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결혼하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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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결혼하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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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결혼하실 겁니까?
2023.06.03.
“읏쌰!”
열린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리즈는 걷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며칠간 재활 훈련을 열심히 한 덕분에 요전 날보다 한결 걷기가 수월했다.
간만의 체력 소모로 이마에 송골송골 돋아난 땀도 산뜻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걸어 보고 싶었다.
리즈는 열린 문을 넘어 복도로 걸음을 내디뎠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보니 시중인들의 휴식 시간인 모양이었다.
리즈는 중앙 층계까지 진출했다. 그곳을 반환점 삼아 막 돌아서려던 찰나, 그녀는 제 몸이 조금 더 고된 자극을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칸만 내려가 보자.’
의원이 계단은 아직 무리라고 했지만, 그건 이틀 전 이야기였다. 그리고 오늘은 유난히 컨디션이 좋았다.
리즈는 난간을 잡고 한 단 아래로 발을 내렸다.
평지를 걷는 것에 비할 수 없는 힘이 필요했다. 겨우 한 칸 내려갔을 뿐인데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겨우 회복되어 가는 몸, 한 번 더 다치기라도 하면 평생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르니 더 욕심내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돌아선 리즈가 계단을 오르기 위해 한 발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새 힘이 풀려 버린 걸까?
순간적으로 다리가 확 꺾이며 무게 중심이 뒤로 쏠리고 말았다.
재빨리 난간을 붙잡았지만 이미 기울어 버린 무게 중심을 되돌릴 만큼의 손아귀 힘이 그녀에겐 없었다.
‘아이고 나 죽네!’
리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분명 엄청난 각도로 기울어 기적이라곤 바랄 수 없을 몸이 더 이상 기울지 않고 그대로 정지해 있다. 심지어 구름 속에 폭 감싸인 듯 포근하기까지 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리즈는 슬며시 눈을 떠 보았다.
“괜찮아요? 아가씨?”
케인이 자신을 번쩍 안아 들고 있었다.
살았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보다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 또 당신이야?’
차라리 굴러떨어지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그 당혹스러움을 잘못 이해했는지 케인이 말했다.
“저런, 많이 놀라셨군요. 침실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아니, 괜찮아.”
리즈가 얼른 말했다.
물론 침실까지 걸어갈 힘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이 남자의 품에 안겨 가느니 기어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자 케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안 괜찮습니다.”
분명 웃으며 말하는데 말투에선 반박을 용납하지 않는 단호함이 묻어났다.
리즈는 요즘따라 케인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본다 싶었다.
고분고분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단호한 남자였구나. 품 안에 칼날을 숨기듯 감쪽같이 속였구나.
리즈는 어쩐지 가슴속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반드시 이 남자를 치워야겠다, 치울 수 없으면 도망이라도 가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건해졌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와 자신을 깨지기 쉬운 장식품이라도 다루듯 소중하게 다루는 손길과는 별개로.
***
“고, 고마워.”
케인의 품에서 제 침대로 내려온 리즈가 흘긋 눈치를 보며 감사를 표했다.
그의 정체를 알고 나서부터 리즈는 자신의 모든 행동에 그를 거슬리게 하는 부분이 없는지 눈치를 살피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케인은 리즈를 살피며 물었다.
“어디 불편하신 덴 없으세요?”
“없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리즈는 다리를 엄습하는 기분 나쁜 통증 때문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금세 감추었지만 이미 케인에게 발각된 뒤였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양해를 구하고선 갑자기 치마를 걷어 올렸다.
“뭐, 뭐 하는 짓이야?”
리즈가 당혹스러워하며 치마를 내리려고 했지만 케인은 꿈쩍도 안 했다.
잠시 그대로 리즈의 다리를 유심히 살피던 케인이 이내 미간을 굳히며 말했다.
“다리가 이렇게 부었는데도 괜찮다뇨?”
다리가 부었다고?
리즈는 그제야 허벅지 아래까지 훤히 드러난 제 맨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무릎이 물이 찬 듯 부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무리한 건가? 한동안 안 쓰던 관절을 갑자기 써서?’
“얼음찜질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케인이 말했다.
“괜찮아. 그냥 미라벨 좀 불러 줘.”
“미라벨 님은 지금 외출 중입니다.”
“그럼 다른 시중인이라도…….”
“제가 하겠습니다.”
또 단호한 말투. 몇 번을 들어도 절로 움찔하게 되는 위압감. 리즈는 더 이상 그를 만류할 수 없었다.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게 최선인 것 같았다.
“알았어……. 그렇게 해.”
잠시 물러난 케인은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양손에 수건과 얼음주머니를 각각 하나씩 들고서.
케인은 보들보들한 수건으로 리즈의 무릎을 감싼 뒤 그 위에 얼음주머니를 올려 두었다.
그럼에도 냉기는 금세 수건을 뚫고 무릎 살갗에 스며들었다.
리즈가 차가운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자 케인이 도톰한 담요를 가져와 리즈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참으로 몸에 밴 친절이다.
