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집착은 그만할래 (2/65)


#2화 집착은 그만할래
2023.06.02.


16857029322438.jpg

 
중세 유럽풍 로맨스 소설 ‘루젠시아의 꽃’.

그게 리즈가 빙의한 이 세계의 이야기를 담은 책의 이름이다.

내용은 뭐, 핍박받던 사생아 릴리아가 역경을 딛고 제국의 안주인이 된다는 흔해 빠진 이야기였던 것 같다. 너무 흔한 신데렐라 스토리여서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물론 내 이야기만 아니었으면 읽지 않았어도 아무 상관 없었을 테지만.

문제는 이 이야기 속 여주, 릴리아가 리즈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것.

리즈는 아버지가 바람피워서 데려온 딸 릴리아를 증오해서 시도 때도 없이 괴롭혀 왔다는 것. 잘생겨서 마음에 품어 왔던 노예 케인이 릴리아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한층 더 괴롭힘이 심해졌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노예 케인이 남자 주인공이자 오래전에 행방불명된 황태자이며, 훗날 황제가 된다는 것.

한 절기 뒤, 리즈는 질투에 눈이 멀어 릴리아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려다 케인의 손에 죽고 만다.

아…… 내가 그렇게 죽는다니. 리즈는 기가 막혔다.

어째서 그런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 거지? 결혼도 한 번 못 해 보고?

전생에서도 그러더니.

리즈는 결혼이 하고 싶었다.

전생에 어장 관리남한테 잘못 걸려서 사 년을 희망 고문에 시달렸다. 남자는 잊을 만하면 연락을 했고, 정리될 만하면 찾아와서 애써 다잡은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 바람에 전생의 그녀는 다른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너밖에 없어. 내가 제일 맘 편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내가 유일한 안식처인 것처럼 말하더니, 결혼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설레어서 안절부절못하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때 생각했다.

안식처가 꼭 배우자일 필요는 없었나 보다…… 라고.

그날 그녀는 상심한 마음에 술을 잔뜩 먹고 걷다가 달려오는 트럭을 보지 못하고 길을 건너는 바람에 세상을 하직했다.

조실부모하고 친척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살아온 삶이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었다. 슬퍼하는 사람을 뒤에 남겨 두었다면 상당히 미련이 남았을 테니까.

아무튼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그렇게 허무하게 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리즈는 결심했다.

달라지기로.

“케인…….”

‘님’을 붙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잠시 고민했지만, 자칫하면 자기의 본래 신분을 눈치채고 있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니까 그냥 부르던 대로 부르기로 했다.

“말씀하십시오, 아가씨.”

케인이 눈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속내와는 상관없이 습관적으로 짓는 예쁜 눈웃음에 예전 같으면 눈이 뒤집혔을 테지만,

“앞으론 릴리아의 시중을 들도록 해. 나 말고.”

이젠 아니다.

***

케인이 베리움 후작저에서 일한 게 십 년. 릴리아가 이 집에 들어온 게 일 년. 접점이 많지 않은 탓에 케인과 릴리아의 사이는 아직 주인집 둘째 아가씨와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본격적인 사랑이 시작되기 위해선 악역의 괴롭힘이 필수지만, 그 악역은 이제 악역 노릇 할 생각이 없어졌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리즈는 두 사람을 엮어 주는 것으로 악역 노릇을 대신할 생각이었다.

일단 얼굴을 자주 맞대어야 사랑이 싹틀 테고, 그래야 황궁으로 돌아갈 때 데리고 돌아갈 테니까.

시기가 원작보다 좀 이르긴 하지만 별로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사랑하게 될 사이니 오히려 빨리 이어지는 게 나을지도.

케인도 당연히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주인 아가씨한테서 벗어날 수 있어서. 그런데,

“아가씨 식사하세요.”

다음 날이 되자 어김없이 아침 식사를 들고 해사한 웃음까지 지으며 찾아온 케인을 보고 리즈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 여긴 왜 있어?”

“왜 있다뇨?”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말투로 케인이 음식을 침대 위 간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가씨 아침 드리려고 왔죠.”

“릴리아의 시중을 들라고 했잖아.”

“그거 진심이셨습니까?”

진심…… 이셨냐니.

“전 아가씨가 그냥 해 본 소린 줄 알았습니다. 크게 다치고 나면 가끔 그러기도 하니까요.”

리즈는 이제야 알았다.

케인은 자신이 사고 이후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실언한 것이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아니야. 진심이었어. 나는 멀쩡해.”

“아닌 거 같은데요?”

케인이 리즈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다리, 아직 잘 못 움직이시잖아요.”

그러고 보니…….

리즈는 아직 신경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사고 당시 척추에 충격이 가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다리가 마비되었다. 다행히 감각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는데, 문제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거였다.

의원은 완전히 회복되려면 몇 주 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방이나 복도야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 되니까 괜찮은데, 문제는 계단이었다. 누군가 들어 주지 않으면 오르내리는 게 불가능했다.

이 집에 힘센 하인은 케인이 유일한데, 케인이 아니면 누구를 시키지?

미라벨은 좀 그렇고.

에잇. 모르겠다. 그냥 안 내려가고 말지.

딱히 바깥 활동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건 시중인을 시켜 가져다 달라고 하면 될 테고.

