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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은밀한 계략 (4/65)


#4화 은밀한 계략
202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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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려앉은 회색 공터.

짙은 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초조한 기색으로 그곳에 들어섰다. 다행히 따라붙는 눈은 없었다.

휴우-.

막 안도하려는 찰나, 또 다른 남자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공터에 들어서는 걸 발견한 그의 얼굴이 경악스럽게 바뀌었다. 맙소사.

“전하!”

사내가 질책 어린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그러자 남자는 도리어 사내를 질책했다.

“내가 밖에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말씀은 최소한 변장 정도는 하시고 해야 하는 말씀 아니십니까?”

이렇게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면서 전하라고 부르지 말라니.

“밤이잖아. 그리고 사람들은 네 생각만큼 남의 얼굴에 관심 없어.”

“남도 남 나름이죠.”

잘생긴 사람 얼굴엔 관심이 넘쳐 나죠.

하지만 그런 실랑이로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사내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혹시…….”

“…….”

“황궁에 복귀하시려고요?”

사내의 청회색 눈동자에 일순 희망의 빛이 어른거렸다.

“아니.”

“…….”

그럼 그렇지.

“그럼 왜 부르신 겁니까? 복귀도 안 하실 거면서.”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사내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하니 남자가 밀랍으로 봉한 서한 한 장을 내밀었다.

“내일 오전 중으로 이거 좀 보내.”

“이게 뭡니까?”

그가 서한을 받아 들며 물었다.

“그건 알 거 없고.”

“하면 어디로 보내야 합니까?”

“안트 4가도 13번지.”

“거기 누가 사는데요?”

“셰비네 클로드.”

“셰비네 클로드…….”

사내는 그게 누군지 묻고 싶었지만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관두었다. 사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신하였고 상대는 주군이었으니까. 이곳이 황궁이 아니고, 그가 앉아 있는 곳이 황태자 좌가 아니라 한들 그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고.

그는 서한을 안주머니에 집어넣고선 다시 주군을 불렀다.

“전하.”

“또.”

“……죄송합니다.”

“무슨 말 하려고?”

남자가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대답했다.

“언제까지 거기 계실 겁니까?”

“…….”

“이제 한 절기 남았습니다. 한 절기가 지나면 황좌는…….”

“알아.”

남자가 사내의 말을 잘랐다.

“그 안에 돌아간다. 반드시.”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그 말속에 실린 힘의 무게를 사내는 똑똑히 느꼈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도 함께.

***

미라벨이 꼭두새벽부터 리즈를 깨웠다.

“흐음…… 무슨 일이야?”

리즈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 물었다.

“무슨 일이긴요. 오늘이 아가씨 맞선 일이잖아요. 잊으신 건 아니죠?”

“잊긴. 너무 잘 기억하고 있는데…… 하암.”

리즈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선 다시 말했다.

“근데 맞선은 정오잖아. 이렇게 일찍부터 뭘 하게?”

“어머, 정오니까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거라고요. 빨리 일어나셔요. 네?”

미라벨의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일어난 리즈는 욕장으로 강제 소환되었다.

욕조엔 장미 꽃잎이 한가득 띄워져 있고, 이제 막 향유도 몇 방울 떨어트려졌다. 리즈는 발끝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몸을 담갔다.

아침이라 뻣뻣한 몸이 따뜻한 물속에서 노곤하게 풀어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그런 김에 잠이나 한숨 더…….

“아가씨, 마사지해 드릴게요.”

“으앗!”

하지만 옆에서 대기 중이던 마사지 담당 시중인들이 손으로 마구 꼬집어 대는 통에 리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것들, 혹시 마사지를 빙자해서 고문을 하는 건가?

리즈는 퍼뜩 기억을 되짚어 자신이 그간 얘들에게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으음, 별로 없는 거 같은데…….’

어린 시절 철없을 때야 좀 사납게 굴긴 했지만, 설마 그것 가지고 이러진 않겠지.

그나저나 꽃잎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뭔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이를테면, 첫날밤을 준비하는 새색시 같은 기분이랄까.

물론 이건 그냥 맞선일 뿐이지만, 언젠간 자신에게도 첫날밤이란 순간이 찾아오겠지. 한때는 그 상대가 케인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죽어도 싫어.’

꽃잎에 푹 절여지고 난 뒤 곧바로 치장 담당 시중인에게 넘겨졌다.

얼굴에 몇 가지인지 다 세기도 힘든 화장수와 크림이 차례로 발라졌다. 연회에 갈 때도 몇 번인가 덧칠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공을 들이는 것 같다.

하긴, 연회야 조명도 있고 하니 적당히만 꾸며도 될 테지만, 이곳은 내 집이다. 화려한 샹들리에 따윈 없다. 순수 얼굴만으로 정직하게 승부해야 한다.

머리 손질은 미라벨이 했다.

리즈는 거울을 통해 미라벨의 손끝에서 땋아지고 부풀려지는 머리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무리 단계에서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녀가 이마에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도록 앞머리를 꼼꼼히 빗질해 내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미라벨, 나 앞머리 올려 줘.”

리즈의 요구에 미라벨이 빗질을 멈추었다.