하긴, 그렇게 하도록 시킨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지. 게다가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들들 볶아 댔지.
이젠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니, 안 그래 줬으면 좋겠는데.
“이제 릴리아한테 가 봐. 시중인은 주인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거야.”
리즈가 타이르듯이 평온하게 말했다. 하지만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빨리 좀 나가 주시지. 나 질식할 거 같은데.’
“조금만 더 있다가요. 부기 가라앉는 거 보고요.”
아무래도 이 남자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숨통을 조이려는 게 틀림없다고 리즈는 확신했다.
그때 불현듯 케인이 물어 왔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낮고 은근한 음성에 어쩐지 불안해진 리즈는 제발 제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길 간절히 기도하며 허락했다.
“……물어봐.”
“결혼하실 겁니까?”
***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미라벨은 아가씨의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녀는 베리움 부인의 심부름으로 약제상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마님이 애용하는 입술 제제만 매진된 것이다.
그냥 돌아갔다간 한소리 들을 게 뻔하니 조너선을 재촉하여 멀리 떨어진 저잣거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미라벨은 돌아오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아가씨가 그새 많이 찾으셨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계단을 한 번에 두 칸씩 뛰어오르는데,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반갑지 않은 인물을 발견하곤 우뚝 멈춰 섰다.
“케인, 네가 여긴 왜 있지? 넌 이제 릴리아 아가씨의 시중을 들기로 하지 않았어?”
“리즈 아가씨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케인은 특유의 생글거리는 얼굴로 미라벨에게 연장자의 예우를 갖추곤 그녀를 스쳐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데 미라벨은 못내 불안해졌다.
“쟤가 무슨 말을 하려고? 갑자기?”
미라벨은 아가씨가 케인을 총애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하다. 그렇게 티를 냈으니 눈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 마님은 눈이 없는 걸까?
별일이 없어야 하는데. 이제 겨우 마음을 다잡고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 아가씨를 저놈이 또 흔들어 놓으면 안 되는데.
이로써 미라벨의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아가씨를 보필하는 일, 아가씨의 흉터를 의식하지 않는 일.
그리고 케인을 막아서는 일.
미라벨을 지나 아래층으로 내려간 케인은 본래라면 릴리아의 방에 들려 필요한 게 없는지 물었어야 했지만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다. 그러고서 문을 잠갔다.
커튼 한 장 없이 늦여름 태양의 무자비한 볕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방이었다.
그는 열린 창가로 다가가 창틀에 기대어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저물어 가는 태양이 잡목림 꼭대기를 향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고, 새들은 무리 지어 살구 빛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숲에서부터 선선하게 불어온 바람은 정원 한편에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살랑살랑 흔들어 놓고 있었다. 더위가 한풀 꺾인 오후 한때의 평화로운 정취였다. 하지만…….
케인의 의식은 그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기억 속 리즈에게로 향해 있었고, 귀에서는 리즈와의 마지막 대화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결혼하실 겁니까?’
‘당연히.’
‘왜요? 갑자기?’
‘왜냐니? 나도…… 결혼해야지. 나이가 나이기도 하고.’
결혼…… 나이…….
가만히 리즈의 말을 되뇌던 케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언제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더니. 원치 않는 사람이랑 살 바에야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더니.
그토록 자신에게 집착하던 아가씨가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을까?
처음엔 자신의 관심을 끌려는 수작이 아닐까 싶었다.
모름지기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만큼 관심 끌기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한데, 아닌 거 같다.
진짜 마음이 바뀐 거 같다.
왜? 무엇 때문에 십 년간의 집요한 관심을 끊어 버린 거지? 그것도 미련 한 점 없이 단번에?
잡목림 너머로 태양이 절반쯤 모습을 감추고, 옅은 오렌지색 띠가 서편 하늘 가장자리를 장식할 때까지 케인은 창가에 기댄 그대로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좀처럼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몇 가지 떠오른 생각은 너무 터무니없어서 그조차도 실소를 자아낼 정도였다. 결국 그는 답을 찾기를 포기했다.
대신 그는 저녁노을을 마주하며 왼쪽 가슴 위에 가만히 손을 대 보았다.
‘리즈 아가씨가 마차 전복 사고를 당하셨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덜컥 심장이 내려앉던 느낌이 아직 그곳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생소한 감각이 그날, 묘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리즈 베리움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진절머리 나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 의문을 풀고 싶은데 리즈는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는 의식을 회복한 직후부터 줄곧 자신을 밀어내고 있으니까. 그것도 아주 필사적으로.
하지만 뭐, 그러라지.
밀어내도 밀리지 않으면 그뿐이니까.
그는 의문을 풀 때까지 리즈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문득 그의 굳어 있던 미간이 풀어지고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마침내 제가 취해야 할 입장을 정한 데서 오는 평온함이 깃든 미소였다.
케인은 어둑해진 창가에서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저물어 가는 태양 때문에 그의 그림자가 더욱 길고 거대하게 어둠을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