무엇보다 자신을 죽일 운명인 황태자와 더 이상 엮여선 안 된다.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살게. 그러니까…….”

“…….”

“이제 진짜 릴리아한테 가 봐. 릴리아한테도 네가 담당 시중인이 될 거라고 말해 놓았으니.”

찰나의 순간이었다.

케인의 얼굴에 늘 걸려 있던 웃음이 옅어진 건.

그 찰나의 틈으로 리즈는 보았다. 차갑고, 딱딱하고, 어떨 땐 무자비하기까지 한, 원작 남주의 모습을.

‘혹시나 했더니 정말이었네.’

여태껏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 순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케인은 남주고 자신은 여주를 해치려다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악역 조연 리즈 베리움. 둘 사이의 관계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임을. 이 남자를 눈앞에서 치우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운명은 원작대로 흘러갈 것이다.

“갑자기 왜…….”

케인이 뭔가를 말하려 입을 여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약 드세요.”

미라벨이었다.

리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라벨은 작은 쟁반에 약과 사탕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그녀가 보기만 해도 쓴 청록색 액체가 담긴 약병을 리즈에게 쥐여 주는 동안 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가 가볍게 묵례하고서 몸을 돌렸지만 리즈는 청록색 액체를 꿀꺽 삼키느라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약이 혀에 닿자마자 느껴지는 쓰고 떫은 기운에 리즈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미라벨은 리즈의 얼굴이 더 일그러지지 않도록 얼른 사탕을 입안에 넣어 주었다.

사탕을 먹고 겨우 혀가 달래지자 리즈가 말했다.

“어머니 좀 불러 줘.”

“마님이요? 마님 지금 마사지 받으신다고 중요한 일 아니면 찾지 말라고 하시던데요.”

“중요한 일이라고 해.”

“……?”

“나 맞선 볼 거거든.”

미라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기 위해 뻗은 케인의 손이 허공에 그대로 정지한 것도 그때였다.

***

“마…… 맞선이라고 했니?”

“네.”

어머니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만도 했다. 케인에게 빠진 뒤로 들어오는 구혼장마다 족족 퇴짜를 놓았으니까.

그리고 그건 케인을 좋아해서이기도 했지만, 케인이 리즈의 눈을 너무 높여 놓은 탓도 있었다. 웬만한 귀족 영식들보다도 훈훈하고 잘생긴 남자가 눈앞에서 얼쩡대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가.

“갑자기 왜?”

어머니가 재차 묻고 리즈는 주저 없이 답했다.

“갑자기 하고 싶어졌어요.”

“그럼 해야지.”

어머니는 딸의 마음이 바뀔까 봐 더 묻지도 않고 일을 진행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리즈의 나이는 스무 살, 대부분이 십 대 후반에 결혼을 하는 이 세계에선 조금 늦은 나이기 때문이다.

혼기가 찬 딸을 데리고 있는 건 그녀의 사교계 위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증거니까.

어머니는 곧바로 받아 둔 구혼장을 서랍 속에서 꺼내어 이리저리 분류하곤 집사를 시켜 연락을 취했다.
그 모든 진행 과정을 미라벨의 입으로 빠짐없이 전해 들으며 리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잘되고 있네.”
“원하시는 조건이 없으신지 마님께서 물으시는데요?”
“없다고 해.”
“그래도 너무 없으면 안 돼요. 가벼워 보이거든요.”

미라벨이 충고했다.

혹시 리즈가 자신의 이마에 떡하니 자리 잡은 흉터 때문에 저렇게 싼값에 자신을 팔아넘기려나 걱정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 속을 알 리 없는 리즈는 태평하게 말했다.

“좀 가벼워 보이면 어때? 너무 튕기기만 하는 것도 매력 없어.”

이전에 많이 튕겼으니, 좀 가벼워 보이는 것도 괜찮겠지. 게다가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다.

죽음의 사자와 한집에 살고 있는 것 자체로 리즈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다음 날 어머니가 직접 찾아와 첫 일정을 말해 주었다.

“루벤트 백작의 장남 파브리스 경과 연락이 닿았다. 내일 정오에 이곳 응접실에서 만나기로 했어.”

“파브리스 루벤트…….”

리즈는 그 이름을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아는 사람 같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아, 그 어설프고 말주변 없는 남자.’

갈색 머리에 검은색 눈동자. 중간 정도 되는 키에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착해 보이는 인상에, 또 착해 보이는 인상에…… 그저 착해 보이는 인상.

한마디로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나쁘진 않네요.”

좋지도 않지만.

“루벤트 백작가라면 요즘 떠오르는 권세가 아니니? 재력 쪽으로도 알차고. 무엇보다 선대 귀부인이 인품 좋고 덕망이 높기로 이름난 사람이지. 그 사람 밑에서 자란 아들이니 보나 마나 성격이 좋을 게다.”

‘부모의 성격을 자식이 닮는다……. 그럼 나는 어머니를 닮았다는 건데, 썩 기분이 좋진 않네.’

리즈는 헛웃음을 흘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가 사전에 숙지해야 할 사항을 알려 주었다.

“인사말이랑 예법은 미리 연습해 둬라. 걷는 연습도 좀 해 두고.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는 없지 않니?”

“네.”

리즈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으니까.


2