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맞선이 연속으로 무산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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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맞선이 연속으로 무산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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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맞선이 연속으로 무산되다
2023.06.05.
“예에, 아가…….”
기계적으로 대답을 이어 가던 미라벨이 멈췄다.
그녀는 리즈만큼이나 이번 일로 크게 상심했다.
웬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케인 이외의 남자는 돌처럼 보던 아가씨가 모처럼 큰맘 먹고 결혼을 결심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미라벨은 도저히 루벤트인지 이벤트인지 하는 놈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래도 결혼은 하셔야지요. 마님께서 이번엔 반드시 괜찮은 영식을 물색해 보겠다 하셨습니다. 아마, 내일 바로 약속이 잡혀 있을걸요?”
미라벨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일이 있고서 얼마 뒤 어머니가 리즈를 처소로 불렀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좀 안타깝지만, 전화위복이라 생각하자꾸나.”
“전화위복이요…….”
리즈가 그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생각해 봐라. 멋모르고 그 남자랑 결혼했으면 어쩔 뻔했니? 결혼 전에 알았기에 망정이지, 결혼하고 나면 물릴 수도 없단다.”
하긴.
리즈는 그 말에 동의했다.
아무리 가정을 꾸리고 싶은 자신이라 해도 남편의 정부까지 품을 수는 없다. 자신은 그 정도의 그릇이 못 된다.
“바를뢰즈 백작이 구혼장을 보내왔다. 최근에 작위를 물려받아 아주 야심 차게 영지를 운영하고 있다더구나. 이번엔 뒷조사를 확실히 했으니 지난번처럼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거다.”
“……정말 확실히 하셨어요?”
리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머니를 보며 물었다.
어머니의 은근히 허술한 면을 잘 아는 그녀로선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엔 확실하다니까. 아님, 네 외삼촌에게 조사해 보라 할까?”
어머니가 외삼촌을 들먹였다.
리즈의 외삼촌, 끌레망스 백작은 몇 년 전까지 황실의 호구 행정 관리로 일하면서 웬만한 귀족들의 정보 대부분을 입수하게 되었다. 재정 상태부터 이성 관계를 거쳐 술버릇에 이르기까지.
퇴직하고 나선 그 특기를 살려 대귀족 영식-영애 간의 맞춤 결혼을 주선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외삼촌은 뚜쟁이로서의 명성과 함께 쏠쏠한 수수료까지 쓸어 담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진작부터 외삼촌에게 맡겼다면 오늘 같은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뇨, 됐어요.”
자존심 때문일까?
리즈는 굳이 친지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없어 보인달까.
“아무튼 이번엔 아예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할 테니 그렇게 알아 두렴. 집사에게 말해서 양재사 베로니카에게 미리 기별 넣어 두라고 말해야겠다. 웨딩드레스부터 맞춰야지.”
어머니는 실패의 가능성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듯 밀어붙였다.
하지만 이미 한 번의 실패를 맛본 리즈는 달랐다.
“너무 이르신 거 아니에요?”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르다니? 그 사람이 웨딩드레스 쪽으로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데? 어떤 영애들은 성인식 치르자마자 예약한다더라. 안 그러면 못 맞춘다고.”
그럼 반대로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에잇. 모르겠다.
알아서 하시라지.
“그럼 전 이만 올라가 볼게요.”
리즈는 그 말을 끝으로 어머니의 처소에서 물러났다.
제 방으로 돌아온 리즈는 심란한 마음을 잊고자 자수 틀을 꺼냈다. 머리를 비우기엔 단순 노동만 한 것이 없었다. 절반밖에 피지 않은 장미꽃을 마저 피우기 위해 리즈는 자수 틀에 손을 갖다 댔다. 그 순간.
“아얏!”
손끝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감촉에 황급히 손을 뗐다.
틀에 또 하나의 바늘이 꽂혀 있던 걸 깜박했던 것이다.
검지손가락 끝에 붉은 피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엄지손톱으로 그 아래를 꾸욱 누르니 피가 물방울만 한 크기로 커져 갔다.
그걸 보는데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수가 완성되기 전에 바늘에 찔려 피를 보면 결혼이 파투 난다는 미신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전생의 리즈는 미신 신봉가였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곤 절대 미역국을 먹지 않았고, 손톱은 꼭 화요일에만 깎았다.
딱 한 번 아무 생각 없이 금요일에 깎았는데, 그러고 나서 4년을 짝사랑한 상대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
“에이, 미신은 미신일 뿐이야.”
리즈는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스멀스멀 몰려오는 불안감은 그녀를 그 어떤 사소한 징조도 불행의 전조로 받아들이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적중했다.
***
바를뢰즈 백작에게 바람맞았다.
