로 데려온 정부의 딸은 리즈에게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니,

“언니…….”

그녀가 리즈를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리즈는 제 앞에서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는 여인을 바라보며 원작을 상기했다.

「리즈는 세면대 가득 받은 물속에 릴리아의 얼굴을 처넣고선 숨이 꼴깍 넘어가기 직전에야 풀어주었다.」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르기 전에 빙의를 자각해서 다행이다. 정말 정말 다행이다.

“언니…….”

깊은 안도감으로 일렁이는 리즈의 시선을 다르게 받아들인 릴리아가 맞잡은 손을 쉴새 없이 비벼 대며 불안감을 표출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원래부터 곱지 못한 눈으로 독설을 잔뜩 날려 대던 데다, 최근 두 번 연달아 맞선에서 퇴짜를 맞았단 말까지 들었을 테니 내 심기가 잔뜩 불편한 상태인 줄 알 거다.

리즈는 릴리아를 안심시키는 대신 케인을 물렸다.

“케인, 네 주인을 먼저 챙겨야지? 그게 시중인의 역할이잖아?”

그 이상의 적절한 대응은 생각나지 않았다.

리즈는 아무 말 없는 케인과 자신을 귀신 보듯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릴리아를 두고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중간에 다리가 꺾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원까지 무사히 나온 리즈는 수양버들 아래 놓인 벤치에 기대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조금 전에 만난 두 사람을 생각했다.

‘쟤들 아직인가?’

두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사랑을 확인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알콩달콩 깨 볶다가 이 집에서 나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돌아가는 양상을 보아하니 아직은 이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뭐, 조만간 불이 붙겠지. 모쪼록 사랑이든 정이든 붙어 있는 시간에 비례해서 깊어지는 법이니까.

그래, 진작 이렇게 됐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미련스럽게 굴다니.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남주에게 들이대던 지난날이 떠오르자 또다시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퍽-.

리즈는 자신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

“물 가져왔습니다.”

케인이 릴리아에게 물잔을 건네며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이런 걸 시켜서.”

릴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닙니다. 시중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으음…….”

릴리아가 시킬 일이 더 없는지 고민하는 동안 케인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수양버들 아래 앉아 있는 리즈가 보였다. 발끝으로 잔디를 짓이기고 있었다.

그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나오는 리즈의 버릇이라는 것을 케인은 잘 알고 있었다.

‘뭘 생각하는 거지?’

잠시 의아해하던 순간. 불현듯 케인의 아콰마린 색 동공이 확장되었다. 리즈가 자신의 머리를 세게 내려친 것이다. 몇 번씩이나.

“시킬 일은 없고, 괜찮으면 나랑 같이 차 한잔하지 않을래? 생각해 보니 내 전담 시중인인데 차도 한 잔 대접하지 못한…….”

“시키실 일 없으면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케인은 그녀의 말 앞부분만 듣곤 곧장 방을 나갔다.

남겨진 릴리아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친해지고 싶었는데.

릴리아는 잠시 동안 아쉬움에 잠겨 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문득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말까지 자르며 다급히 물러난 케인이 언니에게 가 있었다!

심지어 언니를 번쩍 안아 들기까지 했다. 언니의 다리가 불편해서인가? 그래서 처소까지 안아다 주려고?

그래. 그럴 수 있지. 케인은 내 시중을 들기 전에 언니의 시중인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쁘지? 꼭 내 것을 빼앗긴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그새 케인이 내 사람이라는 개념이라도 들어선 건가?

릴리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언니가 몹시 얄밉게 느껴졌다. 일부러 자신의 방에서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서 케인을 꼬여 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이런 불손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안 돼, 미워하면 안 돼. 나는 누굴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런 사람은 바로 언니잖아?’

릴리아는 자신에게도 그런 증오심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놀랐다.

‘우리 릴리아, 착하지? 앞으로 마님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지내야 한다.’

‘릴리아 아가씨는 천사 같아요. 한 번도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을 거예요. 만약 아가씨가 누굴 미워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로 상대가 그럴 만한 짓을 해서 미워하는 걸 거예요.’

릴리아는 금세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자신의 증오심엔 이유가 있으니까.

‘전부 언니 때문이야.’

***

“괜찮다는데 왜 이래?”

끝끝내 정원까지 따라 나와 자신을 방까지 옮겨다 주는 케인에게 리즈는 급기야 짜증을 내고 말았다.

“괜찮으시긴요. 조금 전에…….”

“조금 전에?”

스스로 머리를 내리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말하려다 케인은 관뒀다. 자신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면 리즈가 또 싫은 내색을 보일까 봐.

“아닙니다.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없어. 있어도 너 안 시켜. 미라벨 시킬 거야.”