미라벨은 리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아가씬 앞머리를 내리는 게 더 어려 보이고 예쁘신데.”

하지만 리즈는 완강했다.

“안 어려 보여도 되니까 올려 줘. 답답해서 그래.”

“그래도 전…….”

미라벨은 진짜로 난감했다.

아무리 마음 편하게 맞선을 보시라고 했다지만, 본인이 거절하는 것과 상대가 거절하는 건 다를 텐데. 초면부터 약점을 드러내시려 하다니. 아가씬 이마에 흉터가 보이지 않으시는 걸까?

사실 리즈는 정말 이마에 흉터가 잘 보이지 않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의 껍데기가 아닌 운명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비참한 운명을 알게 되었는데 그깟 흉터가 뭐가 문제일까.

“아, 알겠습니다. 그럼 올려 드릴게요.”

미라벨은 눈물을 삼키며 앞머리를 올렸다.

다 올리고 나니 리즈가 방긋 웃으며 미라벨에게 말했다.

“거봐, 훨씬 낫잖아.”

리즈는 거울을 보며 오랜만에 보는 동그랗고 매끈한 이마에 만족스러워했다.

“그, 그러네요.”

미라벨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흉터가 자라기도 하는 걸까? 어째 오늘은 평소보다 더 커 보이지?’

“그럼 이제 가 볼까?”

리즈가 밝은 얼굴로 팔걸이를 짚고 일어섰다.

“저기…… 아가씨.”

미라벨이 돌아서려는 아가씨를 다급히 붙잡았다.

“왜?”

리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게…….”

미라벨 인생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이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빨리 말해.”

리즈의 재촉에 미라벨이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커, 컨실러 좀 더 바르면 안 될까요?”

***

사실 리즈는 몇 번 더 선볼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꿈은 오직 결혼이었다. 전생부터 이어진 꿈이자 소망이다.

단순히 웨딩드레스를 동경해서 소망하는 게 아니었다.

가족이 없이 한평생 외롭게 자라야 했던 전생의 그녀에게 가정이란 울타리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부자가 아니어도 좋다. 단칸방에 살아도 좋다. 그저 소박하게 가정을 일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를 정성껏 키워 내는 것, 그녀는 오직 그것만 바랄 뿐이었다.

그렇듯 소박한 꿈을 끝내 못 이루고 죽었고, 현생에서 또 한 번 반복할 뻔했으니 정말 생각할수록 아찔해진다.

더 좋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욕심도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서로 존중하며 일평생 동반자로 살 사람이면 충분했다.

아무튼 별다른 일이 없으면 오늘 바로 혼사가 결정 날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청초한 모습의 리즈는 드레스 자락을 사뿐히 거머쥐곤, 미라벨의 부축을 받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제 이 긴 복도를 지나면 자신의 예비 신랑이 있는 응접실에 다다를 것이다.

첫인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처음 뵙겠습니다?’

아니다.

연회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으니 그 인사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대화도 주고받은 것 같은데. 무슨 대화였더라?

기억이 잘 나진 않았지만 지극히 짧은 대화였을 것이다. 혹은 그녀 자신이 무시로 일관했거나.

당연했다. 그 당시 자신의 머릿속은 온통 케인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그 외의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생각해 보면 참 우습다.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을 생각하느라 미래의 남편 될 사람을 놓쳐 버릴 뻔하다니.

그가 자신의 성의 없는 대꾸에 얼마나 상심했을까?

살아가는 동안 최선을 다해 잘해 줘야겠다.

아주 행복에 겨워서 비명을 지를 정도로 말이야.

리즈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투지를 불태웠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응접실에 다가가는데…….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이상하게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욕설 같기도 하고.

“뭐지?”

리즈가 미라벨을 돌아보았다.

미라벨이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리즈는 치맛단을 움켜쥐고선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미라벨은 아가씨의 막대기 같은 다리가 꺾이지 않도록 부축한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리하여 응접실 문을 벌컥 열었는데.

리즈는 순간 까무러칠 뻔했다.

루벤트 영식이, 자신의 예비 신랑이, 웬 여자에게 머리채를 잡혀선 마구 휘둘리고 있었다.

시중인들이 말려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어머니는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선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리즈가 어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랬더니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이를 어쩌니, 리즈. 글쎄 저 여자가, 루벤트 영식의 정부란다.”

“……네에?”

“루벤트 영식이 맞선 본다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와선 저렇게 행패를 부리지 않니? 이런 망신이 어딨다니.”

“야아…… 이 바람둥이야.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여인의 독기 어린 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울렸다.

손아귀 힘으로 보았을 때 오늘 루벤트 영식의 머리는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너무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전생에서 보았던 어느 막장 드라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오늘 맞선은 물 건너갔구나.

***

소란이 끝난 후 리즈는 미라벨로부터 자세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셰비네 클로드?”

“예에, 아가씨.”

“그게 그 정부 이름이라고?”

“예에, 아가씨.”

“꽤 이름난 가수고?”

“예에, 아가씨.”

“미라벨.”

“예에, 아가씨.”

“나 그냥 결혼하지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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