두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더니 시중인을 통해 달랑 서한 한 장 보내왔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을 부디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란 인간은 아름답고 고결하신 베리움 영애에게 한없이 부족할 뿐이오. 바로 지금 그 사실을 깨닫고 나도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오. 당신은 정말이지 바라만 보아도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나서, 그 빛을 혹여나 내가 가리게 될까 봐. 그리하여 당신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만들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오. 하여, 당신은 보다 당신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 주고 아껴 줄 수 있는 사람에게로…….」
구구절절 변명이 적혀 있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오늘 못 만남. 앞으로도 만날 일 없음.’
분노하신 어머니는 바를뢰즈 백작가와 관련된 모든 사업 거래를 끊어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셨다. 미라벨은 더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이 천하의 못돼 처먹은 인간이…….”
하지만 정작 리즈 본인은 초연했다.
자수 바늘에 찔렸을 때부터, 아니, 루벤트 백작 영식에게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겠구나. 계속해서 일어날지도 모르겠구나.
이쯤 되자 이게 정말 우연일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설마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겠지?
사랑도 한 번 못 받아 보고 생을 마감하도록 정해진, 운명.
그렇게 생각하자 요 며칠 전까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겠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던 리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토록 활활 타오르던 투지도 이젠 재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거듭된 파투에 리즈가 자신감을 잃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으려니 미라벨이 위로했다.
“아가씨, 걱정 마세요. 이번엔 마님께서 기필코 괜찮은 사람을 데리고 오실 거예요.”
미라벨은 이번 일로 아가씨가 결혼에 대한 마음을 접으면 어떡하나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실제로 리즈는 거의 그런 단계에 와 있었다. 하지만 안절부절못하는 미라벨을 봐서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너야말로 걱정 마. 난 괜찮으니까.”
리즈의 말에 미라벨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곤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티타임인 줄도 모르고. 아가씨 배고프시죠? 얼른 가서 차와 다과를 좀 챙겨 올게요.”
미라벨이 나가고 리즈는 억지로 지어 보였던 미소를 싹 지웠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생각했다.
내가 지금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걸까?
아니, 황태자비가 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황태자비는 릴리아라는 걸 나도 안다고.
나는 단지 한 사람의 사랑받는 아내이자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오르지 못할 나무인 걸까.
남들 잘만 하는 결혼이 어째서 내게만 이렇게 힘든 걸까.
리즈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밖에 나가서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어야 나아질 것 같았다.
미라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순 없었다. 리즈는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천천히 방 안을 몇 발짝 걸었다.
요전 날보다 훨씬 몸이 가뿐했다. 오늘은 누구에게 신세 지지 않고도 계단을 끝까지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즈는 복도 벽에 붙어 조심스레 층계까지 나아간 뒤, 난간을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서 한 걸음 내디뎌 보았다.
‘됐다!’
이전처럼 많이 후들거리지 않는다. 적어도 한 칸이 한계는 아닐 것 같았다.
리즈는 한 층 아래까지 내려오는 데 성공했다. 이제 한 층만 더 내려가면 로비다. 그렇게 층계참을 돌아 막 한 발을 내디디려는데…….
“아가씨!”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의 등장에 리즈의 얼굴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젠장. 오늘만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또 산책 가시려고요?”
케인이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와선 말했다. 목소리에 반가운 기색이 묻어났다.
하지만 리즈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응.”
리즈는 쳐다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고선 행여나 데려다주겠다는 말이 나올까 봐 얼른 덧붙였다.
“요즘은 힘이 좀 많이 붙어서. 지난번보다 수월하게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이런 덧붙임이 무색하게도 그는 리즈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그럼 제가 내려 드릴게요.”
“돼, 됐어.”
리즈는 손사래까지 치며 거절했다.
“가서 네 일이나 봐.”
너무 무례했을까.
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옅어졌다. 눈빛이 살짝 날카롭게 번뜩인 것 같기도 했다. 리즈는 속으로 움찔했다.
혹시 운명을 바꿀 수 없고 죽을 사람은 어떻게든 죽게 되어 있다면, 그럼 자신은 여주를 건드리려다 죽는 게 아니라 깐죽거리다 이 남자한테 죽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허둥대고 있는 자신을 구해 준 건, 때마침 들려온 청아하고 다소곳한 목소리였다.
“케인.”
리즈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거기엔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에메랄드빛 눈망울을 지닌, 한 떨기 수선화처럼 고고하고 청초한 인상의 금발 머리 여인이 있었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릴리아였다.
***
릴리아 베리움.
리즈보다 한 살 아래로, 베리움 후작이 후작령 소속 소작농의 딸에게서 본 반쪽짜리 귀족 아가씨였다.
그녀를 가졌을 때 그녀의 생모는 고작 열여덟이었다. 리즈는 다섯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들른 영지에서 딱 한 번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몹시 의아했다. 아버지의 눈을 사로잡을 만큼 대단한 미인이 아니었으므로.
시간이 꽤 지나고서야 알았다.
귀족 남자가 평민 여인에게 끌리는데 미모는 결정적인 매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소 평범한 외양이더라도, 신분 차이에서 비롯된 신선한 관념의 간극과 약간의 타이밍만 있으면 충분히 반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