리즈가 토라진 아이처럼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케인은 언짢은 기색도 없이 금세 수긍했다.

리즈는 이제야 그가 방을 나가나 싶었다. 그런데.

“맞선은 또 보실 겁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리즈는 케인을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그게 왜 궁금하지? 하고 묻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덧붙였다.

“그냥 궁금해서요.”

리즈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한동안 안 볼 거야.”

“왜요?”

“그냥, 좀 피곤해서.”

“……네.”

착각인 걸까? 케인이 뭔가 안도한 것처럼 보였던 건.

“알겠습니다. 그럼 더 귀찮게 안 하고 나가 볼게요. 쉬세요, 아가씨.”

기분까지 좋아져선 생글생글 웃으며 케인이 몸을 돌리려는데,

“잠깐만.”

이번에 리즈가 잡았다.

“네? 뭐 시키시게요?”

케인이 돌아보며 물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제발 뭘 좀 시켜 달라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리즈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그를 부른 이유는 시킬 게 있어서도 아니고 용건이 있어서도 아니기 때문에.

단지 케인의 얼굴이 궁금해서였다.

가짜 말고…… 진짜 얼굴.

‘네 본모습은 뭐니? 그 백금색 머리칼과 아콰마린 색 눈동자로 감추고 있는 진짜 황태자의 모습 말이야.’

“절 왜 그렇게 보세요?”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으니 대신 원래의 자신이라면 했을 법한 말을 하기로 했다.

“그냥…… 잘생겨서.”

***

「케인은 용모를 감추기 위해 주기적으로 묘약을 먹었다. 덕분에 정체를 들키지 않고 십 년이란 세월을 숨어 지낼 수 있었다.」

혼자 방에 남은 리즈는 원작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묘약…… 묘약이라…….”

진짜 소설은 소설인가 보네. 얼굴을 바꿔 주는 묘약도 있다니.

아니다. 얼굴을 바꿔 주는 게 아니라 인식만 못 하게 하는 거였었나?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무튼 나도 한번 먹어 보고 싶네. 완전 재밌겠다.

하지만 그 약이 주는 고통을 알았다면 리즈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으윽…….”

열흘에 한 번, 약을 먹을 때마다 케인은 온몸의 장기를 헤집는 듯한 통증에 몸서리쳐야 했다. 어마어마한 고통이었다. 어떨 땐 이대로 정체를 들키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죽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후우…….

고통이 휩쓸고 지나간 뒤, 차디찬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운 그는 지친 얼굴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문득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보였다.

그 먼지 하나하나가 햇볕의 반경 아래 들어왔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것을 지켜보며, 케인은 리즈의 말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당분간 맞선 안 볼 거야.’

그 말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맞선을 보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더 이상 치졸한 짓을 저지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에.

딱히 죄책감을 느끼진 않았다.

루벤트 영식의 정부를 끌어들이고, 바를뢰즈 백작의 치부를 알아내어 협박하는 것으로 맞선을 파투 낸 것은 그로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리즈는 가봉 된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고 있을 테니까.

아예 두 번 다시 맞선을 볼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트라우마를 안겨 줄 생각도 있었다.

그 모든 계획에 후회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스스로에게 환멸이 느껴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리즈가 대체 나한테 뭐기에.

차라리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여인에 대한 오기이길 바랐다.

일부러 리즈의 지긋지긋했던 면들을 떠올려 정을 떼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지긋지긋했었나? 그녀의 집착이?

이젠 그것마저도 확신할 수 없어졌다.

저와 말 몇 마디 나누었다는 이유로 해고된 시중인이 짐마차 한 대는 거뜬히 나오고, 수시로 불러들여 자신의 몸에 다른 여인의 흔적이 있는 건 아닌지 검사하고.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해하며 닦달해 대던 그 모습들을 이제 와서 다시 돌이켜 보니 그저 귀엽게만 여겨졌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리즈를 대하는 제 마음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러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햇빛이 비쳐 들고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먼지 조각들처럼.

그녀가 그토록 거슬렸다면 이곳을 진작에 떠났을 테니까. 아님 직접 죽여 버렸거나.

그러지 않은 건 역시.

저도 싫지 않았기 때문에…….

댕- 댕-.

문득 호출 종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중인의 휴식 시간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고통이 스친 흔적은 일찌감치 사라졌고, 벌겋게 충혈된 흰자위도 맑고 투명하게 바뀌어 있었다. 의문이 풀린 얼굴엔 평온감을 뛰어넘어 행복감마저 감돌았다.

흐트러진 매무새를 다듬으며 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케인의 머릿속에 문득 리즈의 말이 떠올랐다.

‘그냥, 잘생겨서.’

잘생겨서…….

그 말을 가만히 따라 되뇌던 케인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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